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루터의 95개 논제가 세상에 공표된 후 그와 로마교황청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메워지질 않았다. 1518년 10월 아우그스부르그(Augsburg)에서 열린 추기경 카예탄(Jakob Cajetan de Vio)의 심문은 루터를 회유 내지는 굴복시키는데 실패했다. 1519년 잉골스타트의 요한 엑크(Johannes Eck)와 라이프찌히(Leipzig)논란을 벌이면서 루터는 교활한 엑크의 잔꾀에 말려들어서 성경의 권위는 교황이나 회의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황과 회의믜 미움을 사게 되었다.
루터는 이제 실로 싸움터에 깊숙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의 사상도 급속도로 명료하게 되어 갔다. 울리히(Ulrich von Hutten) 같은 인문주의 지지자들도 루터가 교황청과의 국가적인 분규를 영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루터는 자기의 사명을 적그리스도로 간주되는 교황 한 개인보다는 오히려 교황청으로부터 조국 독일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진전되어가고 있을 때 작센주의 젊은 귀족인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로마 교황청과 루터진영 사이의 중재를 자청하고 나섰다. 로마 교황청과의 전적 단절을 원치 않았던 루터는 밀티츠의 요구대로 자시의 종교개혁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 신앙에 관한 소책자 한권을 저술한 후 이를 유화적인 편지형식으로 된 헌사와 함께 교황에게 보낼 것을 약속했다.
루터는 1520년에 3개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Address to the German Nobility),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이다. 이 중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1520년 11월 20일경에 밀티츠와의 약속에 의해 출판된 책이다. 당시 독일 안에 교황의 교서가 한참 공포되고 있는 동안, 이를 구상하여 내놓을 수 있었음은 참으로 그의 험난한 생애 중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루터는 두 가지 핵심적인 명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상호모순되는 자유와 예속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이고 육적인 두 본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영혼에 따르면 그는 영적이고 새롭고 내적인 인간이라 불리우며 혈과 육에 따르면 그는 육적이고, 낡고, 외적인 인간이라 불리운다.(2,4단락)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자유한 만물의 주이며,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는 만물의 가장 책임있는 종이다.”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유하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그의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만인제사장론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자권 및 그것의 영예와 품위를 소유하고 계셨던 것처럼 그분은 (이제) 그것을 당신의 모든 신도들에게 분여해 주시는고로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수 밖에 없다(20).”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이 육적으로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영적으로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에게 얻어주셨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왕권을 통해서 만물을 지배하며 그의 제사장직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영향력을 행사한다.(2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터는 카톨릭 교회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성직자여도 수도사여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덕이 없는 것이라고 본다. 믿음이 없으면 외적인 일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세속적인 일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성직자들보다 낫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 루터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결국 복음이란 한 편으로는 인간이 전혀 의가 없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율법의 말씀)과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음을 알게 하는 말씀(복음의 말씀)이다(11,12).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카톨릭은 외적인 경건과 덕을 강조하고, 직무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 루터는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치않다라고 이야기한다(5,6).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믿음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롭다. “너의 멸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네 앞에 제시하시고 그분의 살아있는 위로의 말씀을 통해 너에게 말씀하게 하신다. 너는 굳은 믿음으로 그를 따르며 용기있게 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 신앙 때문에 너의 모든 죄악들은 사함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너의 파멸은 극복되어질 것이며 너는 의롭고 참되며 평화롭고 경건하게 되고 모든 계명들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8)
오늘날에도 믿음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의 신학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있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염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여러 방편들이 그리스도인의 올무가 되어 의무처럼 느끼거나 율법이 될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복음 앞에 서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충만은 우리를 능히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를 의롭고 참되며 평화롭고 경건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며 선을 행할 것이다. 우리의 외적 모습은 내적 자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