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문자
성 어거스틴 지음, 공성철 옮김 / 한들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어거스틴은 마니교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신론을 확립하고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수립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는 죄론과 은총론을 확립하였다. 도나투스주의는 북아프리카에 국한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국지적인 것이었지만,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체 그리스도교계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보편적인 위협이었다. 펠라기우스는 그의 경건과 엄격한 삶으로 유명해진 영국(Britain) 출신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죄를 극복하는 성화의 삶을 구원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고 악의 근원이 의지에 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인 스스로가 죄를 극복할 수 있고 성화에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죄나 구원이 모두 인간의 책임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했다.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If I ought, I can.)이라는 말은 그의 입장을 잘 표현한다. 그의 태도는 대중적인 스토아 윤리의 자세, 그것이었다. 그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었다는 어떠한 원죄도 부정하였으며, 모든 인간이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고자 의지하였고, 동시에 의지하지 않았던 때의 경험을 기억하였다. 이는 인간의 의지란 펠라기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의지란 항상 자신의 주인은 아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의 권세가 인간의 의지를 점령하고 있는바, 인간이 이 권세하에 있는 동안 인간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의지하는 것과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 사이의 투쟁인바, 이는 인간의 의지의 연약성을 폭로할 뿐이다. 죄인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은총을 세례와 전반적인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한 죄의 속량으로 생각하였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은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랑의 주입으로서, 이로 인해 인격이 점차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돕는다고 믿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너무도 깊이 죄에 빠져서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마저도 없어지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구원할 만한 아무런 힘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리석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바울의 질문에 대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답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과분한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여 남긴 책으로는 『죄의 벌과 용서 및 유아세례에 관하여』, 『영과 문자』,『인간의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등이 있다.


특별히 『영과 문자』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총과 원죄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과정에서 율법과 성령의 역할과 도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거스틴은 “성령과 문자”라고 했으나, 실제적으로 ‘율법과 새언약’, 혹은 ‘율법과 성령’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학적으로 이 글은 신학논문에 가깝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펠라기우스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 적혀적기에 그의 논리는 날카롭고 풍부하다. 어거스틴이 이전의 다양한 문학과 역사적 정황, 철학 등을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글에서는 특별히 성경말씀을 계속적으로 근거로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피력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사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부으신바 되었던 것입니다(Ⅲ.5).” 어거스틴은 율법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율법의 한계와 성령의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한다. “율법은 선하고도 찬양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악한 욕망 대신에 선한 요망을 불어넣으면서 돕지 않으면 안됩니다(Ⅳ.6).”


우리는 하나님께 벌받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의를 행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하고 깨끗한 의를 원하신다. 결국 이 의는 성령이 도우시고 치료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으로 선을 행하시며, 선을 행한 자들이 칭찬을 받게되는 원인이 되시는 분입니다(Ⅷ.13).”


어거스틴은 계속적으로 성경본문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리를 확장해나간다. 주로 로마서의 말씀이며, 1장 16-17절, 2장 9-10절, 14-15절, 3장 23-24절, 11장 6절 등 다양하다. 그 외에도 창세기와 시편, 디모데전서 등 로마서 외의 성경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성경해석과 비교해서 당시의 성경해석은 다소 연역적임을 볼 수 있다. 한 주제나 교리에 대해서 다양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반박하는 형태인데, 성경해석의 근거가 다양하지 않아 자칫 자신의 논리에 성경본문을 끼워맞추는 형국으로 보일 수도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정황에서 어거스틴의 글은 반성경적인 사조에 대항하며, 건전하고 새로운 기독교 사상을 확립하는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성령과 문자』에서 어거스틴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 너무 부패하여 모든 면에서 죄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그의 노력이나 의지로 치유할 수 없으며,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할 뿐 죄를 치유할 수 있는 궁극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유일한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자라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성령론은 성경적이지 않은 다양한 견해들로 오염되고 있다. 경험은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일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하며, 성경을 통해 해석가능해야한다. 특별히 은사주의는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을 왜곡하고 있다. 치유와 축귀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성경에서 보여지는 성령의 도우심은 균형과 조화, 끊임없는 성숙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점에서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과 온전함을 향해 매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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