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역사의 중심에 민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민중의 아픔, 민중의 고난이 없는 자긍심의 역사는 거짓이다.

그런 자긍심의 철학 역시 위선의 철학이며, 거짓의 철학이다.

민중을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두고 민족지상주의니 국가지상주의이니 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한국철학이 될 수 없다.

진정한 한국철학에서 민중은 통치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있어야 한다.

역사의 혁명은 스스로 생각하는 민중에게 있지 말 잘 듣는 민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주체성 속에서 가능하다. 그 주체성은 지금 나의 반성적 자각을 무시하고 얻어질 수 없다.

나의 반성적 자각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의 반성적 자각도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 ‘나‘의 본질이 외부에서 강제되고 그 강제된 본질 속에서 구금된다면, 과연 그런 철헉아 ‘나‘의 철학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나다‘라는 기본적인 명제 속에는 나의 개체성에 대한 긍정이 있다.

한 사람으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역사를 만든다. 민중 말이다.

그 민중에 대한 철학적 고민 없이 그 민중을 철학의 주체로 삼지 않으면서 단군 기원만을 찾아서는 진정 참된 한국철학을 할 수 없다.

자기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다.

민중 역시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구경꾼도 아니고 발전하는 역사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도 아니다.

권력자와 경제인이 역사의 중심인 곳에서 민중은 언제나 변두리다. 언제나 제삼자다.

그저 권력자와 경제인의 말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과연 이것이 바른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중이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천명이라며 순종하는 민중이 아니라 생각하는 민중으로,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기 인생의 구경꾼이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나!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한국철학은 한국을 구성하는 일부 계층만의 자기인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민중 전체의 자기 돌아봄의 행위여야 한다.

이 땅 민중의 언어로 이 땅 민중의 고난 가운데 깊어지는 그런 이 땅 민중의 반성적 사유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모두 한국의 밖, 동굴의 밖을 보았다. 한국학이라고 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유럽적인 것을 품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결국 진리의 기준은 ‘밖‘이고, ‘우리‘라는 이름의 ‘안‘은 변두리에서 ‘밖‘을 그리워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함석헌 철학의 시작은 ‘지금 여기의 긍정‘이다. 삶의 긍정이고 역사의 긍정이다. 바로 여기 무엇인가 끝없이 부족한 결핍의 공간에 대한 긍정이다.

함석헌은 외적 초월이 결국은 민중을 무시하는 데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다.

내적 초월의 형이상학에서도 한국은 결핍의 공간이며, 결핍의 공간이어야 한다.

답이 ‘남‘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결핍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답으로 채워진 강요된 공간이 아닌 빛이 빛으로 뜻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빛이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비워진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가장 우리다운 우리는 우리의 ‘밖‘ 본질에 답이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마주한 우리 자신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지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는 나의 ‘안‘에 충실하면 된다.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를 더욱 긍정하며 나의 살을 찢고 싹을 내야 한다.

고난을 이기고 희망을 ‘나‘의 안에서 내야 한다.

내적 초월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외부에서 나를 억누르는 그 억압의 존재론적 속박을 이기고 ‘나‘의 안에서 ‘나‘의 살을 찢고 안으로부터 희망의 싹을 내는 그 초월, 더욱 나다운 ‘나‘가 되기 위해 ‘나‘의 안에 더욱 충실한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초월이 내적 초월이다.

고난의 주체는 ‘우리‘이고 ‘나‘다. 그러면 그 고난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와 ‘나의 삶‘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고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남의 답으로 지금 여기 ‘나‘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고난의 주체인 ‘우리‘와 ‘나‘가 온전히 ‘우리‘와 ‘나‘의 철학에서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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