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나라의 여행기 - 어느 괴짜 작가가 사상 최악의 여행지에서 발견한 것들
애덤 플레처 지음, 남명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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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글 쓰며 사는 영국인 작가, 짐작보다 더 영국적(?)일 지도 모르겠다. 투덜거림도 수다스러움도 빈정거림도 내가 만나본 영국인들에 한 두 스푼씩 간을 더한 진한 맛의 유형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코드가 맞으면 신나게 웃을 수 있고 맞지 않으면 불편할 것이다.

 

여행에세이 중에 ‘가지 말라고’하는 글은 처음이다. 어쩌면 유일무이할 지도! 처음 책소개를 읽었을 땐 서유럽 백인 남성의 오만한 시선이면 어쩌나 불안했지만 궁금해서 읽어봐야 했다. 뭐가 되었든 다른 사람들 사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의 시야가 정말로 유치할 가능성은 낮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나는 세상의 투덜이들이 좋다.

 

“그를 방문하고 나니 내가 다수에 속해 태어난 것, 즉 제1세계에서 백인이자 이성애자이며 영어를 하는 남자면서 키가 큰 편에 속하는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운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목적이 없이 훌쩍 떠나는 일을 못하고 산 - 가까운 강릉은 그렇게 가기도 했지만 - 나는 자신안의 ‘구멍’을 발견하고 집을 나선다는 여행의 이유가 뭉클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관광지와 맛집 투어가 아니라 자학과도 같은 여정을 택한 것도 짠하다.

 

“정신은 무너지기 쉽다. 삶이란 무딘 정신이 남기는 트라우마다.”

 

20년도 더 전에 이라크전에 반대하며 인간방패가 되겠다고 그곳으로 향한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내 동생이면 절대 못 가게 말렸을 것이 분명한. 나는 딱 스스로 그은 경계 바로 앞까지만 선선히 이동하고 누가 붙잡지 않아도 선을 넘어본 적 없이 사는구나 새삼스럽게 잠시 그런 생각, …….

 

이도저도 째려보려하면 걱정이라곤 없이 안전하고 지루해서 자아를 찾아 나선 인간들의 몸부림 정도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각자의 결핍은 의외로 다양하고 몸을 움직이고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리고 경험을 글로 기록한다는 것은 용기와 끈기가 크게 요구되는 일이다.

 

“나는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내게 있어 기존 체제란 대부분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마음이 적이다. 나는 따분함을 잘못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따분함은 불가능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상황인데, 나는 그걸 일상용품인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

 

관광지를 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전과 전쟁, 부패와 분쟁, 시위와 검문, 방사능 노출 그리고 북한까지 간다. 원제는 Don't go there이다. 가지마라... 네, 가지 않을 겁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 함께 공부한 선배를 친구와 함께 만난 적이 있다. 둘 다 이탈리아인들이다. 막 사업을 시작했는데 한국어와 영어를 하고 가능하면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도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고 취업 의사를 물었다. 이탈리아와 한국 중 어디서 근무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한국 평양이라고…….

 

네... 어쩌면 부모 형제 친척 친구를 다시는 남한국South Korea에서 만나지도 못하고 입국도 못할 지도 모를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취업 제안이었다.

 

어제는 물리학자가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작가가 여행기가 이상한 것은 ‘이 세상이, 모든 곳이 이상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 인상적이다. 두 이야기 모두에 공감하고 동감하니 마음이 더 간질간질하다.

 

여전히 생각 속에서는... 인간이란 국가란 문명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이상도 구체적 이미지도 가이드도 있다고 여기지만 세상에 정답처럼 퍼즐 조각처럼 딱 맞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다 다르고 다 이상하다. 때론 다 미친 듯하고 다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란, 망상, 희망, 꿈, 신경증, 짝사랑, 억압된 트라우마, 부정, 솔직함, 유머, 진지함, 친절함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변덕의 집합체이다.”

