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몇 번의 동의를 구했나요? - 건강한 관계를 위한 경계 존중 수업 사계절 1318 교양문고
오승현 지음 / 사계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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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존중은 청소년만 배울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이나 인간관계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 많고 배웠다고 해도 기억하고 실천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무심결에 경계를 존중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니까.

 

존중이란 동의할 때는 물론 거절에도 중요한 태도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기본이고 먼저다.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게 미스터리다. 이는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범죄 예방으로도 확장되니 더욱 중요하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일반 권고 제35여성에 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에 대한 협약을 보면 부부·지인·데이트 강간을 포함하여 성범죄의 정의가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에 기반을 둔 강압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장하라라고 명시합니다.”

 

어른이라 할 말이 더 없이 부끄러운 시절,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혹은 의도적으로 혹은 이익 추구를 위해 타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모욕하고 죽어라 돌팔매질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비극을 막기 위해 이른 시기부터 꼭 필요한 교육이다.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살던 대로 하던 대로 말하던 대로, 너무 당연하고 쉽게 우리가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하는 행동을 돌아보고, 익숙해질 때까지는 노력이 필요한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한 중요한 주제다.

 

독자의 연령에 따라 내 위치와 입장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로 중첩될 수가 있다. 그래서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폭력에 당한 경험도 누군가에게 부주의하게 했던 언행도 모두 짚어보자.

 

고민하고 조심하고 경계하고 결심을 새롭게 하고 언행에 주의하고. 감정이 치솟을 땐 차라리 침묵하고. 서두르지 않고 호흡을 고르며 상대를 제대로 보고 들을 줄 알면 큰 실수나 가해를 예방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거리를 둔다는 건 멀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조심한다는 뜻이에요. '조심(操心)'이라는 글자는 '마음을 쓴다'는 뜻의 한자어예요.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자기 말과 행동에 마음을, 즉 신경을 쓴다는 뜻이에요. 상대가 불쾌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사람은 자기 경계를 잘 지킬뿐더러 타인의 경계도 잘 지켜 줘요.”

 

몇 년 전만 해도 깜짝 놀랄 만큼 자신의 아이와 가족을 매일 노출시키는 사진과 글이 참 많았다.* 직접적인 사진만이 아니라, 타인이고 개별 인격체인 자녀 이야기를 동의 없이 공개하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 셰어런팅: 부모가 SNS에 자녀를 찍은 사진이나 자녀에 관한 글을 습관적으로 올리는 행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는 자신을 자주 들여다보는 사람,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누군가를 보살필 줄 아는 사람, 애써 힘을 보태고 위로를 건네는 사람, 그런 마음과 태도를 가진 이들이 많은 종류이다. 그런 문명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존중과 배려와 숙고를 생각해보라고 친절하게 손잡아 주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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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사계절 1318 문고 78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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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멀쩡해 보이는 맨홀도 무섭다. ‘이라고 믿은 도로와 인도도 무섭다. 언제 홀hole이 생기거나 거대하게 가라앉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지반 침하는 모두 맨홀man(made)hole이다.

 

허술한 시스템이 대량 양산한 현실 곳곳의 유무형의 홀hole들이 안타깝고 두렵다. 박지리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을 이제야 읽는다. 작품 속 맨홀은 어둡고 깊은 함정일까, 도피처일까.

 

이곳은 운동과 상담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잠깐의 유예 장소일 뿐이다.”

 

...! 제목을 보고 인간이 만든()만 생각했는데, 인간 자체가 무수한 구멍이구나. 한 방식으로 아는 지식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면 그제야 어떤 깨달음처럼 느껴진다. 그렇구나, 내 몸에 난 구멍을 다 셀 수가 없구나. 땀구멍과 모공이 모두 몇 개야...?

 

이런 충격(?)을 도입부터 받고,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장소와 상황에 대해 마치 절절한 경험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문장력에 사로잡혀 점점 더 깊게 파묻히며 계속 읽어 나갔다.

 

아홉 살 때 목격한 절망적인 천장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던 열두 살의 어두운 하늘과 이어져 있고, 열두 살 때 느낀 공포는 마치 오늘이 어제가 되듯 잠을 잘 수 없었던 열다섯, 열일곱의 밤 속에 녹아 있다.”

 

박지리 작가님 그리 일찍 떠나지 않으셨으면 어떤 작품들을 더 만나볼 수 있었을까 진해지는 아쉬움과 비례하듯, 막 넘어진 직후라서 벗겨진 피부로 찬 공기와 출혈을 고스란히 느끼는 순간처럼 이야기가 욱신욱신 아프다.

 

문학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통이 반복되는 가정, “고요한 순간 뒤에 다가올 더 큰 폭력에 두려워하는가정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평균표준에 가까운 어떤 것들이다. 친구들에게서도 아주 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지금 십 대 아이들의 시절도 대개 무탈하고 별 일이 없다. ... 지독한 악몽 같지만 자력으로 떠날 수 없는 지옥 같은 시간들을 견디는 법을 혹은 끝내는 법을 모른다.

