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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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책소개글을 몇 문장 읽고 걷잡을 수 없이 끌렸다. 설명이 필요 없는 공감을 만났을 때의 무방비한 마음 풀어짐이 느껴졌다. 모든 수식어에 동의한다. ‘맞말(맞는 말)의 대향연! 사회인 공감 100%! 직장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집’ 

 

“모욕을 당해도 침착해야 하는 능력이 도대체 회사 어디에 필요한 걸까요?”

 

“내가 만난 많은 그들이, 삶에 잡아먹히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과 사랑하는 존재를 먹여 살리는 사람들은 특유의 에너지가 있다.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글을 써나갔다.”

 

“나는 아주 일부분을 좋아하는 것뿐이면서 안 맞는 일도 가득 찬 일을 직업으로 골랐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나에게 이 직업은 지하철에서 파는 델리만쥬 같았던 거다. 냄새를 맡으면 참을 수 없이 끌리지만 실제로 먹게 되면 예상과 다른, 간식일 때 만족스러운 음식을 삼시 세끼 먹게 되자 삶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무능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쁜 의도는 없지만 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무능함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말이다.”

 

이동 중에도 읽을 수 있을 듯해 넣어 다녔는데 펼쳐 보니 30쪽이 들려 주는 세계가 통쾌하다. 스스로도 여러 번 말로도 글로도 표현했던 것들인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끔하게 이해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체증은 아니고 있는 줄로 몰랐던 명치 어딘가의 응어리가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

 

공감하는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고 세세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않아도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일단 숨 쉬는 게 좀 편안해 지는 일도 가능할 것이니, 우리는 혼자 괴로워하는 대신 멈추지 말고 읽고 쓰고 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얇아서 아쉽고 귀한 가제본에 실린 [막내가 사라졌다]는 분량과 상관없는 위력적인 작품이다. 직장에서 ‘막내’라고 불리는 처지를 미리 짐작 못할 바가 아니고 그 따위 호칭을 사용하는 막내의 직장 상사들이 벌써 별로였다. 가족이나 위계가 붙은 호칭을 좋아하는 이들과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

 

그 막내가 사라지면서 남긴 문자는 아주 바람직한 대가이자 처벌이자 복수이다. 정당하지 아니한가!

 

“저는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필요한 서류는 대리인이 참석해서 처리할 예정입니다.”

 

성추행 가해자 본부장, 인신공격하던 대리, 사적인 잡일을 시키던 팀장. 법률 대리인을 잘 맞이하길!

 

“내일까지 두려움에 떨 사람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러게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예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뭔가 다들 오해하는 것 같은데 퇴사는 대단한 각서를 쓰고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적법한 시간과 절차에 맞춰 의사를 표현하면 성립되는 겁니다.”

 

직장이라고해서 인간관계가 마냥 얄팍하고 표리부동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직장 내 인물 군상들은 아주 난망하다. 물론 현실은 더 가혹하고 처참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이상적인 직장 얘기를 더해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 대신 상상 속에서 막내 상사들의 따귀를 한 삼십 번쯤.

 

!현실에선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절대 그런 폭력은 안 쓸 겁니다!

 

30쪽의 거센 고발! 필독서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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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ㅣ 킹덤 1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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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초록한 여름 북유럽의 평원에서
순록이 뛰어 다니는 장면이 연상되는
순한 표지이다.

가제본을 읽고 출간본을 받으니 출판 과정에 참여한 묘한 기분...

스릴러 중에서도 나는 무척 심리적으로 어려워하는
가족, 이 등장하는 내면 갈등이라
무겁게 숨 쉬며 읽은 작품이다.

가족이 살던 집을 ‘킹덤’이라고 명명하는 데서 오는
폐쇄성과 비극과 드라마틱한 갈등 역시 내내 불안감을 고조했다.

‘화자’를 따라가며 읽는 방법 밖에 없는데
마음속으로 무수하게 말리고 싶은 장면들을 반복해서 만난다.

평범한 일상들이라 사건의 여파가 더 크고 길다.

