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와 불링거 기독교고전총서 19
두란노아카데미 편집부 지음, 김유준.서원모 옮김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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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개혁자들의 대표인 츠빙글리는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관리의 아들이라는 좋은 환경 가운데 148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베센(Wesen)의 지구장(dean)인 숙부의 후원으로 그는 교육의 여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바젤에서 인문주의자인 베텐바하(Thomas Wyttenmach : 1472-1526)의 가르침을 즐겨 받았는데, 츠빙글리는 이 교수에게서 성경의 유일한 권위, 오직 속죄의 대가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 면죄부의 무가치성 등에 대해서 배웠다. 이 같은 교육의 영향으로 츠빙글리는 자기 자신이 기독교신앙의 최초와 초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인문주의자가 되었고, 인문주의자들과 더불어 당시 가톨릭교회의 미신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루터처럼 죄에 대한 고민, 복음을 통한 은혜와 신앙에 의한 사죄를 깊이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태도는 작센의 개혁자인 루터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좀 더 과격하였다.


취리히에서 메그레는 츠빙글리에게 프랑스아가 신학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츠빙글리에게 어떤 의구심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스 궁정에 그의 신앙에 대한 분명한 진술서를 제출하라고 조언했다. 츠빙글리는 메그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531년 초여름 「신앙의 주해」를 작성하여 대성당 학교의 그리스어 교수이며 츠빙글리와 절친한 친구인 루돌프 콜린 편으로 프랑스 궁정에 보냈다. 


「신앙의 주해」는 사도신경 위에 세워졌는데,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신경을 자신의 본질적인 정통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기초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주제는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도신경의 모든 항목을 다루지는 않았고 그의 목적과 적합한 항목만 특별히 다루었다. 따라서 그는 성령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성찬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지면을 할애했다.


흥미로운 특징은 명백한 인문주의적인 색채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론에 대한 처음 단락에서 곧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자료만큼 고대 철학에서 많은 것을 끌어낸다. 츠빙글리가 고전 철학에서 발견한 개념과 논증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고전철학을 적용하는 그 하나님은 성경의 살아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계시와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모든 신앙을 끌어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로 구분하여 이와 같은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는 신론의 관점에서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라는 내용으로 적용된다.


츠빙글리의 하나님 관념은 절대자 관념과 연결된다. 그가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논증은 성경에 의존해 있다기보다는, 하나 이상의 절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불가능이라고 보는 데 더 의존해 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지만, 이들은 피조물이나 다른 신이 아니라 셋이 모두 하나요, 한 본질이요, 한 우시아, 즉 실존이며, 한 힘과 권능, 한 지식과 섭리, 한 선과 호의이며, 세 이름과 인격이지만 모두 그리고 각자는 같은 한 하나님이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증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강조하는 키릴로스파의 관점보다는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오스파의 관점보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신성에서 어떤 것도 빠지지 않아 그분은 참으로, 고유하게, 본성적으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분의 인성은 신성으로 들어가지 않아, 그분은 죄를 지으려는 성향만 빼고는 참으로, 고유하게, 또한 본성적으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이신 면에서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적인 연약함의 요구 때문에 신성의 속성 중 어느 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람이신 면에서 그분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시므로, 인간의 참되고 고유한 본성에 속하는 모든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죄를 지으려는 성질만 제외하고는 신성과의 결합 때문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츠빙글리는 주의 만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너그럽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리키며,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돌보고 복되게 하신 구속하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즐거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기독교 교리들의 대부분에 있어서 서로 용납했지만 성만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어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초래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문자적 진리였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전(全)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죄의 약속을 경험적으로 보증받는다. 네덜란드의 법률가인 호엔(Cornelius Hoen)은 일찍이 1521년에 “This is my body.”가 아니라 “This signifies(가리킨다 혹은 의미한다) my body.”라 하였다. 이 주장이 1523년에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주어 제정의 말씀에 대한 그의 상징적 경향의 이해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 이후 츠빙글리는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이런 의미에서 실재적 임재-를 거부하였고, 그것의 기념적 성격과 믿는 자들의 회중을 한데 묶어 주님께 대한 충성을 약속하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츠빙글리는 행위의 근원은 믿음이 되어야 하며,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이 된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배역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모독이 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부터만 온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일의 표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본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무관해서 행해지는 일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 없이 행해지는 일, 즉 말씀과 하나님의 뜻 없이 행해지는 모든 일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죄다. 죄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뜻 없이 행해진 행위는 믿음 없이 행해지는 것이요, 믿음 없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되이며, 그것이 죄가 되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루터가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허용하려고 한 데 반해, 츠빙글리는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은 모두 금하려 했다. 이것은 로마주의의 모든 잔재를 훨씬 더 철저히 벗겨내는 것을 뜻했다. 루터는 바울의 복음과 직접 간접으로 상충되는 것만 배척하려고 한 반면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보다 한술 더 떠서 초대 교회의 형태와 구조까지도 회복시키고 싶어했다.

 


츠빙글리의 신학과 개혁은 현재의 개신교회와 상당히 흡사한듯하다. 그의 신학은 매우 성경적이면서도 당대의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의 정황에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교리들을 설명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듯 보인다. 우리의 신학과 목회도 결국 지금의 정황(context)에서 어떻게 진리(text)를 선포하는가하는 고민이다. 츠빙글리의 삶과 사역, 신학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사고하고 학문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교리와 신학을 정리하고 설명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 또한 더욱 치열하게 학문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을 알아감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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