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발견 (양장)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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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쪽이라는 분량만큼 대단한 것이, 다루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이런 구상 자체를 했다는 것이 저자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이제껏 등장하지 않은 신비한 문양을 갖춘 직조물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코가 빠지고 비뚤어지고 색조차 흐린 품질이 떨어지는 천 조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어쨌든 놀랍고 부러웠다


소개에서 설명한 대로이 책이 다루는 시대는 1700부터 현재까지 4세기에 이른다과학과 문학의 문턱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성뿐만이 아니라 비평이든 역사이든 결국은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혼자 읽을 자신이 없어 지인들에게 랜선 책모임을 처음으로 제안했다전공과 관심사가 최대한 다양해야 뭐라도 붙여볼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나올 듯했다



표지를 보는데 첫 모임 시간을 다 썼다내 눈에는 블랙홀의 구조를 도표로 옮겨 계산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였는데기하심리학자의 작품이었다그런 분야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을 형상화한 도표라니!. 의식의 출발점동물의 감각적 의식 그리고 의식의 정점인 초월성의 단계별 표현이다빅뱅과 진화와 의식Consciousness의 출현Emergence처럼 들리기도 한다자신의 틀로만 이해되는 바를 어쩔 수 없다.

 

4명이 하는 랜선모임 비대면임에도 5인 미만 -에서 무려 3명이 공통으로 지적한 내용은 요하네스 케플러에서 시작해서 레이첼 카슨에서 맺은 구성이다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시절 인간이 모든 지성적 억지와 박해를 무릅쓰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고 발견하고 연구하여 인간 세상의 테두리를 넓히던 시절로부터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유일한 생존공간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 다행스럽게도 과학기술을 활용한 산업정책의 위험성을 깨닫고 경고하는 통찰로 이어지는 과정이 지극히 흥미롭다심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먼저 만나고 더 가까운 케플러의 발제와 전공을 바꾸고 인생을 전환한 레이첼 카슨 두 인물의 발제를 모두 떠맡아서 강조하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유명한 이 두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인물들이며 메시지들을 전해준 그 사이의 모든 이들이 있다방대한 분량과 분야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이유는 등장하는 이들 중 8명을 만나봤다는 점도 있었는데나는 주로 그들이 남긴 지식과 저서들을 읽은 정도라서이번에 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시대상에 촉발되고 후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에 집중해서 다시 읽어본 시간이 참 좋았다.


 대체로 남의 성애나 성정체성에 별 관심이 없이 살지만 편합니다관심이 적으면 편견도 적습니다특별히 저자가 마련해 준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가 없진 않았다전면적인 존재의 교류와도 같은 관계는 성별 불문 누가 되었든 부러운 일이다그런 의미로 이 책은 전기의 형식에도 상당히 충실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면사상가란 이토록 대담한 존재들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평생을 시대와 불화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인가좌절과 초월도 거룩하게 아름답다내용과 태도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별스럽게 대담하고평면에서 돌출된 입체처럼 이런 이들을 볼 때마다 진화가 신비롭고 인간에게 이런 복잡하고 복합적인 의식Consiousness이 출현한 이유와 쓰임이 무엇일까 다시 궁금해진다.

 

20여 년 전부터 궁금했는데막상 쓴 학기말 논문 주제는 동물의 의식Animal Consiousness이었다왜 그랬을까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왜 개를 먹느냐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은 침팬지이다왜냐하면 개는 동물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친밀하고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등등처음 본 순간부터 만날 때마다 질문을 하듯 원망과 애원을 하던 제인 구달 선생에게 시달려 그래내가 한 번 제대로 배워 보마!” 오기와 결심으로 그랬던 것일 수도왜 그러셨어요심정은 이해하지만 개를 맛있게 먹지 않는 입장으로 할 말이 별로 없기도 했답니다그래도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어쨌든 나는 자꾸만 물리학의 용어들이 이해와 설명에 튀어 나와 지인들에게 저항을 한껏 받으며 함께 읽는 책모임을 해나갔다지금의 우리가 때때로 혹은 항시 발목을 잡아당기는 일상과 삶과 의무와 책임과 불완전한 사회체와 현실적 제약들에 마치 중력과 관성의 법칙이 예외 없이 적용되어 옴짝달싹못하는 기분으로 애를 쓰고 비틀거리고 주저앉고 드러눕는 것처럼이들 역시 그렇게 살았고그런 한편 또 우리처럼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끝까지 발을 옮겨보려 했던 애틋한 기록들이다그렇게 읽혔다


