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철학사 - 철학은 슬픔 속에서 생명을 가진다
유대칠 지음 / 이상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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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노동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 유대칠은 가진 자의 '홀로 있음'이 아닌 민중과 '더불어 있음'의 철학을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인 이 책은 '대한민국 철학'의 근본적인 조건과 그 정신, 한국철학에 영향을 준 중국과 일본의 정황, 한국철학의 역사와 그러한 한국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다룬다.


저자가 강조하는 철학의 핵심은 민중으로부터의 철학이다. 즉 한국철학은 고난 가운데 삶을 살아갔던 한국 민중이 중심 되는 철학이다. 또한 그 철학은 각 개개인이 흩어져있는 존재가 아닌 더불어 함께 있는, 하나 되어 있는 철학이다. 곧 "더불어 있음의 철학(43)"이다. 그는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한국의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철학과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들, 제도 속에 있으면서 주목받았던 인물들이 아니다. 민중 스스로 '나'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도록 철학을 한 분들. 그들의 철학이 대한민국 철학이며, 그 철학의 역사가 대한민국철학사임을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한국철학의 주요한 기초가 3·1 혁명과 한글의 창제, 서당이라는 공간이라고 한다. 3·1 혁명으로 인해 민중들은 스스로 통치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는 혁명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의 헌법에 녹아져 있다. 한글은 위계의 조선을 다지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의도치 않게 한글은 서당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민중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 곧 나의 생각을 나의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철학의 언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철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계기를 저자는 양명학과 서학, 동학의 출현과 보급으로 본다. 먼저 저자는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철학은 '통치자의 철학'이며 이는 '위계의 존재론'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통제를 위한 철학이며, 민중의 철학이 아니다.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양반의 기득권에 대항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철학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철학은 눈물의 철학이며, 고난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철학이다. 이러한 양명학의 정신은 신흥 무관학교와 대종교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평등사상, 민족과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었다. 


서학은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이었으므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다. 우리말로 쓰인 정약종의《주교 요지》를 통해 민중들은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직접 대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서학을 통해 그들은 복음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서학은 유럽의 철학이며, 우리 철학은 아니었다. 


결국 한국철학의 출산은 최제우의 《용담유사》로 시작되었다. 동학의 신은 서학의 신과는 달랐다.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신이나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완전자의 모습이 아니라, 동학의 신은 함께 이루어져 가고 변화한다. 동학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 철학을 가능하게 했다. 고난과 마주하며 스스로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겠지만, 그 정신은 한국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저자는 3장에서 한국철학의 주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사정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홀로 있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영향과 관계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럽의 장점을 빨리 깨우치고, 유럽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내면화시켰다. 그리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민중이 없다. 일본의 철학은 국가에 대한 '충'의 철학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철학이다. 따라서 참된 철학이라 할 수 없다.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은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들이 중심이라는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른 시기에 유럽으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유럽의 사상과 번역하여 소개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러한 사상들을 스스로 내면화하지 못했다. 그들의 철학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 더 가치 있다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뒤늦게야 자신들의 선택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일본을 통하여 서구의 사상을 배우기에 이른다. 한국도 철학의 변두리에 있었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의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해야 한다.


4장에서는 한국철학의 민낯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이 가능했지만, 제도 속의 한국철학은 민중이 빠진 철학이었다. 그들의 철학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당대에 흔치 않은 유학파로 국내에 돌아와서 정계와 교육계에 몸담았다. 그들의 철학은 이 땅의 민중에 대한 고민 없이 등장했으며, 민중의 고난이나 주체성은 그들 철학의 대상이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철학을 발전시켰다.    


5장은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윤동주와 함석헌, 류영모, 문익환, 장일순의 철학을 톺아본다. 특히 많은 분량을 함석헌의 철학에 할애한다. 이들의 철학은 모두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고난에 마주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민중의 아픔에 함께 한다. 현재 아파하고 있는 민중의 외침에 반응하는 철학이다. 우리 밖의 것을 동경하며 그리워하지 않는다. 철저히 우리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싸운다. 이들 철학의 중심은 바로 민중이었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이 땅 민중이다. 이 땅의 부조리를 가장 잘 알고, 그 가운데 가장 아파하고 가장 신성하게 그 부조리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은 바로 민중이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고, 대상은 그 민중의 존재론적 본질, 바로 신성함이다(458).


