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허락도 없이 신라, 백제, 고구려 등은 몰래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세웠다.
허락받지 않은 정당성 없는 국가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정당성의 기준은 중국이다.
그러니 중국의 허락을 받은 중국 사람 기자(箕子)의 ‘조선‘만이 정당성을 가진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조선은 바로 그 기자의 ‘조선‘에서 나왔다. 단군의 ‘조선‘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조선의 고향은 기자의 조선이다. 이렇게 조선은 중국의 변두리로 시작되었다.
‘남‘의 변두리에서 ‘남‘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의 허락을 구하는 이에게 철학은 없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더 이상 그렇게 있지 않겠다는 민중의 분노다!
더는 변두리에서 허락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있음을 긍정한 분노 가득한 철학의 외침이다.
1919년 3·1혁명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스로 있겠다는 자기 긍정의 분노 가득한 철학적 외침 말이다.
조선의 철학과 한국의 철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철학은 양반의 철학이지만, 한국의 철학은 이 땅 민중의 철학이다.
이 땅 역사를 가득 채우는 눈물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고난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그런 철학이다
슬픔을 모르는 철학은 철학다워지기 힘들다. "사람이 철학적이 되는 것은 그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고난과 슬픔 속에서 ‘나‘는 참된 ‘나‘를 돌아본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다.
나의 말과 글로 아파하는 나를 돌아본다. 이렇게 고난과 슬픔은 ‘나‘를 중심에 두고 철학하게 한다.
철학의 고향은 고난과 슬픔이다. 한국철학은 민중의 고난과 슬픔에서 시작한다.
한국철학의 주체성은 ‘서로주체성‘이며 ‘더불어 있음‘의 주체성이다.
동학에서의 주체성도 그러했고, 3·1혁명의 주체성도 그러했으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성과 세월호의 비극 앞에 선 우리의 주체성도 그러했다.
한국철학의 주체는 고난의 주체인 민중이다. 한국의 민중이란 이름의 ‘우리‘다.
반성 속 나와 더불어 있던 수많은 ‘너‘들과 우리를 이룬 가운데 있는 나. 그런 ‘나‘들의 ‘우리‘가 한국철학의 주체다.
명제 속 주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고, 그 주어에 대한 술어로의 민중도 우리가 아니며, 바로 이 현실 속에 더불어 있는 주체가 우리다. 그 ‘우리‘가 한국철학의 진정한 주체다.
3·1혁명은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다. 민중의 외침이었다.
기꺼이 강요된 숙명과 다투겠다는 외침이었으며, 스스로 있겠다는 존재론적 외침이었다.
순교란 부활의 조건이다. 그 순교의 피로 대한민국이 가능했고, 그 순교의 뜻이 피어나는 과정이 뜻의 철학이 피어나는 과정이었다.
‘나‘는 우리 속에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다. ‘우리‘는 ‘흩어진 더미‘를 말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있다‘고 해도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순 없다. 즉 ‘우리‘로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 되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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