장점은 이런 기록들이 내가 쓰는 일기 정도의 문장력이 아니라 불가리아 출신의 작가 처음 만남 마리아 포포바의 재능으로 탄탄하고도 창의적으로 쓰였다는 점이다읽는 중간에 등장인물에 대한 감탄 말고도 저자의 방대한 관심사와 이해력에 여러 번 감탄했다문화 비평가란 전공 수준의 이해 분야가 적어도 10여 개는 되어야 가능한 직업인가 보다.

 

오래 좋아했던 이는 더 좋아졌고새롭게 좋아하게 된 이들도 생겼다내게는 설레고 화려하고 실속도 있는 선물 같은 책이다덕분에 감사히 잘 읽었지만 번역은 해석과 문체에서 생경하고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다


원제는 Figuring이라는 더욱 도발적이고 담대한 제목이고 요약본과 해석본이 나와 있을 정도이니 내용의 풍부함과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영어책으로 책모임을 했으면 좋겠는데 극강의 도전을 요구했던 전공책들 읽어보신 경험들 있으니이 책은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원하시는 분들은 참여 의사를 미리 신청해 주십시오발표숙제비난절교 등등 없으며 지성을 지닌 사람들끼리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본문을 인용해본다읽고 느낀 점들 간략히 나누면 멋질 듯하다


....................


1.


아름다운 삶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성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운명의 차이는 천공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의 문화의 작용에 따른 성별 구조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잊곤 하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해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낼 때 우리가 지닌 가능성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중략이는 인간의 본성에 있습니다낭만으로 시작해서 현실로 지어나가는 능력이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최초로 인간의 자만심에 도전장을 내민 위대한 사상이다그 후 몇 세기에 걸쳐 세계 질서가 여러 차례 새롭게 편성되는 동안 인간의 자만심에 대한 도전은 진화론부터 시민권동성결혼까지 수없이 많은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이 모든 도전에 사회는 케플러의 고향 주민들이 보인 것과 비슷한 수준의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우주의중심이든 권력 구조의 중심이든중심에 있는 것은 그 대가로 진실을 희생할지언정 계속해서 중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삶에 별빛을 섞으십시오그러면 하찮은 일에 마음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라플라스를 번역하고, <천계의 구조>를 발표한 이 여성은 최초의 과학자이다윌리엄 휴얼은 당시 흔하게 사용된 과학의 남자man of science라는 표현을 적용할 수 없어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처음으로 고안해냈다.

 

대화에 참가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규칙만이 존재했다반드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별의 주요 구성 성분이 수소가스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수소를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의 지위에 올렸다.”

 

천문대 계산자로 합류한 지 10년 만에 자신이 직접 분류한 1만 개 별의 분포를 기록한 400쪽에 이르는 일람표를 발표했다.”

 

그녀의 계산 결과는 훗날 우주가 팽창한다는 에드윈 허블Edwin Hublle의 법칙을 증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2.

 

이 세계에서 남자 기사도는 소멸되었지만 여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사로서 편력을 이어나간다세르반테스가 좀 더 위대했더라면 돈키호테의 Don을 Dona로 썼을 텐데.”

 

“‘파랗다라는 것은 파란 양말bluestocking에서 따온 표현으로 당시 지적인 여성정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 여성성과 가정을 희생했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호스머의 걸작은 처음 런던의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에 전시되었다이곳에 여자가 학생으로 입학하기까지는 3년을 기다려야 한다중략이것에 여자가 교수로 입성하게 된 것은 2011설립된 지 243년 만의 일이다.”

