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정의 - 표창원이 대한민국 정치에 던지는 직설
표창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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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안 드는 장관이나 기관장에게는 대놓고 당신 때문에 그 부처(기관예산이 최대한 깎일 것이라고 공언하는 일도 흔히 보인다의원실로 장차관이나 국장혹은 실무 공무원들을 호출하거나 전화를 걸어 호통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 등국민이 볼 수 없는 곳에서의 갑질은 더욱 잦고 심하다.

 

! ‘정치적 테러’ 범죄의 발생은 대부분 유사한 메커니즘을 보인다.

 

우선 널리 알려진 정치인정당학자종교인 등 소위 공인의 계산된’ ‘혐오 발언(hate speech)’이 먼저 나온다.

 

두 번째 단계로 신문방송 등 대중매체가 이를 보도하거나, SNS 등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구독자를 가진 소위 인플루언서가 동일한 취지맥락의 내용에 자극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나 허위 사실 등을 교묘히 섞어서 전파한다.

 

세 번째 단계는 이에 자극받은 소위 악플러(keyboard warrior)’들이 우후죽순 관련 기사나 영상맨션게시물 등을 퍼 나르고고조된 분노 감정과 공격성을 드러내 공유하며 이를 증폭시킨다.

 

마지막으로 평소 신뢰하거나 자신과 성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유사한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하는 분위기에 고무된다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왜곡된 정의감에 사로잡혀, ‘나도 뭔가 기여를 하고 싶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각 당 대변인이나 원내 대변인들은 수시로 기자들에게 상대 당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뭐라 대응하시겠어요?’라고 묻는 전화를 받는다무대응하면 일방적으로 상대방 얘기만 보도될 테니 여론전에서 불리할 것이란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당연히 강력 대응이 나오게 되고 한동안 후속 기삿거리가 될 싸움판’ 하나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정말 새로운 내용도 아닌데...

내가 짐작해서 생각한 내용과는 다른 것이...

또 다른 현장의 경험을 정리한 문장들로 읽으니...


현실감에 현실감이 더해지면서...

저자가 느낀 갑갑함이 읽은 분량만큼 전이된다


문제는 분명하고 해결 방법도 있을진대

실행력인지 의지인지가 없다는 것이 최대의 걸림돌인 걸까.


가까운 베란다에 나가 잠시 바람이라도 마시며 어두운 하늘이라도 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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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강화 섬의 소년들 오늘의 청소년 문학 30
이정호 지음 / 다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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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의 나이가 열네 살열두 살입니다읽기도 전에 이들이 겪을 고초가 아픕니다강화라는 장소도천주교 박해 현장도가난도 아이들은 무관한 일인데 휘말리고 고통 받고아무리 사소한 소망이라도 모조리 집어 삼키는 무감한 화마는 변별력이 없으니까요.

 

문득 몇 주 전학위도 있는 어른이 열서너 살 여아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 계약을 했다는 X소리를 부끄럼 없이 해대던 일이 떠오릅니다그런 자가 학자연하고 살고 있는 세상이라니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닙니다만.

 

전쟁에서 얻을 이익도 없고 명분도 필요 없던 이들에게 예고 없이 닥친 전쟁굶주림을 면하기도 어려운 가난에 여동생은 무장한 배를 몰고 온 서양인들에게 팔려갑니다아비가 팔았습니다열네 살 오빠 득이는 동생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열두 살 바우는 목숨 걸고 천주교를 믿는 부모로 인해도피 계획마저 어긋나서 미끼로 붙잡혀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한 아이는 가기 싫은 낯선 섬으로 끌려가고다른 아이는 자기가 나고 자란 섬으로 동생을 데려오려다 끌려갔다마침내 바우와 득이가 만났다강화라는 섬육지로부터 닫힌 곳이자 바다를 향해 한없이 열린 곳에서.”

