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용어로 볼 때 신정론은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겨우 삼백 년 전 철학자 라이프니치가 고안해낸 용어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ē(정당성)"가 합쳐진 것으로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다.

끔찍한 참사가 발생하고, 과도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정당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그럴듯한 변호가 필요하며 그것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신정론이다.

이런 잔인한 공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하나님, 신적 의지 안에서 이런 무분별한 고통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은 도덕적 괴물일 뿐이었다.

어만은 하나님의 능력, 현존, 자비에 관해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인생의 엄연한 사실들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결핍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만이 볼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일도 행하기를 꺼려하셨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무고한 고통 역시 존재한다는 이 네 가지 가설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충돌은 라이프치니 시대로부터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공식을 형성해왔다.

오늘날 우리가 설교하는 대상은 천사나 스랍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에 소속된 만큼이나 확실히 세속적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며, 신앙에 한쪽 발을 딛고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과학과 이성의 세상에 굳건히 내려놓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이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 범주에 맞추어 축소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복음이 때로는 바로 이 범주들에 도전하며,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과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의미다.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다.

나는 설교자들이 회중에게 이런 지성적 탐구, 곧 합리성을 갖춘 신앙을 추구하는 기도가 갖는 유익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이 울부짖음의 형태로 우리 목회자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 함께함의 사역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더욱 커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역할은 단순히 추상적인 난제나 신학적인 게임이 아니다.

매일 매일 우리 교인들은 고통을 마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신학은 충분하지 않다.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깊은 비통에 빠진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어느 때든 누구에게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뿐 아니라, 특정한 진리를 말하기에 적절한 때를 찾기 위한 목회적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실제적인 고통, 곧 가설적 문제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영혼을 빚기 위해 창조의 일부로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기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종말론이 가미되었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필수 요인으로 어린아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하나님은 악의 주체이며 도덕적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관여하지만 창조 세계에 완전히 묶이지 않으신다.

실제로 기독교는 세상 "속에" 계신 하나님이나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대신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은 "무고하다"라기보다는 "비극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런 용어의 전환은 아이의 죽음이 인간의 삶의 실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이런 비극이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무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 조건은 인간으로서의 상태에 내재된 모든 위험과 가능성을 동반한다.

아이는 고난을 당했고 아이를 사랑하던 사람들 역시 고통을 당했지만, 이것은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욥기는 선하신 하나님과 무고한 고통이 어떻게 공존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책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도록 그림을 조작한 다음, 이런 세상을 인자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리의 도덕적 질서의 투영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자 하는 편만한 종교적 충동에 대해 저항한다.

여기서 해결이 요구되는 문제는 왜 욥이 고통 당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도대체 어떤 하나님과 창조가 도덕적으로 비합리적인 이런 경험의 들쑥날쑥함을 허용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핵심은 욥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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