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아직 있지 않은 나라의 정부다.
그들이 생각한 철학이 반영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국가를 위한 정부다.
아직 온전히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 속 국가에 대한 정부다.
그러나 그저 가능성으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을 통해 표출된 독립에 대한 민중의 요구로 일어난 정부다.
민중이 불러 세운 정부다. 지금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이란 국가가 임시정부에서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철학적이다.
한글은 소리 문자이기에 한글이 철학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말은 민중의 언어 자체가 철학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서서히 한글 사용이 확대되면서 ‘나‘의 생각을 담은 ‘나‘의 말을 ‘나‘의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글로 송사(訟事)를 하게 되고, 문학 활동도 이루어졌다. 당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글이 민중 사이에 녹아들어가면서 서서히 민중의 생각이 민중의 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글‘이 없는 민중은 ‘말‘이 없는 민중과 같다.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조선 전체를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글‘은 달랐다. ‘생각‘을 담은 ‘말‘을 기록한 ‘글‘은 조선 전체에 퍼져갔다.
이런 가운데 민중은 일종의 언어 공동체로서 자신들의 ‘하나 됨‘과 그 ‘하나 됨‘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자각은 스스로에 대한 존재 긍정으로 이어졌고, 존재를 긍정하게 된 민중은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한국철학의 공간은 ‘민중‘이다. ‘민중의 고난‘은 한국철학을 가장 철학다워지게 만든다.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에서 철학은 ‘뜻‘있는 철학이 된다. 대학이 아니라, 바로 민중이다.
‘한국철학의 회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교요지》와 같은 서학서로 본격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임‘은 ‘평등의 희망을 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국철학의 회임‘은 ‘한국철학의 출산‘으로 이어졌다.
‘품은 희망‘이 현실의 절망 가운데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난의 주체가 스스로 고난의 짐을 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철학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순간, 부조리한 권력자의 지배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동학혁명군의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지만, 동학은 실패하지 않았다.
죽은 듯 죽지 않은 것, 죽어 보이지만 죽지 않은 것, 아니 있음으로 보이지만 있음으로 있는 것이 부활이다.
동학의 철학은 부활의 힘이었다. 동학의 철학은 자기 내어줌을 통해 3·1혁명의 이념이 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동이 되고, 이후 한국 현대사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일어난 수많은 순간의 기본 혈맥의 시작이 되었다.
희망을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서 구한 동학의 철학은 이와 같이 제대로 한국철학의 출발점이며, ‘한국철학의 출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철학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민중의 고난 가운데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궁리로 이루어져가는 지혜의 사랑이다.
나는 나의 과거를 나의 기억에 근거해 스스로 복원해야 한다.
스스로 회상해내야 한다. 이것이 나라는 주체성의 초석이다.
무엇보다 나와 우리의 눈물이 시작이 되는 곳에서 나의 기억으로 스스로 돌아보는 주체성을 가진 철학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슬픈 첫사랑이라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그때 나와 나의 그 연인은 죽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란 존재의 조각이 된다.
힘들어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나란 주체성의 정당한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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