팔레스타인은 ‘비옥한 초승달’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고 보잘것없는 지역이었지만 대단히 중대한 지정학적 의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이어 주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국경지대에서 성장한 미가는 자연히 국제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침략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갖게 됩니다. 그것은 해안 지방이나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심리입니다.
미가는 예루살렘 주민보다 시골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을 보였고, 유다에 임박한 파멸의 근본 원인인 백성의 죄악을 정죄할 때도 고향 마을 시골 사람들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주로 도시와 궁정의 타락, 음모를 풍자·비판한 데 비해 미가는 농민을 학대한 지주들의 탐욕과 불의를 꾸짖었던 것입니다.
미가는 무엇보다도 고향 마을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학대와 어려운 처지에 진정 어린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 문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가장 중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지배계급의 사치와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 모순에서 비롯된 각종 사태가 주로 농촌에 집중된 이유는 사회적 비리와 불의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욱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자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농촌에 비해 사회의 계층과 구성이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미가는 부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금력과 권력을 쥔 부자들은 못된 일을 계획하고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해치우는 악당들입니다. 탐나는 집과 밭이 있으면 모조리 빼앗고, 집주인은 종으로 밭 임자는 머슴으로 부려먹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원수 다루듯 하고, 평화롭게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며, 부녀자들을 정든 집에서 쫓아냅니다.(2:1?9)
금력과 권력을 가진 부자들이 농민을 수탈한 주역이라면, 유다의 재판관들은 부자들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봉사했습니다.
미가는 기원전 8세기 유다의 경제 번영 이면에 가려진 부자들의 횡포와 민중의 비참한 삶을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는 ‘경제 발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던 정치 지배자들의 추악한 뒷모습을 낱낱이 들추어 정죄했던 것입니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탐욕스러운 무당, 판수로 전락해 버린 거짓 예언자들에게 앞일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황금에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미가의 예언을 볼 때 이것이 단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도덕적 사실’입니다.
미가는 야훼를 거스르는 유다 지배계급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 말한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미가는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 출신 예언자’인 동시에 포악한 부자들과 맞서 싸운 ‘농민의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그린 메시아는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에서 출생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미천한 출생의 노동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의 조상은 목자였고,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은 목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여러 비유에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풍모는 시골의 들판과 가축, 외양간에 잘 어울립니다. 하인과 장터의 아낙네, 광야의 목자와도 잘 어울립니다. 유다의 가난한 농민들은 메시아가 자신들과 같은 신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미가의 약속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얻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는 로마 제국에서 주로 노동자들과 노예 하층민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입니다.
헌신적으로 의무를 이행하고, 타인을 선의와 성실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이전에 ‘신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핵심입니다.
전반적으로 스바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유한계급을 질타했으나 결코 빈민의 입장에는 서지 않았고, 아모스나 미가처럼 빈민의 고통에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같은 경향은 스바냐가 왕실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고 설명하면 쉽사리 납득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유다는 아직 명목상 앗시리아의 속국이었지만, 요시아는 앗시리아의 세력 약화를 틈타 다윗 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음이 분명합니다
스바냐의 예언 사상은 ‘야훼 날의 임박’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주제는 4단계로 나누어 제시됩니다.
매우 젊은 나이에 활동하다가 요절한 것으로 보이는 스바냐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격렬하고 가차 없는 분노를 보였습니다. 『구약성서』의 다른 어떤 책도 「스바냐」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파멸당하는 것입니까? 스바냐에 따르면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본이 흐트러졌다면 개혁은 해 보았자 헛일이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스바냐는 그의 개혁 운동을 비관적으로만 보았을까요? 우리는 비단 스바냐뿐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연하의 예레미야 역시 요시아에게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요시아의 개혁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그 개혁 정책의 진정한 목적은 고작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합시켜 위대한 왕국을 건설하고자 한, 정치적 개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히브리 종교의 신은 밀실에 숨어 있는 소시민적 부류들을 등불로 찾아내어 그들을 기어이 광장으로 끌어내고자 합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모든 사람에게 공적인 영역, 즉 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나훔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낙관적인 애국자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백성이 받은 모진 박해와 굴욕이 그의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품고 있던 감정을 대변해 준 인물이었습니다.