 

세상은 거대한 책이기도 하고 여행은 그 책을 펼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내 방에서 책을 열어 여행을 떠나고 경험하고 배우고 무언가가 바뀌듯, 여행의 경험도 그러하다. 작가는 쓰기를 통해 다른 세상들을 창작하기도 하는 사람이니 다른 여행자와 다른 점이 거기 있기도 하다.

 

좀 더 삐딱하고 뾰족하고 날카롭고 불편할 것이란 기대했는지 순순하고 선선한 고백과도 같은 문장들에 빗장이 풀리듯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마치 같이 뒷담화하고 욕하려고 했는데 진솔한 얘기만 하게 된 경우랄까. 다행이다, 좋다.

 

“인생의 모든 것은 복용량에 달렸다. 나는 그간 엉뚱한 양을 복용해왔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도 낭만적인 신기루나 새것을 향한 방랑벽으로 달아나지 않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베를린에, 아네트에게, 작가로서의 내 직업에 전념하고 버틸 준비가 이제 되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바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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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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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에 출간된 <피버드림>으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차분하게 숨 막히는 공포스러운 이야기에 압도되었지요. 괴물이나 잔혹범죄라 무서운 게 아니라,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불통의 문제, 소통의 어려움을 간단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여주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미칠 듯했습니다.

 

정신에 뿌연 막이 덮여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딸의 안부에 집착하는 애정에 쓰리고 슬프기도 했지요. 미스털, 스릴러, 서스펜스 장르 작품을 꾸준히 읽는 편인데 서늘하고 스산하게 강렬한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독특한 그 느낌이 내내 남아 넷플릭스에서 영상화되었을 때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_P3eM4FltM

 

12월에 창비에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범상치 않을 것입니다. 소재는 다르지만 초연결 시대의 소통 혹은 경계의 무너짐이니 전혀 다른 문제의식도 아닌 듯합니다. 차분한데도 강렬하게 몰아치는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인형과 아이들... 귀엽고 사랑스러운 장면일수도 있지만 그럴 리가 없지요. 특히 인형과 아기 혹은 아이들로 장난치는(?) 작품들에 치를 떠는, 무서워 못 보는 저는 실은 표지에서부터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읽습니다. 원제 ‘켄투키Kentukis’가 토끼 인형이 담긴 상자에 쓰여 있네요.

 

“각기 다른 동물 모습을 한 반려로봇 - 장난감 ‘켄투키’가 전세계 사용자들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켄투키의 특징은, 그것을 ‘소유하는’사람과 앱을 통해 ‘조종하는’ 사람이 다르며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모든 매칭은 서버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소유자와 사용자(조종자)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의 일상과 세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라진다. 핵심은 켄투키의 눈이 ‘카메라’라는 것이다. 사용자는 그 눈을 통해 소유자의 삶을 지켜볼 수 있다.”

 

매일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삶에 대해 이쯤해서 한번 여러모로 생각 좀 해보자, 하고 작정하고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읽힙니다.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재미없이 그런 건 아니고 은근하지만 넓게 작품의 전반에 퍼져 있지요.

 

현실의 우리가 겪는 모든 삶의 고비들, 못마땅한 주어진 환경, 생존, 폭력, 이별, 슬픔, 사별, 아픔, 애정과 관심에의 갈구, 그리움, 후회, 돈, 범죄... 전 세계인들의 결핍과 욕망을 노리는 상품과 사업은 네트워킹이라는 통로가 확보되면 수익이 보장되는 탄탄한 판로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켄투키 사용자(조종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도 내 칸투키를 포기할 수 없는 부모, 칸투키 소유자의 삶에 익명으로 존재하는 사용자에 완전하게 동일화되어 소유자를 상실하고 자살하는 이, 현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화면 속 세계에 정서적으로 함몰된 사용자……. 현실 도피처가 책과 영화인 SNS 이용자로서 긴장과 불안 없이 읽기 어렵습니다.