 

아무 힘도 없는 열두 살 자식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아비에게 저는 왜 감정이입이 안 될까요제가 너무 속물적이라 경건함과 순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까요순교당한 이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그저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과 동행하는 종교의 역사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심적으로 즐기며 읽을 수 없는 내용이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각자의 전투함들을 배치하고 총질을 하는 어른들의 싸움 속에서 두 아이는 오갈 데도 없이 모든 것을 겪어내야 합니다살기 위해 끝까지 애쓰고엄청나게 의지가 강했지만 모두가 원하는 방식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이런 세상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었을까요.

 

1866년 1월 병인박해, 1866년 9월 병인양요로 기억하던 사건들을 한 가운데서 휘말리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으니…… 혼란과 고난과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소년들의 우정’ 이런 표현에 화가 납니다.

 

죽을 바엔 뭐라도 값진 일을 하고 싶어.”

형을 위해 내가 미끼가 될게.”

 

약간의 합리성을 갖춘 얄팍한 저와는 달리죽음 앞에 내몰리면서도 인간다움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은 언제나 계셨겠지요어리게만 보이는 이 소년들 역시 우정과 용기를 잃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작은 꿈만 꾸는 저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들이 달갑지도 거룩하지도 않습니다언제가 될지 모르지만다음 강화 여행길에는 그곳에서 지극히 애쓰며 살아 간 어린 사람들 생각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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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볼가강의 영혼 클래식 클라우드 27
정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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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정하느라 의견을 묻는 기간이 있었는데열기가 식고 당시의 내 행태를 떠올려보니 그야말로 이불킥 백만 번에 달하는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다른 후보들은 아예 생각도 안 나고 지금 표지 그림을 선택해야한다고 사생결단하듯 말을 쏟아 부었다부디 담당자께서 협박과도 같은 광기어린 독자의 민망한 방백 따위 한 올의 영향도 없이 결단을 하셨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그래도 이 표지로 출간되어 무척 행복하다.




출판사가 다르긴 하지만 정준호 저자의 <스트라빈스키>를 읽고 번역서가 아닌 예술 거장들의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꼈다. 그런 점에서 클래식 클라우드는 깨닫지 몰랐던 이상형을 만난 기분이 드는 시리즈들이다. 027이라고 붙은 번호를 보면 이 세 자리 숫자가 다 채워질 때까지 영생을 살고 싶은 기분도 든다일 년에 두세 권 씩 출간한다고 해도…… 백 년도 못될 가능성이 높은 인간의 수명이 슬프다.

 

어마어마하게 재밌다이 책은 확고한 또 다른 세상이다애써 문을 찾을 필요도 없이 책만 펴면 마법처럼 입장이 가능하다니공연과 전시회가 사라진 내 세상이 간만에 떠들썩하고 음악 소리가 달다.

 

퀸딩거가 데려간 공연에서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처음 들었다훗날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기억했다그것은 완벽한 계시였다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열광했고 황홀경에 중독되다시피 했다몇 주 동안 나는 성악 피아노 반주 편곡으로 그 곡을 연주했다잠잘 때마저도 나는 이 신성한 음악과 떨어지지 않았다그것이 나를 달콤한 꿈으로 이끌고는 했다.”

 

얼른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플레이해서 감상해본다그리고 차이콥스키 자서전의 발췌문을 다시 읽어 본다얼핏 두 거장은 대치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과문한 내 느낌과는 별개로황홀과 신성함을 느낀 열일곱 살의 차이콥스키의 열광적인 평가는 참 달콤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PYjqz7nToY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이야말로 그의 전 작품 가운데 핵심이며러시아 음악의 결정적 한 방이다이 곡으로 러시아는 서유럽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은 성과를 단박에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타티아나의 편지한곡만 외우면 오페라의 절반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해서 Krassimira Stoyanova. Tatiana's Letter scene from "Eugene data-onegin" by Tchaikovsky 를 들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P8K87bKYYog



1874년 완성된 파리의 튀일리 정원 쪽에 있는 잔 다르크 기념상이다차이콥스키도 이 앞을 지났을 것이다. <오를레앙의 처녀>란 제목은 실러의 작품이기도 하고 차이콥스키의 오페라이기도 하다이 인물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타아니와 동일 인물인 듯 성격이 닮았다.