 

누구를 희생해야 한다면 누구도 완전하게 자유롭고 고귀해질 수 없다중략하나의 창조적인 기운하나의 쉴 새 없는 폭로를 이어가도록 하자중략소외된 집단은 자신만의 노력으로는 사회의 중심으로 이동할 수 없다이것이 힘의 역설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힘과 특권에 가까이 있는같은 대의를 지닌 동류 집단이 이끌어주는 힘이 필요하다.”

 

어떤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인식하면서도 그 순간의 풍부함과 달콤함이 흐려지지 않게 하려면그 순간을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의 충만함으로 순수하게 누리려면 얼마나 마음이 단단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시대에 메두사를 조각한다는 것은 선견지명이 있는 대담한 선택으로고대부터 여자를 보로해주지 않는 사법 제도의 끔찍한 결함과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를 고발하는 행동이었다모든 것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문화는 사실상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금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니 무시무시할 정도로 여자다운 기분이 들어왜 이렇게 거룩한 기분이 드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네.”

 

3.

 

재능이란애정의 연소이다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성이 아니라 헌신에서 비롯되는 고양감이다이를 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하여 우리는 재능을 경험한다.”

 

삶이란 다른 삶과 얽힐 수밖에 없으며그 삶의 직물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만 인생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을 구할 수 있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독자라면 정신의 바벨탑에 듀이 십진분류법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미로 같이 복잡한 서가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에 읽은 방대하고 수많은 책을 덮고 있는 티끌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토끼처럼 생각이 우리 앞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이 집의 한쪽에 종이 공장을 만들 겁니다그리고 내 책상 위로 풀스캡판 크기의 종이가 끊임없이 풀려나오게 만드는 겁니다그리고 그 끝없이 펼쳐지는 종이 위에 수천 가지수만 가지수억 가지 생각을 적을 겁니다전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말이에요.”

 

우리는 평생 우리 존재가 어디에서 끝나는지나머지 세계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고자 애를 쓰며 살아간다우리는 존재의 동시성에서 삶의 정지 화면을 포착하기 위해 영원조화선형성이라는 환상에고정된 자아와 이해의 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인생이라는 환상에 기댄다그러면서 줄곧 우리는 우연을 선택이라 착각한다어떤 사물에 붙인 이름과 형식을 그 사물자체라 착각한다기록을 역사라 착각한다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판단과 우연의 난파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에 불과한데도.”

 

허공에 성을 지어보지 못한 소년은 절대 땅 위에서도 성을 짓지 않게 됩니다중략꿈과 실천 그 어느 쪽도 희생하길 거부하고꿈꾸는 자와 실천하는 자로서 자신을 동등하게 엮어 존재의 충만함을 성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중략또한 진실과 아름다움을 나누길 거부하면서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의미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한 세기 반이 지난 후 어슐러 K. 르 귄(SF 소설의 대가)은 말한다˝말은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바꾼다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모두 변화시킨다말은 에너지를 전하고 되받으며 증폭시킨다말은 이해 혹은 감정을 전하고 되받으며 증폭시킨다.˝ 초월주의 운동에서 지고의 지성적 도구로 대화를 공식 채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중략자유롭게 주고받는 말의 전류로 여성해방운동의 힘을 충전시킨 것도 의 공이다.”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곧 상상력을 펼친다는 뜻이다친숙한 것의 한계를 뛰어넘고새로운 질서를 머릿속에 그리며새로운 질서 안에서 얻게 될 것이 잃어버릴 것이 주는 잘못된 위안을 뒤덮고도 남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일이다.”


4.

 

우리 안의 모든 창조적인 힘과 수학적 계산과 사납게 날뛰는 사랑의 감정은 수천년에 걸쳐 진화해온 신경조직을 따라 1초에 24미터의 속도로 진동한다이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정신의 작용 또한 일련의 전기 자극일 뿐이다.”

