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외견상 그런 고통을 초래한 사람[사회학자]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전가하는 것이죠.

사회학에서 우리는 언제나 화급한 현장에 서있고 우리가 다투는 문제는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죽은 것도 아니고, 땅속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르디외: 제 생각에 푸코와 제가 완전히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이른바 ‘총체적 지식인‘의 형상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 역할을 수행하는 위대한 지식인의 형상으로, 그 누구보다도 사르트르가 탁월하게 구현한 바 있습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예언자란 삶과 죽음 따위의 총체적 질문에 총체적으로 답하는 인간입니다.

사르트르가 구현한 철학자는 바로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 그러니깐 존재, 삶, 정치 등 온갖 문제에 포괄적으로 답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총체적 역할에 조금은 눌려 있었고 조금은 지치기도 했어요. 그런 탓에 우리 세대는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멀어진 것이죠. 그를 닮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사회과학은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일상의 사회세계에서 제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제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론계나 평론계, 또는 사이비 과학계에서 제기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과학의 임무입니다.

부르디외: 제 작업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과학 그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회학자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저는 남성/여성, 뜨거운/차가운, 건조한/습한, 높은/낮은, 지배계급/피지배계급 등으로 구성된 저만의 고유한 사고범주, 분류체계, 분류틀, 구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보편화하는 것이죠. 이는 어떤 경우에 시대 착오를 빚어내고, 다른 경우에는 자계급 중심주의를 가져옵니다. 각각의 경우에 문제는 자기 자신의 질문체계를 문제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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