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
김현 외 28인 지음 / 알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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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 혼란, 무력감을 호소한다. 『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는 고통과 고립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스물아홉 명의 작가들은 시와 에세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앞표지와 뒷표지는 각각 다른 장르로 시작한다. 앞표지는 에세이로, 뒷표지를 시로 시작하며, 앞표지와 뒷표지는 거꾸로 되어 있다. 쪽수도 에세이(E)와 드로잉(D), 시(P)로 표기되어있다. 독자는 원하는 장르를 선택하여 볼 수 있다. 표지는 마분지로 마감하여 색다른 질감을 선사한다. 표지 또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인다. 몽환적이며 뭔가 모를 생동감이 느껴진다.


에세이를 읽었다 머리가 아파오면, 시를 읽고. 마음이 뜨뜻해지면 그림을 감상한다. 다양한 맛과 향이 우리를 유혹하니, 이 책 한 권 들고 여행이나 떠나면 좋겠다. 커피 한잔 내려놓고 비 오는 창가에서 빗소리 들으며 이 책을 읽는 것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진다.

 

​이 책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이 많지만 학문적인 에세이도 포함되어있다. 특히 미생물학 박사로 미국에서 백신 연구를 하고 있는 문성실의 글은 팬데믹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과학 큐레이터 이지유 작가의 글은 우리의 안목을 훨씬 더 폭넓게 만들어준다.   


아. 이 책을 급히 볼 생각은 하지 마시길. 부디 천천히. 아쉽다면 아쉬움이지만 엔솔로지 작품을 마주하며 장편소설의 플롯을 기대해서는 안되니. 동일한 상황도 각자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다른 경험이 되니.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 읽으면 큰 힘이 될 듯.


그럼에도 각 작품은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정황이 주는 답답함과 혼란스러움. 그 가운데서도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끊어져있고 떨어져 있고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석주의 마지막 속삭임은 우리를 희망으로 이끈다.


삶이 사막, 밤, 광활함에 잠식되더라도

고개를 떨구거나 의기소침에 빠지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우리는 서로에게 기꺼이 

일상의 안녕과 평온한 기쁨을 건네는 집이 될 테니까요(66).


"의지와 노력만으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과 우울, 무력감이 현실의 시간을 허공에 조각내버리는 듯했다. 그렇게 조각난 허무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어느새 2020년의 절반이 지났다."

안지미
- P12

"부모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신(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마흔이 되고 보니 그때 마흔의 부모란 애송이. 칠순이 되어 (이제 여기 없는) 그때 칠순의 부모를 되돌아보면서 저는 저의 어떤 면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될까요."

김현

- P24

"우리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작은 기쁨을 던져 그것을 깨뜨리려 하거나 위협을 한다. 슬플 겨를도 없이 시간에 매몰되어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까지로 건너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슬픔을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는 슬픔을 기다리지 않는다.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서윤후
- P56

"공상은 유용한 것들에 대한 무기력한 투항이 아니에요. 공상은 근육의 이완과 백일몽의 모호함 속에서 기쁨은 촘촘해지지요. 이것이 모험가의 일은 아닐지라도 아주 무익하진 않아요. 시간을 헛되이 쓰는 잉여 활동에 가까운 이것의 쓸모는 엉뚱한 지점에서 나타나지요. 머릿속에 꿈의 공장을 짓는 일이라는 점에서 공상의 쓸모란 ‘쓸모없는 쓸모‘에 가깝지요."

장석주
- P63

"삶이 사막, 밤, 광활함에 잠식되더라도 고개를 떨구거나 의기소침에 빠지지는 말아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내게, 우리는 서로에게 기꺼이 일상의 안녕과 평온한 기쁨을 건네는 집이 될 테니까요."

장석주
- P66

"지난 백 년과 다르게 우리는 기술이 있고, 경험이 쌓였으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앞으로 백 년을 내다보고, 전 세계가 공조할 수 있는 전염병 대응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일들을 통해 전염병과의 두더지 게임이 시작되었다."

문성실
- P73

"정작 심각한 것은 친인들을 잃어버린 물리적 거리보다 접속사를 상실한 언어의 거리가 아닐까. 살아온 삶을 설명할 언어를 잃고 점차 허무로 치닫는 영혼의 감염이야말로 오랫동안 인간을 괴롭힐 것이다."

장은수
- P81

"언어가 닿아 있는 한,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가 소멸하지 않는 한, 영혼 또한 존재한다. 영혼이 아직 있는 한, 입술은 언어를 내보낸다. 이로부터 위대한 순환, 즉 절망적 세계를 구원하는 시의 운동이 나타난다."

장은수 - P82

"20세기의 역사는 ‘접속사‘를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문명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공포와 고독, 절망과 광기, 냉소와 허무에 시달리던 이들은 끝내 언어를 되찾지 못하고 또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유대인 대학살‘과 ‘원자탄 투하‘라는 인류사적 비극을 겪었다."

장은수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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