6장에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주장한다. 그는 유럽과 지중해의 오랜 철학 가운데 '나'는 홀로 있는 존재였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철학은 '너'와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는 '나'로서의 '더불어 있음'의 '서로주체성'임을 역설한다. 오랜 시간 민중의 외침은 우리의 눈에 실패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역사는 실패가 아니다. 민중이 중심 되어 외친 철학적 선언은 우리의 정신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이 땅에 부조리와 비극이 계속된다. 우리는 고난 앞에 외로이 있지 않고 더불어 함께 있다. 끈질기게 우리를 옭아매는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보자. 결코 홀로가 아님을. 더불어 함께임을 기억하자. 거기로부터 우리의 철학, 우리의 사상, 우리네 삶이 시작된다.

"‘남‘의 변두리에서 ‘남‘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의 허락을 구하는 이에게 철학은 없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더 이상 그렇게 있지 않겠다는 민중의 분노다! 더는 변두리에서 허락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있음을 긍정한 분노 가득한 철학의 외침이다. 1919년 3·1혁명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스로 있겠다는 자기 긍정의 분노 가득한 철학적 외침 말이다."
- P16

"중국의 허락도 없이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은 몰래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세웠다. 허락받지 않은 정당성 없는 국가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정당성의 기준은 중국이다. 그러니 중국의 허락을 받은 중국 사람 기자(箕子)의 ‘조선‘만이 정당성을 가진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조선은 바로 그 기자의 ‘조선‘에서 나왔다. 단군의 ‘조선‘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조선의 고향은 기자의 조선이다. 이렇게 조선은 중국의 변두리로 시작되었다." - P16

"조선의 철학과 한국의 철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철학은 양반의 철학이지만, 한국의 철학은 이 땅 민중의 철학이다. 이 땅 역사를 가득 채우는 눈물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고난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 P17

"슬픔을 모르는 철학은 철학다워지기 힘들다. "사람이 철학적이 되는 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고난과 슬픔 속에서 ‘나‘는 참된 ‘나‘를 돌아본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다. 나의 말과 글로 아파하는 나를 돌아본다. 이렇게 고난과 슬픔은 ‘나‘를 중심에 두고 철학하게 한다. 철학의 고향은 고난과 슬픔이다. 한국철학은 민중의 고난과 슬픔에서 시작한다." - P18

"한국철학의 주체성은 ‘서로주체성‘이며 ‘더불어 있음‘의 주체성이다. 동학에서의 주체성도 그러했고, 3·1혁명의 주체성도 그러했으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성과 세월호의 비극 앞에 선 우리의 주체성도 그러했다." - P22

"한국철학의 주체는 고난의 주체인 민중이다. 한국의 민중이란 이름의 ‘우리‘다. 반성 속 나와 더불어 있던 수많은 ‘너‘들과 우리를 이룬 가운데 있는 나. 그런 ‘나‘들의 ‘우리‘가 한국철학의 주체다. 명제 속 주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고, 그 주어에 대한 술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며, 바로 이 현실 속에 더불어 있는 주체가 우리다. 그 ‘우리‘가 한국철학의 진정한 주체다." - P27

"3·1혁명은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다. 민중의 외침이었다. 기꺼이 강요된 숙명과 다투겠다는 외침이었으며, 스스로 있겠다는 존재론적 외침이었다. 순교란 부활의 조건이다. 그 순교의 피로 대한민국이 가능했고, 그 순교의 뜻이 피어나는 과정이 뜻의 철학이 피어나는 과정이었다." - P35

"‘나‘는 우리 속에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흩어진 더미‘를 말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있다‘고 해도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순 없다. 즉 ‘우리‘로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 되어 있음‘이다." - P40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아직 있지 않은 나라의 정부다. 그들이 생각한 철학이 반영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국가를 위한 정부다. 아직 온전히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 속 국가에 대한 정부다. 그러나 그저 가능성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을 통해 표출된 독립에 대한 민중의 요구로 일어난 정부다. 민중이 불러 세운 정부다. 지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이란 국가가 임시정부에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적이다." - P46