나훔 시대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아 오면서 야훼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엷어져 가는 종교적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백성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었던 앗시리아가 속히 멸망하리라는 예감이 들자 나훔의 감정은 반전되었습니다.
나훔은 군국주의를 반대했습니다. 「나훔」은 무력에 의한 전제적 폭압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위치를 점합니다.
나훔은 야훼가 전능한 도덕적 심판자임을 드러냅니다. 강대한 앗시리아를 멸망시키는 분은 다름 아닌 약소국 유다의 신 야훼였습니다. 나훔은 회개의 필요성은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죄악에 대한 도덕적 심판만을 말했습니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인간적인 복수심, 증오심만을 만족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도덕적 정의와 심판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훔의 예언은 적의 멸망에 대한 환희인 동시에, 야훼의 정의에 대한 찬양이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는 야훼 편에 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언을 선포했으나, 하박국은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서서 야훼에게 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야훼의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할 경우 주어질 야훼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들과 달리 야훼를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대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정의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견디며 인내했던 데 반해 하박국은 정의가 이스라엘에서 시행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엄청난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 채워 놓은 이가 바로 야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야훼에게 불평, 불만이 뒤섞인 질문을 퍼부으며, 부당해 보이는 야훼의 처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에게 의문을 제기하긴 했으되, 야훼를 거역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다만 현실 생활에서 솟구치는 의문, 즉 야훼는 정의로운데 어째서 세상의 불의를 방관만 하는지에 관해 솔직히 궁금증을 피력할 따름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사용한 ‘믿음’이란 말은 바울이나 루터가 사용한 ‘믿음’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믿음’의 원어인 히브리어 ‘에무나’Emunah는 『구약성서』에서 흔히 육체적인 견실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무나’는 공적 임무의 성실한 수행을 뜻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진실성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박국이 사용한 ‘에무나’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것보다 그 범위가 자못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faith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마도 ‘신실함’faithfulness이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듯싶습니다.
‘의인은 신실함으로 산다’는 무슨 뜻일까요? 설사 신앙을 혼란케 하는 불의와 무질서를 경험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 야훼에게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레스 같은 위대한 정복자가 정치적으로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유대 민족의 문제에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베풀었다는 것은 일견 기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칙령은 그가 시행했던 전반적인 관용 정책의 한 사례에 불과했을 뿐, 결코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관용’은 이를테면 고레스의 등록상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명에 따라 바빌론은 물론 바빌로니아의 다른 모든 도시가 페르시아군에게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고향’이나 ‘조국’ 같은 향수 어린 감정 외에 포로들을 끌어들일 만한 요인이 없었습니다. 도시는 황폐해졌습니다. 성전은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상당한 부를 축적한 유대인은 동포의 귀환을 물질적으로 기꺼이 도와주려 했지만(「에스라」 1:6), 자신이 직접 모험에 참여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처럼 그들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597년 또는 기원전 586년에 맨 먼저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기나긴 포로 생활을 겪는 동안 대부분 기원전 538년 해방되기 이전에 죽었습니다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에 살았던 유대인 중에서 고향을 간절히 그리워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려면 오랜 시간 동안 대단히 힘겨운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대규모의 집단적인 귀환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헌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기회가 닿는 대로 이따금 작은 집단을 이루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스가랴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다리우스 왕 2년, 즉 기원전 520년이었습니다.(1:1) 학개의 예언이 기원전 520년 6월부터 9월까지 3, 4개월 동안 진행된 데 비해 스가랴는 학개보다 두 달가량 늦은 기원전 520년 8월에 등장해 기원전 518년 9월까지 2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로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불안정한 정국이었습니다. 간절한 그들의 눈에는 제국 전역에 발생한 거대한 반란의 소용돌이가 세계와 우주의 대파국으로 비쳐졌고, 그 파국은 메시아가 출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조로 간주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스가랴가 예언 활동을 할 동안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해 가고 있었습니다. 캄비세스 사망 후 발생한 혼란은 종말론에서 말하는 ‘재난의 시작’(「마가복음」 13:8)이 아닌, ‘일시적인 위기’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스가랴는 먼저 백성에게 야훼의 예언자인 자신에게 귀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옛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도 이를 거역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에게는 과거에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은 전력이 있음을 깊이 유념하고, 스가랴의 예언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이 역사적 상황의 궁극적인 변화와 메시아의 강림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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