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하나의 목록에만 집중한다. 고전을 혼자 공부하는 동안에는,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젊은 시절 탐닉했던 독서법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는 만년에, 광범위하고 인상적이지만 체계 없이 게걸스레 책들을 집어삼키는 독서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 같은" 정신만을 남겨 놓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정신적 삶에 관한 고차원적인 언어는 어떤 점에서, 자기 계발을 위한 실용적인 계획에 특권을 넘겨줘야 한다.

문법과 글쓰기, 논리와 분석, 추론에 정통하려면 이것들이 살아 나갈 여분의 정신적 공간을 깍아 내는 일을 해야 한다.

고전을 혼자 공부하는 것의 첫 번째 과제는 플라톤식 독서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를 활동이 아닌 사상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줄 20분의 자투리 시간을 찾아내는 일이다.

지식 추구는 다른 윤리를 지향한다. 본격적인 독자는 엄청난 정보량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다면적이고 손끝을 빠져나가는 생각 몇 가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지향하는 이상향이 다른 곳에 속도 윤리를 이식해서는 안 된다.

독서 일기를 쓸 때는 세 단계의 과정을 따라야 한다. 마음에 와 닿는 특정 어구와 문장, 문단들을 적는다. 그리고 독서를 마쳤을 때 다시 돌아가서 무엇을 얻었는지 간략하게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반발 지점과 질문, 생각을 적는다.

고전적인 혼자 공부하기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사실적인 정보를 머릿 속에 ‘쑤셔 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을 정신 구조 속에 섞어 넣고 구체화하기 바란다. 내적인 삶에 비추어 사실들의 의미를 성찰해 보자.

이해를 위한 첫 걸음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내용을 파악하는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방식은 자신의 말로 재서술해 보는 것이다. 내용에 정통하려면 요약해야 한다.

고전을 혼자 공부할 때에는, 사상을 이해하고 평가한 다음 반응을 보여야 한다. 각자의 독서 일기에 독서 내용을 요약하여 기록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생각들을 이해하는 도구가 바로 이것이다. 사실에 정통하는 것이 고전 교육의 첫 단계다.

자서전은 글쓴이에게 자신의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고, 과거 사건으로 돌아가 의미를 읽어 내고, 무의미했던 것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처음으로 역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단순히 묘사하기보다는 발전해 나가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시도 말이다.

생성이라는 단어는 진보,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가는 운동의 의미를 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들은 기독교도 역사가들이 정리한 선형적 시간의 토대를 철저히 파괴했다.

대신 그들은 벽을 조금 무너뜨리고 옛 주춧돌 위에 땜질하는 식으로 건물을 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덜 현실화된 시간에서 좀 더 완벽한 현실로 나아가는 선형적 진보라는 기독교적 시간 감각은, 생명이 원시 상태에서 진보된 상태로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는 후대 학자들의 제안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희곡을 읽는 이유는 스스로 연출가가 되어서 희곡을 마음속으로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역사처럼 과거의 한 면모를 연대순으로 기록할 수 있고, 소설 기능을 흉내 내서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자서전처럼 시는 시인 자신의 자아 형성 과정을 드러낼 수도 있으며, 희곡처럼 관객에게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데 참여하기를 요구하면서 화자들 사이를 오가며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는 역사나 자서전이나 소설이 아니다. 시는 운문으로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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