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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에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7
우다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0월
평점 :
우다영 작가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표지부터 내용까지 여러 모로 홀려서 내 문해력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며칠을 필사하며 읽은 행복한 기억이 있다. 함께 읽었던 친구가 <북해에서>를 먼저 읽고 분명 좋을 거라 선물해 주었다.
일단... 내게 익숙한 핀소설 표지가 아니라 무척 놀랐다. 이동기 교수의 아토마우스! 내가 오독하고 오해하는 우다영 작가의 작품과 찰떡 조합인 듯. 익숙하지만 낯설고 선입견과 편견을 뒤흔드는 두 예술 작품의 콜라보 같다는 생각.
북해는 내가 좀 오래 보았지, 대서양 보고 흘린 눈물이 적지 않다, 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 작품의 북해는 창작된 가상의 세계이다. 현실의 북쪽이 사는 일보다 죽는 일에 더 가까운, 고단한 삶과 전투를 상징하듯 이 작품의 고민도 비슷한 결이다.
여섯 살 때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엄청 많이 울었다. 상례 때보다 이때 더 아프고 슬펐던 듯하다. 잊고 살다가 수명의 반환점을 대충 돌았다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되자 다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울림이 커진다.
슬프고 허무하고 허탈하다기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번거로웠다. 간단한 것들부터 이런저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는 건 아니지만,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종종 있다.
“믿기지 않아. 하지만 모두 진짜 일어난 일이야.”
“초석을 아무리 잘 쌓더라도 삐끗하면 잘못되는 게 생이다.”
뭘 애쓰고 사는 일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일이 무색하게 삶이 중단되는 이들을 보면, 세상을 영리하게 사는 방법은 따로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개체는 사라지고 유전자만 남길 수 있는 생물학적 조건화에 맞춰서 재빨리 번식을 해두고, 의미라곤 없는 생의 시간을 종교든 원칙이든 고민과 갈등 없이 뭐라도 믿으며 평온하게 보내는 것.
예측할 수 없는, 소중한 것도 없는, 인간의 생명 따위 관심도 없는 잔인한 세상의 진실을 밝히고 메울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 짓쳐드는 허무에 붙잡히지 않으려 무언가에 몰입하며 각자의 의미를 찾아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물줄기의 근원과 나의 기원.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어 언제나 귓가에 어려 있는 자장가를 소리 없는 입술로 따라 부른다.”
우다영 작가의 작품, 분위기, 문장들에 왜 홀렸는지 다시 기억이 난다. 정면으로 마주하기에 무시무시한 진실을 폭력적으로 강요받지 않을 수 있어서이다. 작가는 상처가 덜할 수 있는 방법들로 길안내를 해준다. 사유 대신 감각을, 현실감 대신 몽환을, 다큐 대신 이야기를.
가장 생존에 최적화된 유전자들을 물려받고도 언제 왜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알 수 없는 생명체들과 삶에 대해 오래 고민한 작가가 전하는 위로여도 격려여도 좋을, 아직 살아있는 몸의 온기처럼 읽힌다.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면 어떠냐고, 무수한 죽음 가운데 좀 더 살아 있는 것이 왜 무의미하기만 할 뿐이냐고.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끝없는 고행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태도에 있어서 나선과 중위는 닮아 있다. 삶이 형벌처럼 부여한 ‘무의미의 의미’를 두려워할지언정 그 존재를 모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 있다. (...) <북해에서>는 그 기묘함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으면서도 모래알처럼 계속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태도에 사로잡혀 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으리만치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고매하고 또 숭고한 태도에.”
나이가 들면 어리석어지기만 한다는 데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찾고 싶어 괴로운 시기가 끝나고 의미가 가진 수명life of meaning을 더 궁금해하며 늙어가니 그것만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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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오경
미림
북해의 왕
붉은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