 

독일 교향곡은 높고 견고하게 쌓은 고딕 건축물에 비견된다탄탄한 토대에 견고한 기둥과 대들보를 올려 까마득하게 세운다그런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그렇게 수직적이지 않다그는 엄청난 유량을 만들어 끝없이 흘려 보낸다구조는 엉성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독일이 만든 둑을 허물기라도 하려는 듯한 거대한 물줄기에 듣는 사람의 넋을 앗아 가고 만다이미 앞선 두 교향곡에서 잔뜩 가둔 물이 둑까지 찰랑찰랑하더니 마침내 <교향곡 제3>에서 둑을 넘어 단숨에 대양까지 흘러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mYU3HZxmMEA


차이콥스키는 거의 죽을 때까지 모든 교향곡과 오페라발레를 지금까지 쓴 것 중 가장 좋다라고 했다그가 괜한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 현실은 그가 쓴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대부분 뒤로 미루어 두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을 믿는다면 혹은 작곡가를 존중하고 싶다면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은 연대순으로 감상해야 가장 좋은 것에서 새롭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이동하며 경험할 수 있다물론 제멋대로인 나는 그건 차이콥스키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이지이렇게 오만하게 무례를 무릅쓰고 늘 그렇듯 내가 좋은 것을 더 좋아라 할 것이다예전에도 지금도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선뜻 말하지 못하는 사고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가장 좋은 것들이 여러 개이거나 좋은 것들이 아주 많거나.

 

나는 제네바 호수와 알프스산맥바이런을 추억하는 시용성이 모두 보이는 산기슭에 섰다발아래에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 시시의 동상이내 옆에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밤은 부드러워라를 쓴 곳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그곳에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머릿속에 그린다무아지경의 연주가 끝나고 난 뒤 나는 위에 언급한 명사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https://www.youtube.com/watch?v=-Jtzq55kcQI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교향곡 제4>의 자필 악보와 그 아래 놓인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이 주고받은 편지들이다러시아어를 모르더라도 예쁘게 꽃을 그린 엽서가 부인의 편지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마지막 힘을 다한 <교향곡 제6번 비창’>의 악보는 마치 스페이드의 여왕이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듯이 광기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0B3M0Oxq-Q


어린 시절 <차르에게 바친 목숨>을 관람하지 않았다면후원자 폰 메크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성정체성을 숨기고 죽음을 강요당했어도 행복했을까인간으로서의 삶은 행복했을까,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한 후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맞은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나면 차이콥스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까달라질까높아질까무엇이 변할까.

 

공연장에 간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성탄절 무렵에 연례 의식처럼 매년 <호두까기 인형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 제일 재미난 일이었는데특히 간혹 어린이 관람객들이 잔뜩 오면 더 기분이 좋다근엄하고 불편하게 앉아 즐겁지 않다는 표정들인 어른들보다 백만 배 쯤 더 재밌게 공연을 즐기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LoaMfinbU


운명이 나를 모스크바로 이끌어 이곳에서 12년을 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비창>만으로도 세계 최고이자 불멸이지만원한다면 몇 작품들로 제한된 차이콥스키라는 세계를 확장해 줄 수 있는 책이다공연장을 직접 가는 것처럼 두근거리진 않지만이 시절은 새롭게 제대로 공부하며 내공을 쌓다가 언젠가 마음 편히 일상을 즐기게 되면 꼭 한달음에 가보고 싶다그리고 나도 일기에 이렇게 적는 것이다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우랄산맥 입구에 있는 이젭스크공항에 도착했다.”

 

그에게는 국경과 장벽이 없었다여러 나라말에 능통했던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토착민이었다그의 우상인 모차르트처럼 된 것이다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르기 마련이고그래서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 이후 처음으로 오페라와 교향곡에서 모두 최고봉에 오른 작곡가가 되었다.”