 

공시성이란 외부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과 관찰자 내면에서 일어난 상황의 유사성과 비인과관계를 정리하는 체계이다어떤 사건을 경험한 관찰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상황을 기반으로 자신과 그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는다즉 내면의 현실과 외부의 현실이 만나는 접점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진정한 부는 지구의 자원입니다바로 흙광물야생생물들입니다미래의 세대를 위해 이 자원을 보존해야 하는 한편 이 자원을 현재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려면 폭넓은 연구에 기반을 두고 정교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계획이 필요합니다자연 자원의 운용이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됩니다.”

 

반쪽짜리 진실의 안정제를 먹인다중략거짓된 확신을 어떻게든 끝장내야 한다입에 맞지 않는 불쾌한 진실에 대한 사탕발림을 끝장내야 한다중략시간과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미칠 결과를 진지하게 고찰하면서 단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기업 세력들의 고질적인 질병을 비판했다.”

 

권력이 부패할 때 시인은 정화에 나섭니다시와 과학을 서로 나누어 생각하기를 거부하며 살아온 카슨은 자신의 두 가지 재능을 결합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권력의 정화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재능으로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나는 재능으로 세계에 속한다는 실존적인 상태가 인생을 실현하는데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작디작은 세계를 아득히 먼 곳에서 찍은 이 사진보다 인간의 자만심과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훌륭한 증거도 없을 것이다나는 이 사진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해야 한다는 책임을이 창백한 푸른 점을 보존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책임을 다짐한다이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신비와 현실에 우리가 좀 더 분명하게 주의를 기울일수록 파괴를 향한 인류의 성향이 약화될 것입니다중략경탄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은 건강한 감정입니다이 감정은 파괴에 대한 욕망과 나란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아주 오래된 시간을 배경 삼아 마치 깜박이는 찰나 같은 우리 일생을 생각하니 불현 듯 우리 존재의 덧없음이 우리를 아프게 찌른다우리는 혼돈과 엔트로피가 혼재하는 우주의 강물 위에서 아주 잠깐 섬을 이루었다가 다시 비존재를 향해 영원히 떠내려가는 존재일 뿐이다.”

 

나도 죽으리라당신도 죽으리라우주적 관점에서 아주 잠깐 자아의 그림자 주위로 뭉쳤던 원자들은 우리를 만들어 낸 바다로 돌아가게 되리라우리 중에 살아남게 될 것은 기슭 없는 씨앗과 우주먼지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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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알래스카
안나 볼츠 지음,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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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도 소재도 주제도 말랑한 책이 아니다발랄하고 간결한 제목에 짐작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총격을 수반한 끔찍한 강도 사건으로 망가진 부모의 상황주인공 파커가 갖게 된 세상과 남자 일반에 대한 증오심뇌전증이라는 질병으로 인해 발작에 대한 불안과 갖가지 안전장치로 살아가는 스벤이별하게 된 반려견학교생활사이버폭력사이버윤리인권 그리고 우정심리적 문제들과 사회적 문제들이 골고루 등장하며 청소년의 삶을 진지하고 다각적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한 가지만 해도 벅찰 문제들을 한 데 아우르는 작가의 역량에 수상 이력과 찬사에 납득하게 된다.



새 학기새로운 반낯선 사람들과의 첫 만남그 시작부터 긴장되는 분위기가 만만치 않다들키고 싶지 않은 뭐라도 낯선 이들에게 공개되는 일은 연령을 불문하고 끔찍한 악몽과 같은 일이다하물며……


위에서 언급했듯이 쉬운 거 하나 없는 환경과 조건 속에서 살아온 파커와 스벤의 시선들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니농도가 무척 짙고 앞으로의 한 걸음이 무겁다.

 

아이들은 어른들도 세상도 못 마땅한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불안한 심리가 강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아이들의 심리가 묘사된 글을 읽을 때마다시동이 멈춘 차를 밀어서 이동시켜야할 듯 마음이 힘겨웠다


언제나 효과가 별로라고 시큰둥해하긴 했지만꾸준히 묵묵히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심리치료 등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시행하는 분들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어렵고 효과가 적고 느린 것이 당연하다.

