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왠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지요.

슬픔 따윈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 세련된 인간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에 저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슬픔은 숨겨야 할 금기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라 믿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절제하는 것과 슬픔 자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저기서 힐링 열풍이 거센 요즘, 이 요란한 힐링 열풍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스며 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요?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닐까요? 아픈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한 조바심,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믿는 조급증, 아픔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전에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퇴치하려는 성급한 통제의 욕망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통증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분명 우리에게 어떤 절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통증의 메시지를 우선 가만히 들어 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위기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명징하게 깨닫습니다. 어떤 영광도 인기도 명예도 재산도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큼 소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바꾸기 어려운 외부의 상황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의 실천을 모색하는 것.

이렇듯 나로부터 시작되는 자발적 윤리가 구원의 희망이 됩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신경 쓰느라 진정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을 등한시하는 문화는 결코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지요.

때로는 슬픔 속으로 온몸을 던져 슬픔과 사투를 벌여 마침내 슬픔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정의는 어느 날 갑자기 이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와의 끊임없는 결투를 통해서만 정의로움의 감각은 단단히 담금질 됩니다.

정의감은 정의와는 다릅니다. 정의감이 있어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불의에 타협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지요.

정의감을 간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때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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