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의심하던 이성은 이제 타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자아의 이성은 유럽이 아닌 자아의 이성, 즉 타자의 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럽이 아닌 것은 곧 이성적이지 않음으로 해석되었다.

또 이성적이지 않음은 이성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타자의 식민지화는 이런 논리 속에서 선행이 된다.

이븐 시나의 사고 실험 속 홀로 존재하는 나, 데카르트와 크래토른의 의심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나, 그리고 오캄의 유명론 속에서 너도 우리도 아닌 신을 마주하는 홀로 존재하는 나. 이러한 ‘나‘는 이제 소유로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홀로 더 많이 소유할수록 홀로 더 강하게 존재하게 된다.

하늘은 나의 밖에서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만나 너와 더불어 ‘우리‘를 이룰 때, 우리라는 더불어 있음 속에서 나와 너는 서로가 서로의 희망임을 보게 된다.

희망이 하늘에서 혹은 우리의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우러러나옴을 보게 된다.

나의 ‘자기 내어줌‘으로 나는 너에게 다가가 더불어 있고, 그 더불어 있음으로 ‘나‘는 ‘너‘와 ‘우리‘가 된다.

그 ‘우리‘ 가운데 ‘나‘의 고통은 외롭지 않고 ‘나‘의 웃음도 작지 않게 된다. 바로 ‘너‘의 자기 내어줌으로 말이다.

‘너‘의 존재 없이 지금의 ‘나‘는 없다. 지금의 ‘나‘란 ‘너‘와 더불어 있음으로 시작된 그 무엇이다.

우리 속에서 나는 온전한 나가 되고, 그 나의 시작은 바로 너와의 만남이다.

뜻은 ‘나‘와 ‘너‘가 우리가 되어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삶의 주체가 되고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여기 바로 우리의 자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자리, 나의 아픔이 너의 아픔이 되는 자리, 바로 우리의 자리가 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철학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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