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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평점 :

'고난'의 문제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대답이 필요함과 동시에 더욱 실제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닥친 고통의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 정서적 · 사회적으로 매우 구체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고통이 자신에게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선명한 대답을 듣지 못하여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난 가운데 우리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흔히 '신정론(theodicy)'이라 불리는 이 주제로 인해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목회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고통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자인 토마스 롱(Thomas G. Long, 1946~)은 Witness of Preaching으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설교학의 대가다. 그는 지금까지 논의된 고난의 문제가 목회 현장에서 적실하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적으로도 명료하면서도 고통의 한가운데서 울부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응답을 모색한다.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은 네 가지 주요한 신학적 질문 중 최소한 하나를 포기하거나 축소하는 식으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네 가지의 주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해롤드 쿠쉬너(Harold S. Kushner)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전능성을 양보함으로 극복하려 했다. 미국의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정의에 수정을 가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악의 기원을 피조물의 자유의지와 반역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론 또한 합리적인 여러 반박들 앞에 타당성이 크지 않음을 저자는 논증한다.
저자는 이러한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그동안의 접근방식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배우고 계승해야 할 것들을 세심하게 분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 사랑하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특히 '무고한 고통의 경험'에 대한 문제는 조금 더 세심한 용어 사용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무고하다'라는 용어보다는 '비극적'이라는 용어 사용이 훨씬 더 인간 삶의 실재와 일치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용어의 전환만으로도 꼬였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욥기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를 통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임을 역설한다. 신정론적 질문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갖게 되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그동안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갖지 못한 목회적 관점이며,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차근차근 해석함으로 고난의 문제에 대해 신학적이고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 저자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원인인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지,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지에 대한 질문이다. 토마스 롱은 세 가지의 질문들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고찰함으로 매우 실제적이고 적실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 선함,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상황과 환경이 변하고 한 사건에 얽혀 있는 많은 맥락들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접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희망과 통찰을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방법은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신학적 용어로 볼 때 신정론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겨우 삼백 년 전 철학자 라이프니치가 고안해낸 용어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ē(정당성)"가 합쳐진 것으로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고,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신정론이다 - P16
어만은 하나님의 능력, 현존, 자비에 관해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인생의 엄연한 사실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만이 볼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행하기를 꺼려하셨다 - P52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무고한 고통 역시 존재한다는 이 네 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충돌은 라이프치니 시대로부터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공식을 형성해왔다. - P56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은 천사나 스랍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에 소속된 만큼이나 확실히 세속적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며, 신앙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과학과 이성의 세상에 굳건히 내려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다 - P59
신자들이 울부짖음의 형태로 우리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 P71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 P81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필수 요인으로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하나님은 악의 주체이며 도덕적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 P142
아이의 죽음은 "무고하다"라기보다는 "비극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런 용어의 전환은 아이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실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런 비극이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무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상태에 내재된 모든 위험과 가능성을 동반한다. 아이는 고난을 당했고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 역시 고통을 당했지만,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P149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책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도록 그림을 조작한 다음, 이런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리의 도덕적 질서의 투영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자 하는 편만한 종교적 충동에 대해 저항한다 - P156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건의 체계는 신적 섭리의 조건을 조작하도록 허용했고, 경건의 공식에 도전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위협 요소로 신속하게 걸러내야 했다. 엘리바스는 과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표지판을 그리느라 분주한 나머지, 새로운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이전 도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 P16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들어오셔서 외견상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기억과도 전쟁을 벌이신다. 악에 속한 모든 것, 마지막 승리에 대한 헛되고 거짓된 주장, 현재에서 야기된 아픔, 우리 기억과 역사를 장악한 악은 모두 불살라질 것이다. 악은 승리할 수 없다. 이 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것인데, 바로 그것은 "무"(nothingness)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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