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노력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도 자기 자신과의 결정적 만남을 가능한 한 피하려 들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의 영혼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큰 신발을 처음 신는 것보다는 작아도 발에 익숙한 신발을 계속 신고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우리는 운명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세상을 반드시 잠정적인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상을 잘못 읽고, 세상을 지나치게 개인화하고,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고백을 극화하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창조물이야. 선택들도 모두 내가 한 것야.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예상치 않은 결과들도 모두 나의 선택의 산물이야." 겸손한 마음에서 이런 식으로 인정하는 바로 거기서 마침내 지혜가 시작된다.

의식적인 삶에 작용하는 이 두 개의 힘의 장(場)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에서 자아는 안락과 안전, 만족을 추구하는 한편, 영혼은 의미와 노력과 성숙을 요구한다.

이 두 목소리의 주장이 가끔 우리를 찢어놓는다. 일상의 자아의식은 이런 양극성에 몹시 괴로워한다.

또 다시 여기서 어떤 역설이 나온다. 우리의 고통 속에, 우리의 증후 속에 영혼이 요구하는 노력의 의미를 말해주는 심오한 열쇠들이 들어 있는데도, 그 치료의 길은 걱정 많은 자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보다 더 큰 뭔가에 문을 열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영혼들만이 치료를 추구할 수 있다. 반면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일수록 탓을 돌릴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슬픔에 잠겨 반응성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조차도 거기엔 언제나 어떤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상실한 그 타자에게 과잉 투자를 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 대상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외부로 쏟은 에너지가 우리에게도 돌아올 때, 그것을 다시 간직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그것을 영혼이 바라는 성장을 도모하는 쪽으로 다시 투자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관계가 깨어지고 자시만 덩그러니 남게 될 때, 우리는 그 상실을 슬퍼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의 유지에 필요한 인격적 측면을 갖추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책임이다.

슬픔을 느끼는 동안에도, 반응성 우울증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슬픔을 직시하고, 또 거기서 비롯된 개인적 임무에 대해 책임을 지는 데는 심리적으로 상당한 정직성이 요구된다.

간혹 이 우울증은 우리를 완전히 접수해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뻗어 눕게 된다. 우울증이라는 샘에는 반드시 바닥이 있기 마련인데, 이 샘의 바닥엔 어떤 명확한 임무와 소환장이 놓여 있다. 그 임무란 영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소환장은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대답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영혼이 항상 원하고 있는 것을, 즉 보다 큰 인생 여행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패한 모든 투사는 특정 양의 에너지이고, 성장이나 치유를 도울 하나의 의제이며, 또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의 삶에 패턴이 형성되는 것은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되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송이들이 거듭해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패턴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모든 관계는 투사로 시작한다. 매 순간은 완전히 새로운 순간이지만, 우리가 매순간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지 않고 기능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과거의 경험과 계획, 이해를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 반사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투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사람을 옛날의 렌즈를 통해 볼 때, 우리는 그 상황이나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 오염시키게 되고 따라서 그 상황이나 사람의 근본적인 실체를 과거의 마무리되지 않은 계획에 맞춰 왜곡시킬 위험을 안게 된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의 은밀한 목표는 타자와의 합일이며, 이때 당사자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결과는 의식의 망각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비와 접촉하기 위해 우리라는 존재가 가진 신비를 끌어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확장을 꾀할 수 있는 발달의 과정에 올라서게 된다.

가족은 깨어졌든 온전하든, 혹은 한곳에 모여 있든 멀리 흩어져 있든 언제가 그 이상이었으며 지금도 그 이상이다.

가족은 원형적인 힘의 장(場)이었고 또 그런 곳으로 남았으며, 우리 모두는 청년기 끝에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뒤까지 그 힘의 장에 끌린다.

감각의 문화는 오직 중독을 낳고 희망을 깨뜨릴 뿐이다. 근본주의가 경직성과 아주 큰 그림자만을 낳는 것과 똑같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영성을 직접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나 가족을 통해서 물려받는 영적 전통은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조건화된 반응을 통해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만이 성숙한 영성을 이루게 할뿐이다.

성숙한 영성은 좀처럼 우리에게 대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더 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인생 후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를 기만하고 더욱 작게 만드는, 가족이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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