 

깊이 침잠한 듯한 감정적인 내용들이 많지만독자는 일부러라도 시선을 띄워서 이들을 객관적으로 끝까지 바라보며 읽어야할 의무가 느껴지기도 했다상처투성이라는 공통점만 빼면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눈은 전혀 다른 아이들이 교차 등장하기 때문이다그들의 눈에 당연히 세상은 비뚤어지고 기울어져 있다.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일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도 아니지만자신들이 처한 조건들을 모두 자신의 치부라고 여기는 아이들움츠려든 마음의 모양이 떠올라 가만 토닥여 주고 싶었다일부러 만든 일이 아니라지만어른들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아이들이 무겁고 오래 지고 가는 모습은 참 보기 힘겨운 장면이다


그러니 이런 뾰족한 아이들에게 깊은 관계를 맺고 애정을 느끼는 반려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원한 공기를 몸 속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처럼 참 다행한 일이고 어른이인간이 하지 못한 효과적인 치유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현실에서도.

 

반려동물은 인간을 분석하고 비교하고 평가하지 않으니까그 관계 속에서만은 파커도 스벤도 인간들의 빠른 평가를 내리는 시선들 속에서부터 자유롭게 맘껏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으니까.

 

안녕알래스카우리 인간이 맘껏 사랑할 수 있게 먼저 사랑해줘서끝까지 사랑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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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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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처음 만나는 아르헨티나 작가의 국내 첫 출간작이다주요 등장인물은 카를라의 아들인 다비드와 니나의 엄마 아만다이고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상황 설명이나 묘사는 없다.



대강 짐작만 해보면아름답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휴식이 되는 자연이란 없다는 익숙한 환상과 오해를 역전시키는 배경은 있다이유는 모르지만 도시에 살다 시골로 온 모녀가 죽게 되는 이유가 벌레인 듯하다잘 몰라서 주의하지 못했던 작은 상처가 치명적인 불행으로 치닫는 일다비들의 엄마 카를라도 도시에서 왔고 자식을 잃었다.

 

카를라에게 일어난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나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거든중략그 애한테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계산하는 중이야나는 그걸 구조 거리라고 불러딸아이와 나를 갈라놓는 그 가변적인 거리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가변적인 구조 거리라는 개념이 낯설어서 원제를 찾아보았다Fever Dream (Samanta Schweblin novel), a 2017 English translation of Distancia de rescate. 그러니까 이 책의 스페인어 원작의 원래 제목이 Distancia de rescate, 즉 “Distance to rescue”이다일반적으로 “rescue distance”란 표현을 사용하니까 이걸 한국어로 번역하면 구조 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아만다는 닥칠지 모를 미래의 재난을 기다리고 있는데나는 읽으면서 그 재난 조차 피버 드림즉 고열로 인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인지가 헷갈렸다어쨌든 그는 죽어가면서도 딸인 니나를 구하러 갈 생각에 사로 잡혀 거리를 계산하는 중이다시골 병원에 누워 공황 상태에 빠진 아만다는 다비드에게 계속해서 니나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이 긴장과 불안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다.

 

챕터도 섹션도 없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아만다의 시점이 이어지는 책어제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단편을 잃고 어렵지도 두렵지도 않다고 했는데다시 입장을 바꿔야할 것 같다이 의식의 흐름은 강박이 느껴질 만큼 강렬하고 밀도가 높고 계속 읽게 되는 힘은 있지만 이해가 쉽지 않다그 점에서 피버 드림이란 제목이 뜻밖에 위안이 된다독자인 나 역시 열병에 시달려 허둥대는 입장이라 변명하고 싶어지니까.

