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는 서사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서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한 서사는 갑자기 중단당해 찢겨 나갈 때가 있다. 또 서사는 때로 그 자체가 파탄을 내고, 다른 서사와 갈등하며 모순을 일으킨다.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서사가 중단되어 찢겨 나가 모순을 일으킬 때, 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이쪽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에는 없는 어딘가를 꿈꾸며 창이나 문을 열고 나간다.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돌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여행 도중에는, 더 이상 나아가면 두 번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이 있다. 그런 경험이 때로 찾아온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우리 다수자들은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방벽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벽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벽에 의해 비호를 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 가정이나 동료로부터 찢겨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국가와 떼어 내어 생각하는 일이 허용된다.
다양한 ‘특권‘에 의해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활에도 개인적인 고민이나 고통은 한없이 존재하지만, 다수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로서 그것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벽에 의해 보호받으며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우리의 마음은 벽 바깥의 타자에 대한 까닭 없는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은 지극히 쉽사리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한다.
우리는 먼 사람에게 냉혹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약하다.
우리는 각자 단편적이고 불충분한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자나 사회에 대해 개입한다. 그것이 가닿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는 채, 끝도 없이 병에 담긴 언어를 바다로 흘려 보낸다.
우리는 각자 단편적이고 불충분한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자나 사회에 대해 개입한다. 그것이 가닿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는 채, 끝도 없이 병에 담긴 언어를 바다로 흘려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