가을을 밀어내는 겨울과 더 어울리는 차가운 공기,
올 겨울에 만나기 서늘한 북유럽의 이야기일 지도...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마땅히 자기 것이어야 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
설사 그것이 아주 망가진 모습이라 해도.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과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




극지방에 가까운 빙하를 관광할 수 있는 빛이 부족한 북유럽의 겨울을 경험한 바가 있어,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읽는 동안 어딘가의 카디건을 찾아 꺼내어 무릎 위에라도 올려야 할 듯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한기를 글의 동력이자 자신의 재능으로 삼은 저자의 문장마다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스탠드 얼론stand alone’이란 시리즈물과는 별개의 사건, 세계관, 스토리를 단독으로 가지는 이야기이므로 <킹덤>은 누구나 첫 작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매력적인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1장부터 7장까지의 구성이다. 책장은 아주 빨리 넘어갈 것이다.

 

개가 죽은 날이었다.

나는 열여섯, 칼은 열다섯.

며칠 전 아빠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냥용 나이프로 나는 개를 죽였다. (...)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뭐가 됐든 아주 조각조각 잘라주겠어, 젠장.

 

죽음, 더 정확히는 죽임, 피, 나이프, 총, 욕설로 시작하는 끔찍하게 어두운 이야기이다. 맥락과 상황을 파악하고 심정적 거리를 두려는 노력에도 속이 몇 차례 울렁거렸다. 더 몰입하거나 사건현장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무감해지거나 선택해서 읽어야 할 듯.

 

로위(형)과 칼은 황무지에 위치한 집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유일한 왕국(더 킹덤)은 오프가르 농장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성격도 삶의 방식도 다른 형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세계는 농장으로부터 마을로, 카운티로, 해양을 지나 미국과 캐나다에 이른다. 그리고 마치 예정된 수순인 듯 다시 농장으로 회귀한다.

 

칼이 돌아왔다. 내가 왜 개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거의 이십년 전의 일인데. 어쩌면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칼이 귀향한 이유가 그때와 똑같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언제나 그랬든 이 똑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형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을 거라고.

 

형인 로위는 황무지와 다름없는 농장에서 십오 년 동안을 혼자 살았다. 온 세상에 혼자인 듯한 기분으로 남은 그에게 동생의 귀환은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자신의 고립에 가까운 독거가 끝난다는 기쁨과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어긋난 기대를 보여주려는 듯 이야기는 형제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된다. 어린 시절 동생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어떤 죄책감을 느꼈는지, 현실이 아니라 꿈과 상상을 통해 도망가는 성격이 얼마나 엄마와 닮았는지.

 

그런 형에게 귀향한 동생은 자신만만하고 리더처럼 시선을 주목시키고 이질적일 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이다. 친해지려고 캐묻도 방해하고 비웃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형은 그저 지켜만 본다.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끝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가 아빠 옆에서 워낙 희미한 존재라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 엄마는 행복했나? 엄마의 꿈은 무엇이었나? (...) 엄마는 왜 나와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로위는 어릴 적엔 엄마를 관찰했고 지금은 엄마를 닮은 동생을 지켜본다.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워 보일 때도 있다. 적어도 농장의 유일한 주인이자 왕국의 중심으로의 유일한 존재가 가장자리로 구경꾼으로 밀려난 느낌이다.

 

사람들은 내가 아빠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 아마 인생에 기대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남의 인생에 참견하면 안 된다고 판단할 줄 아는 염치도 있다.

 

그러니까 아빠는 어떤 일에 주도적으로 앞에 나서는 일은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많이 배우고, 언변이 좋고, 추진력이 있고, 카리스마와 비전이 있는 칼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얼핏 아버지와 칼과는 다르고 로위는 닮아서 더 친밀하고 애정이 깊은 사이로 들릴 수도 있지만 로위는 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했고' 칼을 '사랑했다'고 믿는다.

 

로위는 아빠는 모든 이유로 칼을 더 사랑했다고 믿는다. 세상이 혼동에 빠져 각자도생해야 하는 날이 올 때, 로위은 잘 헤쳐나갈 수 있지만 칼은 거꾸러질 거라서, 칼은 아빠를 우러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칼이 엄마와 나무나 닮았기 때문에, 칼이 잘생겨서.