 

작품들만이 아니라 차이콥스키라는 인간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재능과 더불어 그의 성실함과 다정함에 반할 줄이야엄청 재밌다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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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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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우주라는 위대한 책에 쓰여 있다.

우주는 항상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주의 언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

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황금계량자>


 

천체물리학과를 갈까 물리학과를 갈까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물리학과를 택한 나로서는 그에 대한 보상처럼천문학과 천제물리학우주론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소식을 열심히 따라 읽고 삽니다.

 

온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생명이란 것 자체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근거를 찾지 못하고 말겠지요기계적인 우주의 운동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없지만 무감하고 서늘하고 인간에게는 무의미하기도 합니다인격화된 신을 믿은 적은 없지만 부디 다른 생명체들을 만나생명의 탄생이 우연만은 아니라는이 지독한 고독감에서 조금은 덜 쓸쓸해질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주를 깊숙하게 바라보는 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참 좋습니다반갑고 감사하고 두근거리는 소식입니다.


조금 읽었는데 모두 필사하고 싶은 에세이라 놀라고 행복합니다.


조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iyukk/22229650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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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
한사람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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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학제대상이란 소개에 콧등이 시큰거리며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었다시작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10대에 <월간경향연재분을 읽기 시작해서 30대에 단행본으로 완독한 특별한 책이라 매번 지극히 감상적이다. 26년에 걸쳐 쓰신 작품을 20여 년 동안 읽었다한국 근현대사는 토지로 배웠고 덕분에 역사교과서가 더 재미없어지는 낭패를 겪었다.

 

 늘 장편문학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푹 빠지게 되는 과정과 몰입하는 느낌이 좋았다그러다 3월에 단편 11개를 매일 하나씩 읽고 뭐라도 써보았는데작품들이 훌륭해서였겠지만 매일이 가뿐하게 즐겁고깔끔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단편의 매력과 읽는 즐거움이 무척 컸다덕분에 퇴근 후 시간이 반짝이고 들썩였다누군가 재미난 단편들을 계속 제공해준다면 계속하고 싶단 애착도 생겼다.

 

다행히 이 책을 만나 이번 주 내내 설레며 읽어 보았다.



개가 주인공인 [안락사회]와 [코쿤룸]처럼 제목들이 범상치 않아 마음을 다잡고 비장하게 읽어야지 했던 글들은 묵직한 울림이 있었고 아파서 조금 울었다개나 사람이나 사는 모습도 형편도 천차만별애쓰는 내내 소모되기만 하고 말라가서 쓸쓸하게 사라지듯 안락하게 죽는 이들의 모습이 언제쯤 현실과 무관한 일이 될까 슬펐다.

 

집이 사람을 인식합니다.” 


언택트 시대는 점차 더 집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이미 누군가는 고치 속 애벌레처럼 버티고만 있을 것이다저자가 들려 주는 이야기가 이런 절망의 분위기는 아니다각자의 코쿤룸을 만들기도 하지만 허물기도 하는 살아가고 성장하려 애쓰는 장한 주인공이 있다.

 

[집구석 환경 조사서]라는 냉소적인 말투가 묻은 제목의 글은 냉철하고 날선 풍경을 웃프게 전해주었다딱히 화만 나지도 슬프기만 하지도 웃기기만 하지도 따뜻하기만 하지도 않은딱 그런 모두의 가족이야기.초등시절 가정환경조사를 하며 웃기게도 가구나 가전제품 유무를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항목마다 손을 들라 했던가 적어오라 했던가.

 

그리고 대전의 친구와 돌발적으로 찾아가본 뿌리공원이 생각났다뿌리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 전시공원일거란 짐작과 다르게 성씨의 뿌리를 찾아서공원이라 진심 놀라고 엄청 웃었던 추억이다우리는 현생 인류와 동일한 미토콘드리아를 전달한 모든 미토콘드리아의 조상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여성의 후손들이자 모두 남이다.