 

변호사는 내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맨홀에 보물처럼 숨겨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엄마와 누나는 긴장한 모습으로 변호사의 말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마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반복적으로 폭행하고 살해하기도 하는 가해자를, 세상은 여전히 가족이라고 혈육이라고 부른다. 정말 그럴까, 어린 시절 흔한 경고처럼 조심하라던 낯선 사람보다 더 위험하고 위협적인 그가 영원한 생득적 권리를 가진 듯 가족이어야 할까.

 

나에게 스스로에 대한 긍지라는 게 조금일도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죽음에서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았으며 내가 저지른 살인은 오로지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고 항의했어야 했다. 당신들이 나를 성실하고 착한 아이로 알고 있었을 때, 나는 늘 살인을 꿈꿨고 오히려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살인자가 되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

 

세상엔 피난처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나이만)어른이 된 뒤에도, 어린이와 청소년이 의논할 단 한 사람의 어른은 왜 이리 부족하냐고 남의 일처럼 화를 내며 살았다.

 

십 년간 나를 불러들인 구멍은 구청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시멘트로 막아 버렸다. 하지만 여기 밤거리를 달리는 이 구멍은 무엇으로 막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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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출간 20주년 기념 초판본 헤리티지 커버)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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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서 멋대로 침략 당하고 찢겨진 나라의 가장 약한 사람들, 미지근한 감상 따위 다 걷어 버리고 생존을 도모하며 충돌했던 고단한 분투와 패배에 대해, 그 뜨겁고 불운한 아이러니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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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출간 20주년 기념 초판본 헤리티지 커버)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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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기념으로 재구매하고 21주년이 되어서야 다시 읽었다. 이렇게 퇴행을 거듭하다간 식민지 시대에 사는 일도 망상이 아닐 듯한 막막함이 한 몫 했다.

 

읽은 책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거의 새 책처럼 읽을 수 있다. 나이 탓인가 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세세한 표현을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와는 다른 현재의 내가 읽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은 같지만 감상은 전혀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학습서가 아니라면 완독이란 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일독 후 다시 읽게 되지 않을 책들도 있지만.



 

첫 문장부터 다시 설렜다. 장소만이 아닌 시대를 다시 방문하는 기분. 어떻게 해도 떨어뜨리지 못하는 현실 이슈들이 무거워서인지, 황막함과 막막함과 공허가 유카탄의 바람 냄새를 품고 현실을 찾아 불어오는 듯했다.

 

원칙이 지루하고 상식은 식상하고 당연한 것은 너무 당연해서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라서,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고, 무엇이나 공격 받는 시절이라서, 칼을 휘둘러 살해 시도를 한 자가 아니라 칼에 찔려 죽을 뻔한 피해자를 더 욕하는 시절이라서, ‘이정이 따져 묻는 어떤 문장들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기록 같아서 안도했다.

 

자유도 좋고 자율도 중요하고 초월적인 무언가도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존재이고, 따라서 소속을 증명하는 서류로 생존도 삶도 보장 받는다. 국민 국가에 무슨 대단한 충성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무국적을 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정치적인 결정이다. 늘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장 약해서 멋대로 침략 당하고 찢겨진 나라의 가장 약한 사람들, 미지근한 감상 따위 다 걷어 버리고 생존을 도모하며 충돌했던 고단한 분투와 패배에 대해, 그 뜨겁고 불운한 아이러니들에 대해 다시 읽는다.

 

오래 전의 찬탄과 분노와 서글픔은, 조금 다른 단단한 감정들로 바뀌었다. 보다 선명했던 선악과 가피(加被)20년 동안 살아본 경험에 의해 흐려졌고, 그쪽이 더 드러난 현실에 가깝다고 느껴서 살짝 무력감이 더해졌다.

 

그래서일까. 그때의 지옥이 지금보다 더 지독하니 현재를 견디라는 위안은 스스로에게마저 잘 통하지 않는다. 아주 운이 좋거나 아주 나쁘지 않으면, 힘들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에게 단 한번 주어진 삶의 진짜 진면목일까. 그래도 지금은 그런 방식의 노예는 아니니, 원치 않은 삶의 면적이 좁아지지 않았냐고 안도해야 하는 걸까.

 

겨우 백여 년 전 나라 없는 존재로 겨우 살아남았는데, 우리가 피우고 싶었던 검은 꽃은 인권과 민주주의가 아닌, 황금 덧칠을 한 난폭한 자본주의와 결국엔 패거리 전체주의인 것인지, 검은 꽃의 개화 시기와 흔적 없이 사라진 짧은 수명을 원망하고 싶은, 그런 비겁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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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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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지 기억하면서 제정신으로 백룸의 출구를 찾거나 없으면 만들어가는 수밖에. 더 교묘하게 고안된 착취와 폭력의 시절에, 누구의 생존도 타인의 선의나 호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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