 

낯선 곳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구할 수 있는 거리에 자신의 열에 들뜬 의식이라도 놓아두려는 끊임없이 집착하는 부모의 모습은 원인도 배경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마음이 아팠다내 자식은 내가 구할 수 있다는 혹은 구하고 싶다는그런 희망조차 판타지이고 현실은 스릴러와 호러의 혼재라고 냉정하게 누군가 평한다면 완전히 반박할 말은 없다하지만 나는 아픈 마음을 다해 구조 거리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모든 부모들의 열병을 치르는 것과도 같은 힘겨운 삶을 늘 응원할 것이다.

 

오독인지이해 부족인지 모르겠지만독자로서 어떤 식으로든 감정에 빠졌다 헤어 나오게 하는 힘만으로도 문학으로서 만난 기쁨과 감사함은 언제나 있다첫 만남이라 하더라도 구성과 서사가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다.

 

넷플릭스에서 스페인어 원제로 방영예정이라고 하니마테차를 따끈하게 혹은 시원하게 마시며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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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혁명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70
최윤혜 지음 / 시공주니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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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작가 소개를 읽고 자꾸만 감동을 먹고 폭소를 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분이다.

팬심이 막 생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다절체절명심각한 사안이다.

소개에 방귀를 소재로 한 사회 풍자라고 해서 척척을 하는 군상들을 놀리고 골리는 이야기인가 했는데 그보다 더 심각하다.

 

방귀를 금지하는 사회법이 시행되었다



방귀를 뀌면 경찰들이 왕집게로 엉덩이를 집어 체포한다가만... 생각해보면 이 법만큼 웃기지도 않지만 막대한 피해를 양산하는 법들은 많았다일례로 유태인이라고 체포당하는 것이 합법인 사회에서 육백만 명이 살해당했다. 방귀를 뀌지 못하는 폐해란...... 잠깐 상상해봤는데 진짜 끔찍하다. 의학적으로도 방귀를 잘 못 뀌면 세포가 오염된다던데......



저자가 이 책의 주인공으로 현실의 방송계에서 숙이점을 만들었다는 연예인 김숙씨를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하셔서 그 시원한 생각과 발언이 책에서도 들리는 듯했다방귀 시위!를 주도해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주인공 숙이씨


방귀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여정과 소란스러운 폭발음을 더 많이 상상할수록 떠들썩하게 재미난 이야기가 된다특히 4단계 총천연색 방귀 폭발을 기대하시라!


오토바이!ㅎㅎㅎ


방귀 금지라는 충격적이고 극한인 상황을 설정해서잘못된 법은 어떻게 깨는 것인지인권과 자유는 무엇인지사회를 변화시키는 용기란 또 무엇인지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이 모든 묵직한 주제들을 색색의 다채로운 그림들에 담아준 멋진 창작물이다신인 작가이고 첫 그림책이라는 설명이 무색하다.


.....................................

 

주의소리 내어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만 아이들이 웃다 기절 직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방귀만 말고 다른 금지된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일도 좋겠습니다.


저는 요즘에 미얀마 상황을 찾아보는게 참 힘이 드는데 도울 방법도 마땅치 않아 안타깝습니다.


https://www.independent.ie/world-news/asia-pacific/myanmar-soldiers-revel-in-protest-brutality-401936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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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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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도 하드보일드는 안 먹는다고 했다가 친구에게 혼쭐이 날 뻔했다일본 하드보일드의 전설하라 료를 만날 기회라는데 말 안 듣는다고책소개 첫 줄이…… 신주쿠 뒷골목을 누비는 낭만 마초탐정 사와자키……무엇인가, 80년 대 어디메쯤 있었을 듯한 이 인물은<아담스 패밀리 2>의 펍에서 울려 퍼지던 마초마초마초!”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고고하고 시크한 오십대에 접어든’ 하라 료는 무려 1946년 생이고 1988년 마흔이 넘어 등단했다80년 대 맞다! 14년 만의 신간이라니 애독자들에겐 정말 기쁜 소식일 거라 공감한다온갖 찬사로 어질어질하지만나는 첫 만남이니 차분히 예의를 차려보련다사회파 미스터리 작품도 추리소설도 좋아하니 변사가 읽어 주는 느낌이 물씬 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이 작품의 하드보일드 감성에 적응하면 되리라.