 

연령이 높은 부모님들이 혼자 사시는 게 불안해서 CCTV를 설치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의도는 선하고 실제로 식사와 약 등을 챙겨 드리기도 하는 순작용이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관리가 잘 된다면 별 문제가 안 되겠지요.

 

네트워킹도 심지어 작품 속 켄투키도 그런 방식으로도 사용될 수 있겠지요. 저자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이 기술의 태생이 인류 복지를 위한 국제기구의 협력에서 탄생하고 보급된 것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에도 있겠지요. 목적도 의도도 다르니까요.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고 곧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메타버스의 세계는 어떨까요. 소비와 삶의 선택하는 판단력과 힘을 어떻게 잘 길러야하나... 힘겨운 기분이 듭니다. 진화하지 않는 인간의 뇌, 근절되지 않는 폭력과 범죄, 반성하지 않는 소비와 수익 숭배, 안전망이 부족한 프라이버시, 비대면의 방식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는 판데믹…….

 

켄투키에 심어준 카메라보다 문명을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고 통렬하게 고발하고 경고하는 저자와 같은 작가가 있으니... 심연을 뒤흔드는 공포와 충격을 통해서라도 문제적 상황을 깨부수는 이런 기회를 희망이라 믿어 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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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에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7
우다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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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영 작가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표지부터 내용까지 여러 모로 홀려서 내 문해력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며칠을 필사하며 읽은 행복한 기억이 있다. 함께 읽었던 친구가 <북해에서>를 먼저 읽고 분명 좋을 거라 선물해 주었다.

 

일단... 내게 익숙한 핀소설 표지가 아니라 무척 놀랐다. 이동기 교수의 아토마우스! 내가 오독하고 오해하는 우다영 작가의 작품과 찰떡 조합인 듯. 익숙하지만 낯설고 선입견과 편견을 뒤흔드는 두 예술 작품의 콜라보 같다는 생각.


북해는 내가 좀 오래 보았지, 대서양 보고 흘린 눈물이 적지 않다, 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작품의 북해는 창작된 가상의 세계이다. 현실의 북쪽이 사는 일보다 죽는 일에 더 가까운, 고단한 삶과 전투를 상징하듯 이 작품의 고민도 비슷한 결이다.

 

여섯 살 때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엄청 많이 울었다. 상례 때보다 이때 더 아프고 슬펐던 듯하다. 잊고 살다가 수명의 반환점을 대충 돌았다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되자 다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울림이 커진다.

 

슬프고 허무하고 허탈하다기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번거로웠다. 간단한 것들부터 이런저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는 건 아니지만,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종종 있다.

 

“믿기지 않아. 하지만 모두 진짜 일어난 일이야.”

 

“초석을 아무리 잘 쌓더라도 삐끗하면 잘못되는 게 생이다.”

 

뭘 애쓰고 사는 일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일이 무색하게 삶이 중단되는 이들을 보면, 세상을 영리하게 사는 방법은 따로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개체는 사라지고 유전자만 남길 수 있는 생물학적 조건화에 맞춰서 재빨리 번식을 해두고, 의미라곤 없는 생의 시간을 종교든 원칙이든 고민과 갈등 없이 뭐라도 믿으며 평온하게 보내는 것.

 

예측할 수 없는, 소중한 것도 없는, 인간의 생명 따위 관심도 없는 잔인한 세상의 진실을 밝히고 메울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 짓쳐드는 허무에 붙잡히지 않으려 무언가에 몰입하며 각자의 의미를 찾아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물줄기의 근원과 나의 기원.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어 언제나 귓가에 어려 있는 자장가를 소리 없는 입술로 따라 부른다.”

 

우다영 작가의 작품, 분위기, 문장들에 왜 홀렸는지 다시 기억이 난다.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무시무시한 진실을 폭력적으로 강요받지 않을 수 있어서이다. 작가는 상처가 덜할 수 있는 방법들로 길안내를 해준다. 사유 대신 감각을, 현실감 대신 몽환을, 다큐 대신 이야기를.

