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마음의 안부를 물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상처에 취약한 마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높은 방어벽을 쌓느라 오히려 진정한 소통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마음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미래의 고통에 더욱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

자기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공포나 우울에 휘둘리지 않으며, 회복탄력성이 높아져 상처의 치유 속도가 높아진다.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타인의 애정 어린 조언조차 한사코 밀어내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기에 서툰 것이다.

자기와의 관계 맺기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에고와 눈에 보이지 않는 셀프와의 대화다.

상처를 입었을 때 이것이 에고의 차원인지 셀프의 차원인지 돌아보는 것이다.

에고의 차원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는 자존감에 살짝 상처가 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에고의 아픔은 부분적인 상처이며 치료 가능한 상처다. 하지만 셀프 차원의 상처라면 더 깊은 마음챙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에고에 상처를 입었는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셀프가 약하기 때문이고, 셀프에 상처를 입었는데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난 괜찮아!‘라고 주장하며 자신까지도 속인다면, 스스로의 상처에 둔감해짐으로써 자기공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한다는 것은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깊은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극복한다는 것이다.

내면아이는 빛과 그림자를 모두 품고 있다. 내면아이의 빛은 자기 안의 눈부신 재능과 잠재력, 무엇이든 다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풍요로운 감수성 같은 것들이다.

내면아이의 그림자는 차별이나 학대, 폭력과 따돌림 같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슬픔과 어둠의 보물창고다.

이 슬픔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나 자신의 일부다.

이 그림자의 존재가 우리를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측면임과 동시에 내면아이의 빛을 끌어내지 못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내면아이의 그림자는 빛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통과해야만 하는 마음의 장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아이를 위로할 수 있는 최고의 지지자는 바로 우리 자신의 성숙한 측면, 즉 성인자아다.

성인자아는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에 더 잘 귀 기울일 때, 마음의 온갖 천변만화한 움직임에 민감하게 주의를 집중할 때, 더욱 활성화된다.

빛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까지 함께 받아들일 때, 우리 안의 전체성은 눈을 뜨기 시작한다. 자기 안의 전체성을 통합해 더 나은 자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개성화다. 내면아이의 그림자도 빛만큼이나 소중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본래 불안하고, 현대사회의 노동환경 자체가 불안하다는 더 큰 틀의 진실을 성숙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랜서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조직생활을 피할 수는 있지만, 더 커다란 의미의 사회생활을 피할 수는 없다.

억압된 감정은 반드시 귀환한다. 다른 형태로, 다른 빛깔로, 더 커다란 아픔으로.

당신이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꿈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뒤늦은 감정의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당신이 새로운 삶의 찬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아름다운 내면의 신호탄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야망이나 적극성이 아니라, 완연한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몸짓이다.

마음속에 각인된 말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때로는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어 폐부를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안락의자처럼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공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업적이 아니며, 생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하는 무섭도록 정직한 과업임을.

내가 글쓰기 수업에서 가장 자주 주문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정직해지기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신경 쓰는 마음의 습관을 멈추고, 글을 쓰는 이 순간만은 세상에 종이와 펜, 그리고 나만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삶에는 사랑이라는 눈부신 오아시스가 있다. 그 사랑이라는 오아시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끝내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지옥이 된다. 그 어떤 고통이 우리의 생을 할퀼지라도, 고통은 언젠가 사라지고, 사랑은 끝내 살아남는다.

착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착해야만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병적인 것이다.

삶에 대한 되새김질의 몸짓이 부족할수록, 번아웃에 빠질 위험에 노출된다. 되새기는 것, 돌아보는 것, 헤아벼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속도전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챙김의 기술이다.

‘나라는 존재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필요 없는 존재다‘라는 좌절감에서 우울증이 시작될 수 있다.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 할 감정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내 삶을 내가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나를 둘러싼 세상을 내 힘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삶의 주권을 되찾는 적극성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첫 번째 우울증 치유제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콤플렉스 없는 자아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결핍과 매번 싸우는 험난한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아실현, 즉 가장 자기다운 자기가 되어가는 심리적 변신의 과정을 버티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가와이 하야오는 콤플렉스를 무조건 숨기고 억누르는 것보다는 무의식 깊이 잠재된 콤플렉스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의식과 무의식의 평등한 대결을 지향하는 것이 내적 성장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갖고 있다. 다만 그 힘과 지혜를 아직 다 꺼내어 쓰지 못했을 뿐이다.

때로는 자존심이라는 작은 신발을 신음으로써 콤플렉스와 마주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때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는 작은 신발을 신음으로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보다는 숨기는 데 급급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콤플렉스는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주해야 할 대상이다.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이 끝날 때까지 인생의 험로를 함께 헤쳐나가야 할 반려자다.

콤플렉스를 흔적 없이 말끔하게 치유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콤플렉스를 의식하면서도 짓눌리지 않는 것.

나아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콤플렉스의 존재를 잊고 뛰어넘어야 할 인생의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는 용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콤플렉스가 당신을 짓누르고 짓밟아도 절대로 기죽거나 정말하지 말기를. 어쩌면 콤플렉스가 나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삶의 숨은 가능성을 일깨워줄 수도 있으니까.

콤플렉스를 적이 아니라 반려자로 받아들일 때, 콤플렉스는 당신의 장애물이기를 멈추고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줄 것이다. 콤플렉스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려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정신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나 자신도 아니다.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고통이 나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이 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이 마음의 운전대를 제멋대로 조종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괴로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향한 집착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 깨달을 때,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슬픔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안다. ‘허락‘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보다 거절이 나다움을 만들어주는 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마뜩잖은 부탁을 처음으로 거절하는 순간,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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