"한글은 소리 문자이기에 한글이 철학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말은 민중의 언어 자체가 철학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서서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면서 ‘나‘의 생각을 담은 ‘나‘의 말을 ‘나‘의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글로 송사(訟事)를 하게 되고, 문학 활동도 이루어졌다. 당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글이 민중 사이에 녹아들어가면서 서서히 민중의 생각이 민중의 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글‘이 없는 민중은 ‘말‘이 없는 민중과 같다.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조선 전체를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글‘은 달랐다. ‘생각‘을 담은 ‘말‘을 기록한 ‘글‘은 조선 전체에 퍼져갔다. 이런 가운데 민중은 일종의 언어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하나 됨‘과 그 ‘하나 됨‘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자각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 긍정으로 이어졌고, 존재를 긍정하게 된 민중은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 P68

"근본적으로 한국철학의 공간은 ‘민중‘이다. ‘민중의 고난‘은 한국철학을 가장 철학다워지게 만든다.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에서 철학은 ‘뜻‘있는 철학이 된다. 대학이 아니라, 바로 민중이다." - P79

"‘한국철학의 회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교요지》와 같은 서학서로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임‘은 ‘평등의 희망을 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국철학의 회임‘은 ‘한국철학의 출산‘으로 이어졌다. ‘품은 희망‘이 현실의 절망 가운데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 P115

"고난의 주체가 스스로 고난의 짐을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철학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순간, 부조리한 권력자의 지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 P122

"비록 동학혁명군의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지만, 동학은 실패하지 않았다. 죽은 듯 죽지 않은 것, 죽어 보이지만 죽지 않은 것, 아니 있음으로 보이지만 있음으로 있는 것이 부활이다. 동학의 철학은 부활의 힘이었다. 동학의 철학은 자기 내어줌을 통해 3·1혁명의 이념이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이 되고, 이후 한국 현대사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일어난 수많은 순간의 기본 혈맥의 시작이 되었다. 희망을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서 구한 동학의 철학은 이와 같이 제대로 한국철학의 출발점이며, ‘한국철학의 출산‘이라 할 수 있다."
- P123

"한국철학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고난 가운데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궁리로 이루어져가는 지혜의 사랑이다." - P130

"나는 나의 과거를 나의 기억에 근거해 스스로 복원해야 한다. 스스로 회상해내야 한다. 이것이 나라는 주체성의 초석이다. 무엇보다 나와 우리의 눈물이 시작이 되는 곳에서 나의 기억으로 스스로 돌아보는 주체성을 가진 철학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슬픈 첫사랑이라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그때 나와 나의 그 연인은 죽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란 존재의 조각이 된다. 힘들어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란 주체성의 정당한 짐이다."
- P195

"참된 주체성은 자기반성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반성과 돌아봄, 바로 그 회상은 나와 더불어 있는 ‘너‘없이는 불가능하다. 너를 만난 ‘나‘가 진짜 나이며, 너와의 시간과 공간이 비록 지난 일이라도 지난 일이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나‘이다." - P203

"우리 가운데 ‘나‘는 ‘너‘와 더불어 존재하며, 너의 고난을 ‘남‘의 고난으로 두지 않고 ‘우리‘의 고난으로 두며, 고난 앞에서 더 깊게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우리가 한낱 ‘사유의 존재‘(ens rationis)가 아닌 ‘현실의 존재‘(ens reale)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때 고난 앞에서 우리는 더욱더 단단해진다." - P203

"고난의 역사는 이어진다.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은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아픔의 순간이고 슬픔의 순간이지만 절망의 순간이 아니다. 고난은 희망의 시작이다. 희망은 ‘나‘의 앞에 누군가를 ‘우리‘ 가운데 ‘너‘로 부르며 시작한다. 손잡고 나갈 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는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가 되면서 시작한다. 역사 속 ‘나‘는 오직 홀로 있지 않다." - P206

"더욱 깊어지는 철학이란 그 슬픔 가운데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 기억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슬픔. 그 슬픔을 남의 슬픔으로 돌리지 않는 철학을 말한다. ‘남’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안에 ‘너’의 슬픔으로 안아주는 철학이어야 한다. 이들을 안아주지 않는 철학 앞에서 민중은 ‘철학의 부재’ ‘생각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 - P215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만들어낸 것이 이 땅의 민중이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나‘라는 인간의 주체성을 만든 것이 나란 존재다. 고난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철학은 이 땅 민중과 나에 대한 어떤 철학적 행위도 온전히 할 수 없다. 한다 해도 그것은 가짜 철학일 뿐이다. 진짜 철학은 이 땅 가득한 고난, 그 고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자해(自害)한 역사가 아니다. 수난의 역사, 당함의 역사, 억울함의 역사를 살았다. 정말 이 땅에서 이 땅 민중을 위한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그 고난의 주체성 앞에 마주 서야 한다." - P219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가능했다. 낡은 시대의 고난 속에서 가능했다. 그 고난은 죽으라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 스스로 출산해내는 과정이다. 고난은 새로운 희망을 품은 공간이며,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 품은 공간에서 새로운 질서와 정신을 출산해냄으로 가능하다. 이 땅 민중의 ‘고난의 언어‘로 민중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함으로 스스로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의 명령에 반응하는 진짜 한국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 P226