 

눈사태, 눈 더미, 얼음, 박살, 화재, 폭풍, 지붕이 찢어지고 부서지고. 드디어 손가락이 시린 듯한 환각을 주는 황무지의 냉혹한 자연이 느껴진다. 인간은 그 안에서 그저 무력하고 삶은 찰나의 사건처럼 끝나기도 이어지기도 한다. 형제의 이야기는 이제 잔혹한 생존기로 읽힌다.

 

내 등에 칼의 손이 느껴졌다. 그 손이 내 목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그의 파란 시선이 나를 비췄다. 크리스마스 때보다 좋아 보였다. 조금 말랐고, 움직임이 살짝 빨라졌고, 흰자위가 깨끗해졌고, 발음도 명확했다.

 

쉴 틈 없이 벌어진 사건사고들 속에서 로위와 칼 형제가 살아남았다. 마치 둘이 함께일 때는 어떤 것도 이들을 죽일 수 없는 존재들처럼 위기에서 탈출했고 회복했다. 설마 모든 스릴러 장치들이 생존 과정에 단단한 얼음처럼 박혀 있을 줄은 몰랐다.

 

힌트가 힌트인 줄 몰라 지나친 문장들이 무수할 듯하다. 그럼에도 예상이 깨어질 때마다 더 흥미롭고 궁금해져서 읽는 속도는 가속될 수밖에 없었다. 배경마저 긴장이 가득했던 여정이었다. 스포하지 않으려 쓰지 않으려 애쓰며 쓴 이상한 글이 되었다. 꼭 마지막까지 반전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모두 다 다른 가정의 모습이지만 모두 비슷한 꿈을 꾸며 가족을 만들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족이란, 가정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살아남고 살아가는 일이란 무엇인가. 가장 현명한 것은 고민 없이 의미가 가치를 찾지 말고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

 

황량한 황무지에 북풍이 몰아치는 밤이면 또 다른 아이들이, 가족들이, 유령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잠 못 들고 어둠 속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듯하다.

 

“그래, 무자비한 봄이 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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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서점 - 살인자를 기다리는 공간,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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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색감과 제목을 보면 어떤 장르의 작품일 것 같으신가요. 작은 독립서점이 나오니 저는 무조건 읽고 싶어집니다. 서점이나 도서관 배경에 책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면 참을 수 없이 궁금하고 설렙니다. 




이 책은 고서적을 다루는 서점에서 15년 간 한 인물을 기다리는 주인공이 아주 치밀하게 계획한 순서에 따라 ‘전개되어야하는’ 이야기입니다.


뭉클하고 따뜻한 감동이 가득한 추억과 사랑이 아니라…… 살인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죽이고 자신의 두 다리를 앗아간!


정체성을 사냥꾼이라 정하고 사냥감을 찾는 살인마의 행적이 묘사될 때마다 치를 떨며 읽습니다. 점점 더 생존자 주인공에 공감하게 되지요. 행위만 드러나고 정체를 모르니 의심스러운 몇 명의 용의자들을 두고 추리해나가며 참여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장르 소설에 익숙하시면 빨리 찾을 수도 있겠지만, 살인마에 대한 단서 - 기억 - 라곤 눈빛과 고서적에 대한 애착뿐임에도 주인공과 함께 찾아내는 일이 큰 재미입니다. 요행히 사냥꾼에게 빼앗은 고서적을 유명우 교수가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쉬운 미끼인가요.


고서적 수집가로 유명해지고자 한 노력, TV에 출연한 것도 모두 살인마를 유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일이지만 15년 전 자신이 기억하는 단편들을 믿고 이 위험천만한 대결을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 계획이 있습니다. 독자로선 이 계획을 파악하고 이해한 뒤 범인을 함께 유추해나가는 과정이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장르 특성 상 막 신나게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주인공이 맘 편히 계획을 세우며 즐겁게 복수를 꿈 꾼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곧 죄책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내와 아이가 죽었으니 그 고통은 짐작하기 어렵겠지요.


