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되신 하나님 시리우스 총서 7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지음, 이은재 옮김 / 한들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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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Anselm)는 1033년 이태리에서 출생하여 노르만디에 있는 베크(Bec)수도원에 가담하여 초기 수도원 부흥에 기여했다. 그는 베렝가(Berengar)와 란프랑(Lanfranc)에게서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후자를 승계하여 1093년에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힐데브란트(그레고리 7세)와 동시대 인물로서 힐데브란트가 교황청을 빛낸 것처럼 기독교 신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베크수도원에서 여러 작품들을 썼고, 영국의 왕들에 의해서 추방당한 상황에서 대륙에서 더 많은 작품들을 썼다. 


그의 많은 저작들 중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은 대화 형식으로 기록된 글이다. 전체 작품은 안셀무스와 그의 제자요, 후에 베크의 수도원장이 된 보소(Boso)와의 대화로 이어지고 있다. 안셀무스는 “우리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 대해 믿는 바를 하나님 자신이 원하셨다고 고백하게 될 때에 무엇이 당신의 이성에 거슬린다는 말인가?”라고 물은 후에, “간단히 말하자면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낮은 곳으로 낮추시었고, 전능하신 분이 무엇인가 많은 수고를 하시었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시에 대화체로 쓰여진 철학책과 서적은 있었지만, 신학책은 거의 전무했다. 안셀무스는 신학책에 ‘대화’라는 방법을 접목함으로써 성경과 전통이라는 권위에 호소하기 보다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상대로한다면 권위에 호소할 수 있지만, 비신자들의 입장과 관점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소통하고자한다면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해야한다. 그러하기에 대화체는 비신자를 아우를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는 옛 가르침에 문제를 제기하되 모든 전통을 뛰어넘어서 자신의 개념과 언어로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었으나 나름대로 창의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철학과 신학은 극단적인 실재론의 입장을 취했다. 안셀무스는 신앙내용을 이성으로 검증하려 했다. 그는 성경과 교회의 신학전통이 믿음에 의해서 수용되고, 나아가서 믿는 자의 이성에 의해서 설명되고 증명된다고 보았다. 예컨대 하나님의 본성,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등이 신앙의 이성에 의하여 설명되고 증명된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어거스틴의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하는 명제에 이어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학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가리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한다. 엄격히 말해서 그 용어는 학교들에서 가르쳐지는 내용이라는 뜻이지만, 좀 더 좁은 의미에서는 단정 곧 명제(thesis, 정<正>)로 시작하여 거기에 비판적 의심 곧 반명제(antithesis, 반<反>)를 대입한 뒤 논리적 추론에 의해 결론 곧 종합(synthesis, 합<合>)을 얻는 형태의 기독교 신학을 뜻한다. 안셀무스는 변증법적 설명으로 교회의 교리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셀무스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에서 성육신과 구속을 논한다. 안셀무스는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속전을 지불하고 인간을 속량했다고 하는 고대교회의 교리를 거부하고 만족설을 제시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업신여겼으니, 하나님께서 이 죄를 그냥 두시면 창조세계 전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만족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이 만족은 범죄를 충분히 배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죄는 인간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만족도 인간에 의하여 주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인간은 죄인인 고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바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분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요청을 발견한다.


안셀무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이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서, 인간 홀로 그 빚을 졌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그 빚을 지불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하신 한 인ㅍ격체, 즉 동시에 사람이고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격의 연합 가운데 인성을 취하셔야만 했던 것은 필연적입니다.”


안셀무스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중세 사회의 구조와 사상을 반영한다.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손상이다. 이러한 ‘명예’는 기사도에서 보여진다. 경제 발전과 도시 문화의 부활이 가져다 준 부산물은 세련된 삶이었다. 이런 경향의 한 측면이 기사도였다. 기사도의 핵심은 개인의 명예였다.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명예를 얻기에 부합해야 했다. 그 시합에는 규칙이 있었고, 규칙을 어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기보다 차라리 패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또 한가지의 핵심 사상은 보속개념이다. 이는 당시의 봉건적 죄관에 기초를 두었다. 죄의 경중을 그 죄를 범한 상대의 지위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저지른 죄는 무한히 크다. 그런 죄는 무한한 보속 곧 속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죄를 저지른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어야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은 고안해 낸 바로 그 안셀무스가 여기서는 무한한 죄인인 인간의 구속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셀무스의 신학방법은 충분히 값지다. 그는 1권의 2장에서 보여지듯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보다 함께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2권의 22장에서 보소는 이렇게 답한다. “성경에서 인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치에 닿는 추론만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까지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 자신이 새로운 언약의 토대가 되셨으며 구약의 진리를 입증하셨습니다” 안셀무스의 신학방법은 신앙이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논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육신 등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많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대속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안셀무스는 값을 치룬다는 보속의 개념을 강조하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삶과 사역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안셀무스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 당시의 시대정황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는 겸손함과 열린태도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함께 진리를 알아가고 탐구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는 자신보다 현명한 누군가가 더 명확한 대답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더불어 기독교의 핵심교리에 대해 추상적이고 명제적인 표현이 아니라, 더욱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대화하고싶다는 소망과 그것을 위한 치열함을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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