 

가장 생존에 최적화된 유전자들을 물려받고도 언제 왜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는 생명체들과 삶에 대해 오래 고민한 작가가 전하는 위로여도 격려여도 좋을, 아직 살아있는 몸의 온기처럼 읽힌다.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면 어떠냐고, 무수한 죽음 가운데 좀 더 살아 있는 것이 왜 무의미하기만 할 뿐이냐고.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끝없는 고행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태도에 있어서 나선과 중위는 닮아 있다. 삶이 형벌처럼 부여한 ‘무의미의 의미’를 두려워할지언정 그 존재를 모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 있다. (...) <북해에서>는 그 기묘함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도 모래알처럼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태도에 사로잡혀 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으리만치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고매하고 또 숭고한 태도에.”



나이가 들면 어리석어지기만 한다는 데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찾고 싶어 괴로운 시기가 끝나고 의미가 가진 수명life of meaning을 더 궁금해하며 늙어가니 그것만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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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오경

미림

북해의 왕

붉은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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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양자역학, 창발하는 우주, 생명, 의미
박권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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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에 정해진 구체적인 혹은 권장되는 내용이 있을까. 나는 ‘교양이란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과학에서 대해서도 과학과 과학서의 대중적 필요와 역할은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필요한 사안에는 사실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태도가 상식이 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얼마나 될까.

 

대중적 호감을 얻지 못한 대표적인 학문들 중 하나가 물리학임에도 불구하고 관련 대중과학서들은 적지 않게 출간되고 심지어 스타물리학자저자나 강사들도 많다. 부분적으로는 SF 장르로 구분되는 문학과 영화에 힘입은 바도 있을 것이다 - 엄청 좋아하는 <블레이드 러너>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언급되어 행복!

 

아주 재밌고 기발한 과학적 사실들에 방점을 둔 책들도 있고, 교재에 가까운 학구적이고 충실한 내용들로 채워진, 이 책에서처럼 수식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은 부류도 있다. 더구나 아무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양자역학을 다루는 책들도 다수 출간된다.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도 있고 도대체 무슨 의도냐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 이미 양자역학서로 인기를 얻은 리처드 파인만의 저서들에 대해서도 대체로 이 이런 반응들을 보여 왔다. 저자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까지 읽으면 자신도 모른다면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책으로 쓰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더 혼란스러울 지도 모른다. 저자가 밝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자연 자체가 터무니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자연과학, 여기서는 양자역학이 기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대상인 자연이 ‘그렇기 때문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 두 가지만 봐도 얼마나 혼란스러운 사실인지 대략 느낌이 온다.

 

- 관측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

 

: 관측할 때마다 바뀐다. 관측자가 개입하지 않은 독립된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논쟁 중).

 

- 위치와 운동량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 이 대목에서 물리학을 배우던 나는 이런 것도 과학이야, 하고 혼란에 빠졌고, 더 이전 아인슈타인은 일갈을 던졌다. “자연은(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 책의 구성은 파동, 원자, 빛, 힘, 물질, 시간, 존재의 7개로 나뉘어 있고, 각각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물리법칙들과 수식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리학적인 비유 역시 주저함이 없이 사용된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열역학제2법칙 등을 수식으로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분들은 미리 마음을 다잡으시기 바란다.

 

읽으면서 이해는 하지만 심정적으로 불편한 제목은 정확히 어떤 함의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했고,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지식과 문해력이 약한 탓이 크지만, 자연 상태나 양자역학처럼 익숙하고도 새로운, 당연하고도 뜻밖인, 사실과 논의들이 복기되기도 하고 새롭게 의문스럽기도 하다. 무척 재밌었다.

 

관찰자의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외부의 객관세계는 존재하는가,

우리가 모를 뿐 세상 만물의 만사는 이미 결정된 것인가,

인간이 가졌다고 믿는 혹은 믿고 싶은 자유의지는 존재할 시공간이 여지가 있는 것인가.

가능성이 있다면 우연의 개입 여지가 있다면...