"함석헌은 역사의 중심에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민중의 아픔, 민중의 고난이 없는 자긍심의 역사는 거짓이다. 그런 자긍심의 철학 역시 위선의 철학이며, 거짓의 철학이다. 민중을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두고 민족지상주의니 국가지상주의이니 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한국철학이 될 수 없다. 진정한 한국철학에서 민중은 통치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있어야 한다." - P242

"철학은 주체성 속에서 가능하다. 그 주체성은 지금 나의 반성적 자각을 무시하고 얻어질 수 없다. 나의 반성적 자각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반성적 자각도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본질이 외부에서 강제되고 그 강제된 본질 속에서 구금된다면, 과연 그런 철헉아 ‘나‘의 철학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 속에는 나의 개체성에 대한 긍정이 있다." - P260

"자기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다. 민중 역시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구경꾼도 아니고 발전하는 역사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도 아니다. 권력자와 경제인이 역사의 중심인 곳에서 민중은 언제나 변두리다. 언제나 제삼자다. 그저 권력자와 경제인의 말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과연 이것이 바른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중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천명이라며 순종하는 민중이 아니라 생각하는 민중으로,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나!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 P306

"내적 초월의 형이상학에서도 한국은 결핍의 공간이며, 결핍의 공간이어야 한다. 답이 ‘남‘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결핍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답으로 채워진 강요된 공간이 아닌 빛이 빛으로 뜻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빛이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우리다운 우리는 우리의 ‘밖‘ 본질에 답이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마주한 우리 자신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지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는 나의 ‘안‘에 충실하면 된다." - P362

"인간은 철학을 통해 제대로 싸우는 존재가 된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안에 품은 희망을 관념의 조각이 아닌 현실이 되게 하려 한다. 살을 찢고 현실이 되게 노력한다. 그 고난이 싫어 도망가는 존재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란 ‘나‘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며, 그 저항으로 인간은 온전한 주체가 된다." - P368

"나는 우리 가운데 너와 더불어 있는 존재"라고 말할 때, 나는 우리 가운데 수많은 너의 고난을 남으로 두지 않고 함께 울고 분노하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나는 나이면서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며, 이 역사의 수많은 아픔에 울고 부조리와 부당함에 분노하는 그런 나다. 역사를 남으로 두지 않고, 민중을 남으로 두지 않고, 전체 속에서 나로 존재하는 그런 나다." - P397

"‘나‘의 자리에서 ‘나‘의 언어로 ‘남‘의 철학마저 ‘나‘의 자리에서 수용하고 고민하면서, 그렇게 ‘남‘의 철학에 대한 번역이 아닌 ‘나‘의 현실, ‘나‘의 고난, ‘나‘의 존재가 ‘나‘의 철학의 본바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남을 배척하지도 않지만 나를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가듯이 우리의 철학도 그래야 한다." - P411

"철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 철학의 공간과 시간을 채우는 아픔과 슬픔을 알아야 한다. 그 아픔과 슬픔을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아픔과 슬픔이 녹아든 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 발바닥 철학은 민중을 철학의 대상으로 여기자는 것이 아니다. 민중을 철학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다. 민중이 철학의 주체가 되기 위해 그 민중의 언어를 포기해선 안 된다. 문익환의 철학은 민중의 언어로 씌어 있다. 민중의 언어로 이루어진 철학과 신학은 결국 몸으로 살아감을 통해 완성된다. 지식으로 끝나는 철학과 신학이 아닌 몸으로 사는 철학이고 신학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 P491

"뜻은 ‘나‘와 ‘너‘가 우리가 되어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삶의 주체가 되고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여기 바로 우리의 자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자리, 나의 아픔이 너의 아픔이 되는 자리, 바로 우리의 자리가 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철학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 P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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