소설의 진정한 재미그것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썼다.”

 

정직하고 고집스럽고 성실하고 똑똑한자기 일을 훌륭히 해치우는 그런 매력이 있는 남성으로 설정된 인물이 사와자키이다달리 말하자면 남자답다!’라고 20세기 미디어에서 평가할 만한 인물이다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전화 사서함 서비스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 를 이용하는 개인이, 10m마다 CCTV가 설치되고 위치추적이 가능한 들고 다니는 컴퓨터와 같은 휴대폰그리고 공권력의 조력 없이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까 마음이 짠해진다혹여 무능하다고 평가받거나 희화화될까그런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와자키의 현실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뢰인 조치즈키 고이치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이었다.

 

의뢰인이 아니다그것이 내 첫인상이었다중략탐정 업무라면 내가 더 낫겠지만탐정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문제가 발생하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사람으로 보였다.

 

의뢰인이 사라진 이후부터 한동안 어두운 신주쿠 뒷골목을 줄담배를 피는 사와자키를 따라 다니며 아무 단서도 수확도 없이 지칠 때까지 걷는 기분이 들었다하드보일드란 장르와 더불어 연상되는 숨이 턱에 차는 추격화려한 액션칼질과 총질이 전혀 없다.

 

사와자키란 인물의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르니스토리에서 확장되는 상상마저 제한된다과거에 소중한 누굴 잃었다거나세계 최고로 악랄한 살인마가 원한을 품었다거나꼭 이 정도로 자극적이지 않더라도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맥주 한 잔 하다 잠시 흘리는 분위기나 말 한 토막 같은 그렇게 힌트가 되는 그런 장치들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이런 투박한 깔끔함이 진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트릭에 익숙해진 추리소설 독자라 그럴 수도어쨌든!

 

사가라 오라버니가 사와자키 씨에게는 허세를 부려도 안 되고거래는 더 안 되고거짓말은 절대로 안 된다더군요.

 

사와자키의 인물됨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듯한 문장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그리고 신주쿠 경찰과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는 악연으로 설정되어 위협을 받고 의심을 받기도 하는데이 역시 머리 아픈 트릭들이 전혀 없이 솔직한 정면 대결과 같은 긴장구도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단지 사와자키의 수사 방식으로 보이는 탐문단서추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반복되어서살인은 이 모든 인물들이 팀을 이뤄 자행했다란 결말을 보는 것인가 잠시 당황했다관련 인물들의 개인사가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더 정성스럽고 길게 펼쳐져서추리 속에 또 다른 미스터리가 출몰하는 건가 잠시 길을 헤맸다복선이거나 결말을 직조하는 중요한 재료들일 지도 모른단 생각에 성실하게 열심히 읽었다책 앞의 등장인물 설명 페이지를 들춰가며조금은 원망스럽다물론 저자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해 이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래도 오십 대가 되어서야 나는 처음 만난 사와자키는 반짝반짝 별처럼 영민해서 독설도 영리하게위트 가득한 비아냥도 독창적으로대화 역시 생각의 속도에 뒤지지 않게 빨라서 지겹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다 읽을 수 있었다이런 문장들이 하라 료의 독특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면 독자들이 일찌감치 발견한 지독한 매력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기대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없었지만 - 혹은 못 찾았지만 - 기대 이상의 문장들은 발견했다.

 

거리의 불빛이 어둠과 경쟁하는 탓에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고 없는 것이 보이는 듯한 시간이었다.

 

뜻밖에 수미쌍관처럼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신주쿠의 뒷골목으로 이 묵직하고 담배향이 나는 탐정과 다시 걸어 들어가며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그가 건네는 말을 듣는 기분이 든다.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중략땅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읽는 내내 뽀오얀 담배 연기가 따라 붙는 기분이 뭉게뭉게 들었다평생을 기관지가 엉망이라 담배는 무리이고 맥주나 한 잔 해야겠다그나저나 제목을 이해하려면 더 애써 읽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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