인간으로서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꺼이 개입할 것인가,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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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꿈꾼 해월 최시형 ㅣ 청소년평전 32
조중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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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civilisation은 도시city에서 유래한 단어이자 개념이고, 야만savage는 숲cavage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문명화된 생활방식으로 인류는 야만을 퇴치하며 살았고 그 결과 지배종 치고는 이른 시기에 멸종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통계 상 3관왕을 달성했는데 군사밀도 1위, 원전(핵발전소)밀도 1위, 기온상승률 1위를 차지했다. 극지방과 만년설은 자동차 유리창처럼 금이 가고 부서지고 녹고 있는데 우리는 놀랍도록 태연하게 잘 살고 있다.

 

<해월 최시형> 책을 두고 이런 시작을 하는 것은 동학사상을 처음 만난 것이 20여 년 전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도 생명사상도 동학사상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 얼마 전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도 백낙청 선생님과의 강연과 담론도 애는 썼지만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청소년평전이라 아주 친절하다. 스토리텔링 방식이라 신격화되지 않은 위인전을 오랜만에 읽으며 역사를 배우는 느낌이다. 물론 역사의 세세하고 가감 없는 실증들은 다소 끔찍한 시절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적을 줄이고 다시 서로를 죽이는 문명이라 불리는 야만의 시대. 외세의 위협보다 신분제 지키는데 방점을 찍고 일본군과 손을 잡고 자신의 백성을 죽이는 것을 택한 왕조.

 

“삶의 고통은 어디서 온 것이며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형식적으로나마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정한 사회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당연한 사회는 당연히 다르다. 차별의 근원이 불분명하면 의문과 고민은 커지게 마련이다. 역할이 정해져서 출생한 집단생활처럼 주어진 역할만 하고 나답게 주체성을 가지고 살수 없는 현실은 중앙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표면으로 부상했다.

 

사상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동학 역시 개인적인 의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고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과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가이드를 제시하는 역할을 했으니 교세는 백만에 이르고 이는 집권세력에게 확실한 위협으로 인지된다.

 

각 종교가 비슷한 단계를 거치는 것처럼 동학 역시 구슬로 전해오던 가르침들을 정리해서 경전을 만든다. 읽으려 노력했으나 내 문해력으로 완독이 어려웠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각각 1880년 5월 1881년 7월에 출간된다.

 

다음 달 임오군란을 비롯해 사회는 견제 받지 않는 부정부패로 원성이 자자한데, 왕권은 정상적인 외교라기보다는 어떤 외세와 손을 잡는 것이 권력 유지에 이득이 되는지를 계산하다 이용만 당하는 중이었고 나아의 위기는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붕괴 직전의 권위를 잃은 왕권, 파탄에 이른 경제, 사라진 사회 기강, 외세에 맞설 군대도 무기도 없어 방어 불능……. 전 세계적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계급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내 나라 내 국토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저항하는 역사는 흔하지 않다. 2000번이 넘는 침략으로 함께 맞서지 않으며 다 죽는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체화된 것인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민’이 일어선 오랜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해월 최시형 선생 역시 교세가 가장 확장된 시절임에도 스승 수운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학의 앞날을 인정받는 것보다 국가의 위기를 막아내고 외세를 물리치는 일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그 와중에 동학이 나라 전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감당할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런 뜻과 희생에 대한 대접이 어떠했을지 알게 되는 역사적 장면이 난망하다.

 

많은 사상가들이 걸어간 유사한 그 길로 해월 최시형도 떠났다. 육체는 처형되고 뜻은 남았다. 동학혁명으로 이후 3.1운동으로 항일의 정신의 기저에 독립운동의 바탕에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민주화운동으로 그렇게 이어져왔다. 그렇게 해월 사상은 민본으로의 전환과 변환의 시기를 불러온 계기로 해석된다.

 

“해월 최시형의 진심은 무엇일까? 그의 평전을 쓰는 동안 떠나지 않았던 의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삶이란 자유와 평등과 주체적인 삶을 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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