그럼에도 이야기의 재미를 망치지 않는 점은 주인공이 감정적 폭발 대신 철저하고 냉철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점입니다. 긴장감도 대단하고 이런 삶을 살아야하는 무참함도 느껴집니다.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설정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액션보다 두뇌대결입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범인을 마치 사냥하듯 몰아가는 서사는 대단합니다. 


범인이 너무 분명하게 알아차릴 미끼라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함정이라 조마조마했습니다. 주인공이 15년을 절치부심했다해도 범인은 더 오래 살인을 연마한 노련하고 심지어 지적인 존재이니까요. 


복수를 위해 살인마를 기다리는 공간으로 독립서점이 활용되다니!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탓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거침이 없습니다. 계획에 따라 빠르게 속 시원히 전력 질주하는 작품입니다.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으니까요.”


이제는 정말 스포 이외엔 더 쓸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총총.


! 반전 있습니다. 서점 안 비밀 공간 있습니다. 캐릭터를 빌린 현실 인물과 서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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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현대문학 단편집
연필로 명상하기 옮김 / &(앤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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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작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그 애니메이션 원화들로 다시 책을 만들었습니다. 

https://youtu.be/JTN61MECPz4




다섯 개의 단편 모두 읽어 보셨나요. 저는 20세기 학창 시절에 읽었습니다. 동심이 부족했는지 무척 거리감이 느껴지고 낯설고 기이하고 무섭기도 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안다는 이유로 다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채로운 작품과 같은 책을 선물 받은 덕분에 색감이 화면을 프린트한 느낌이 받으며 이제 다시 읽어 봅니다. 가만 따져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참 멀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일상들이 낯설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마다 담긴 정서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전달을 잘 할 자신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 메밀꽃이 가득 핀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 주신 이웃분이 계셔서 잘 감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온통 이런 간접 경험뿐이니 정서적 반응이 약할 수밖에요. 무녀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섭네요. 청소년 필독서... 예전 십 대인 저도 잘 이해를 못했는데, 그건 제 개인의 과문함 탓일 수도 있으니, 지금 십 대인 아이들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운수 좋은 날]은 제목 덕분에 잊지 못할 기억이 떠오릅니다.

 

2004년 3월, 일 년 반인가... 만에 한국에 들렀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와 경부 고속도로로 출장을 겸한 여행을 떠났는데 얼마 못가고 폭설로 도로에 갇혔습니다. 눈 좀 많이 온다고 산업도로가 막히다니…… 조금 많이 당황했습니다. 슬금슬금 이동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완전 저버리고 총 30시간 정도 도로 위에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갈 수 없었습니다.

 

아주 가끔 조금 움직이거나 해서 터널에 진입했을 때는 더 괴로웠습니다. 바로 앞에 수소탱크 차량이 있었고 용감한 몇몇 사람들이 어디선가 땔감을 가져와서 불을 피웠거든요. 수소 옆에 화기……. 터지면 적어도 터널 안 사람들은 다 죽을 텐데. 네. 물론 탱크 재질이 그리 쉽게 불붙는 건 아니지만요. 친구는 잠들고 저는 화기 감시하느라 잠을 못 이뤘습니다. 차량기사는 과로 탓에 운전석에서 기절을 하셨더군요.

 

이틀째가 되니 - 터널 겨우 빠져 나옴 -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저기에 거대한 택배박스 들을 쿵쿵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하강했지요. 졸고 있던 친구를 깨워 폭설이 아니라 전쟁이 난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함성과 함께 택배박스로 달려가는 이들이 보였습니다. 그 안에는 방한용 담요들이 가득했습니다. 점점 더 무서워지는 와중에,

 

“똑똑똑!” 군인 한 명이 차 유리창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여니 겨울 칼바람과 거친 숨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사이다랑 몽셸 통통 드시겠습니까?” 뭔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질문이었습니다. 취향이 확고한 제 친구가 칠성인지 킨인지 따져 묻고 안 마시는 거라고 거절하지 않았다면 저는 기념품으로 간직했을 지도.

 

해가 지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있는 부모들은 차를 버리고 눈에 푹푹 빠져가며 가장 가까운 마을로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량 연료가 떨어져 난방도 안 되고 음식도 물도 아기가 있는 차는 분유도 기저귀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목격하는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 여전히 얼떨떨했지요. 

