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바리새파의 것이라 언급하신 모든 관습들-손 씻기, 그릇 씻기-은 부정한 음식이 몸의 정결함을 침해하는 것에 관한 바리새파의 특정한 전통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P202
밖에서 오는 부정함(문자적으로 할라카적 부정함)을 믿은 그러한 바리새인들 안에서 나오는 부정함에 관한 토라 규율의 종교적인 진의를 완전히 놓친 것이다. - P202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례(부모 부양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토라를 완전히 왜곡했고 무시했다. - P202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밖에서 오는 부정함이 가능하다며 율법을 바꾸었을 때, 그들은 또한 율법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 P202
밖에서 오는 부정을 추가한 것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토라 안의 의미는 무시한 채, 오직 〔토라〕 밖에서부터 토라를 읽었다. - P202
이처럼 할라카 문제는 더할 나위 없는 작은 비유와 같다. 예수께서 음식의 정결과 부정함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코셔 체계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정결 관습들에 대한 바리새파의 이해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 P203
초기 유대인들의 주된 성경 주해 방식은 미드라쉬였다. 미드라쉬는 새로운 교훈이나 내러티브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성경 곳곳에서 관련 있는 (혹 심지어 겉보기에 연관되지 않는) 단락이나 구절들을 연결짓는 것을 말한다. - P226
이런 예언적인 텍스트들과 다니엘서의 그 사람의 아들과의 연결은 분명 고난받는 예수에 관한 연구〔기독론〕의 온전한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예수의 죽음(과 승귀)도 이에 따라 해석되었다. - P226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 이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죄인을 대신해 받는 메시아의 고난과 속죄하는 죽음이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개연성이 있다. - P226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이미 자리 잡힌 상태에서, 메시아 대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시며 자신을 살피시고 그리시며 나타내시는 예수를 보게 된다. - P227
우리의 죄를 속죄하려 고난받는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종교 역사 동안 내내-심지어 기독교와 분리되고 난 한참 뒤에도- 친숙한 개념이었다. - P237
고난받는 메시아 개념은 고대 유대교, 중세 유대교, 그리고 근대 초기 유대교에도 존재한다. - P237
본질적으로 ‘(십자가에서 나온) 기독교인의 메시아 개념이냐 아니면 유대인의 (승리주의자) 메시아 개념이냐‘의 대결 같은 것은 없다. - P246
단지 하나의 복합적이고 경쟁적인 메시아 개념, 곧 마가와 예수께서 유대인 공동체 전체와 함께 공유했던 메시아 개념이 있을 뿐이다. - P247
자신이 받을 고난을 예언하신 그리스도, 수난 내러티브 속 바로 그 고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는 온전히 유대 토양에서 자랐다"는 마르틴 헹엘의 주장과 결코 어떤 점에서도 부딪히지 않는다. - P247
복음서의 유대교는 쉽게 말해 전적으로 유대-메시아 운동이었으며, 복음서는 유대적인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 P247
신약성경은 많은 이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제2성전기 유대인의 삶과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250
그분의 생애, 특권, 권세 심지어 승리 이전 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막들은 모두, 성경을 미드라쉬적으로 세밀하게 읽은 데에서부터 발전해 나온 것이며, 이것들은 결국 그분의 생애와 죽음 안에서 성취된다. - P253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체험한 승귀와 부활은 이 내러티브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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