 

가장 최근의 시사성과 현실성이 반영되었을 거란 짐작했던 [기억의 제단祭壇]과 [조용한 시장市場]은 짐작보다 넓고 풍부한 세상을 담고 있었다제대로 생생하게 아프고 힘든 이야기였다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 그리스신화의 인물이 등장해서 어떤 의미로 가장 새롭고 기대가 되었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언제나 가장 먹고 싶은 것부터 먹는 버릇대로 가장 먼저 읽었다뜻밖에 중여성화자가 등장해서 내면을 가감 없이 들려주는 지라 어느새 제목은 잊고 유일한 상담사가 된 소명을 받은 양 어린 사람의 이야기를 정말 열심히 읽었다.

 

* Clytemnestra /ˌklʌɪtɪmˈnɛstrə/: wife of Agamemnon. She conspired with her lover Aegisthus to murder Agamemnon on his return from the Trojan War, and was murdered in retribution by her son Orestes and her daughter Electra. <Oxford Dictionaries>. 클라이텀네스트라, 가 더 익숙한 발음이지만 별 문제는 아니다.



한 날나는 다짐했었다가끔은 나를 속이기도 하는 저 소리에 침 흘리지 말자고.”

 

다섯 마리의 개가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시력 장애로 버려진 197나이가 많아 오줌을 지린다고 버려진 254성대가 잘려 짖지 못하는 236새 아파트에서 키우기엔 덩치가 크다고 버려진 178번 그리고 156나였다.”

 

지난 10일간 이곳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 왔다탈출은 실패했다중략. 156안락사했음.”

 

집구석이란 단어에선 애증의 냄새가 난다가정과 집구석 중에가족과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 집구석이다.”

 

나는 나의 장래’ 앞에서 문제 많은 가족들을 생각했다중략생은 예측불가라서 의미 있다고들 하지만한 치 앞 정도는 내다볼 수 있기를 바랐다내 희망은 가족처럼만 살지 않는 거라고 해도 좋았다나는 모든 막연한 것들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중략나는 장래 희망란에다 취직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나는 신용을 버렸다신용을 버리면 생도 끝장나는 줄 알았다중략그러나 웬걸다음 날에도 해는 떴고 나는 외려 이전보다 조금씩 살만해졌다중략신용불량자가 된 후에도 메일함에는 꾸준히 신용불량자 대출이라는 스팸메일이 도착했다바야흐로 대출 권하는 사회였다.”

 

나는 머리맡에 둔 수첩을 펼치고 닥치는 대로 썼다견디기 위해서나를 따라다니는나를 괴롭히는가끔씩 내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불씨나는 머릿속에 들어찬 무수한 를 증오하며 오직 잊기 위해 글을 썼다문장 안에 를 가두고 닫아 버렸다.”

 

욕 좀 하는 키보드 워리어로 게시판을 실컷 누빈 사내는 조금씩 감정이 누그러져 오는 것을 느꼈다변한 건 없어도 어쨌든 좀 살 것 같았고일단은 그걸로 족했다.”

 

평소 자신의 십자가임에 마땅했던 남자와 아들은 주일 예배를 통해 주님이 주신 은총으로 탈바꿈되곤 했다그럴 땐 할렐루야들이 고맙기도 했다얼마 못 가 다시 십자가로 전락했지만 주일은 또 돌아왔다중략실직도 일단은 회사에 들어가 봐야 겪을 수 있는 거라면 자신은 아버지보다도 못한 인생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나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 버린 포만감 때문에 남은 생이 좀 지루하다.”

 

어느 날 밤엄마는 락스를 가득 담은 대접을 앞에 두고 내게 말했다. “먹고 죽자.””

 

엄마는 순수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다당사자는 세상물정 모르 채로 살면 그만이겠지만지켜보는 나는 그 아슬아슬함 때문에 희생을 강요받는 기분으로 엄마의 인생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

 

모쪼록엄마의 여성이 살 만해 하는 마흔의 생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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