 

다시 밤이 지나 아침이 오자 사방에 버리고 간 차들이 눈에 묻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로에서 버티던 연료가 남은 차들이 드디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근무자들이 생존을 반겨주며 이용료는 내지 말고 통과하라고 하더군요. 뭔가 울컥 분한 마음이... 이후에 집단 소송도 있었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76012.html


음... 다 쓰고 보니 [운수 좋은 날]과 묶일 여지가 있는 경험이었나 싶기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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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도감 : 동양편 - 동양 문화 속 괴물들의 이야기 ㅣ 괴물사전
고고학자(강석민) 지음 / 성안당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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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왜 탄생했을까요? 괴물이 반영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아무 이유 없이 생겨났을 리는 없겠지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종교와 전설 속에는 모두 괴물이 등장합니다. 상징성이 대단한 존재하는 뜻이겠지요. 그런 괴물들을 이야기 수집 차원이 아니라 고증을 통해 기록한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 제목을 보고 <괴물>이라는 무척 이상한(?)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상하다는 이유는 괴물이 너무 조금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덕분에 어딘가 숨어 있을 괴물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느라 더 긴장했던 영리한 영화였지요. 다 보고 나니 ‘괴물’은 행사에 고용된 알바생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으니까요.

 

동서고금 인류의 역사에 늘 존재했던 괴물들은 어느새 사회의 소수자들에 비견되고 그래서 그 고된 생존이 가엾기까지 합니다. 한번 만나지 못한 괴물과 귀신보다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가장 난폭하다고 느끼는 저는 더 그렇습니다.

 

특정 개인의 범죄도 그렇지만 가장 기막힌 것은 집중된 권력을 행사하는 다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짓들입니다. 영화 속 진짜 괴물 역시 - 실망스러울 만큼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긴 하지만 - 국가와 사회, 군사주의라는 시스템과 이익집단들입니다. 물론 희생되는 이들은 기획이나 이득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산만한 생각을 확 접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봅니다. 132명의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목차의 이름들을 보고 떠오르는 잘 아는 괴물들이 많으신가요? 저는 20명이 채 안되네요. 괴물이라 생각지 않았던 이름들에 좀 놀랐습니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 손오공, 사오정, 삼족오 등등. 괴물이냐 신이냐 영물이냐 하는 것은 모두 관점의 차이라는 듯합니다.



가루다, 와 같은 괴물은 이름에서도 불교 문화권에서 변형되었구나 짐작이 되네요. 동서고금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왔겠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괴물의 이름과 형태가 곧 동서문화의 교류의 기록이자 고증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들을 펼쳐 보니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괴물들도 꽤 됩니다. 목격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구술만으로 스케치한 것이라 이 역시 당연하겠지요. 저자가 담은 그림들이 마치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듯 섬세해서 재밌습니다.

 

상상의 존재에 대한 작품임에도 유래, 주된 활동 지역, 추정이지만 구체적인 크기와 종류와 생김새 등등 무척 정성스럽게 조사한 기록입니다. 물론 괴물을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어떤 스토리를 가졌는가 이지요. 활자도 영상도 없거나 부족했던 시절,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최대한 귀하게 상상하며 읽습니다.

 

의외로 신화와 전설을 모르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괴물 이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즘 유행인 시리즈물에 두억시니, 어둑시니, 그슨새, 강시, 구미호, 해치 등등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과 전설을 즐기는 이들은 어쩌면 늘 소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책은 그 점을 알고도 재미와 기록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겨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괴물 콘텐츠를 무척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반갑고 귀한 선물이겠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스토리텔링까지 쉽게 읽고 즐기고 배울 수 있는 좋고 편한 사전이기도 하니까요. 괴물이지만 무척 슬프고 아픈 사연들이 있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어릴 적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새롭게 읽습니다.

 

최애(?) 혹은 궁금하거나 끌리는 괴물이 있나요? 괴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아직 유효한가요? 새롭게 괴물을 창작한다면 어떤 형태의 어떤 스토리를 가진 존재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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