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에 있는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
이 대항 텍스트는 제국이 장악한 주류 텍스트를 전복subversion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말해 ‘하위 해석판‘sub-version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본문이 나타난 순간이나 당대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정치와 경제는 항상 동일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와 관련된 본문의 거시 상황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출애굽 내러티브, 신명기 언약 전승, 예언자들의 문서를 통해 입증되신 그분이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맞서고 계신 것이다.
출애굽의 해방 내러티브, 광야에서 증명된 풍요, 시내산 언약은 야웨의 단호하신 행동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일화를 보라. 그분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요, 제국의 우상들이 판이하게 다른 야웨이시다. 그런 분이 착취에 관심을 두실리 만무하다.
야웨께서는 제국의 우상들과 다르시다. 야웨께서는 신실하시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에 찬양과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 및 모든 창조물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신다..
야웨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텍스트에 담긴 복음을 밝히 드러내고 착취와 상품화 이데올로기를 갈파한다
야웨께서 약속하신 새 일은 이제 ‘이적/경이‘mavels, wonders와 관계된다.
이 약속은 갱신된 언약에 발맞추어 도래할 결과가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며, 이는 참으로 웅장하고 독창적일 것이다.
인자, 긍휼, 성실. 우리가 호세아서에서 만난 이 세 가지 용어는 사실 출애굽기 금송아지 사건 직후에도 나온 표현이었다(출 34:6).
예레미야애가에서 이스라엘은 평강이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사라진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절망에 굴하는 대신, 옛일을 기억하고 낭송하고 마음에 새기며 모진 삶을 버텨 낸다.
기억하고 낭송하고 마음에 새기는 태도는, 언약을 성실히 수행하고 긍휼을 베풀고 신뢰를 쌓는 행실로 이어진다.
결국 그러한 기억함은 ‘그러므로‘를 낳고, "나는 소망한다!"라는 외침으로까지 이어진다(애 3:21).
신실에 대한 가르침은 타자를 신실의 궤도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타자를 거부하는 입장은 성경에 안온하게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하나님, 이스라엘, 교회가 공히 드러내듯이 궁극적인 신실함이란 타자를 품고자 가까이 ‘나아감‘reach을 말한다.
이 나아감이 ‘나아갈 자‘reacher를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뛰어 넘어 창조 세계로 오시고,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나아가셔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선민이 된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려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그분의 통치는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요, 이스라엘과 만민을 신명나게 하며 바다와 들과 나무를 춤추고 노래하고 포효하게 하는 통치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 하나님은 ‘먼 곳으로부터‘와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불가사의하게 등장하신 까닭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변함없는 충실함hesed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분은 예사로운 하나님이 아니다. 거룩한 분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분은 천상이나 성전처럼 먼 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룩한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깨진 관계를 바라보시고 친히 돌보시며 능히 한계 너머로 나아가실 수 있다. 그분이 광야로 진입하신다.
새로운 통치의 으뜸은 정의(‘미슈파트‘)지만, 이제 정의는 다함없는 은혜 가운데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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