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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인 볼가강의 영혼 ㅣ 클래식 클라우드 27
정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평점 :
표지를 정하느라 의견을 묻는 기간이 있었는데, 열기가 식고 당시의 내 행태를 떠올려보니 그야말로 이불킥 백만 번에 달하는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다른 후보들은 아예 생각도 안 나고 지금 표지 그림을 선택해야한다고 사생결단하듯 말을 쏟아 부었다. 부디 담당자께서 협박과도 같은 광기어린 독자의 민망한 방백 따위 한 올의 영향도 없이 결단을 하셨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이 표지로 출간되어 무척 행복하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403/pimg_7391901682900056.jpg)
출판사가 다르긴 하지만 정준호 저자의 <스트라빈스키>를 읽고 번역서가 아닌 예술 거장들의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꼈다. 그런 점에서 클래식 클라우드는 깨닫지 몰랐던 이상형을 만난 기분이 드는 시리즈들이다. 027이라고 붙은 번호를 보면 이 세 자리 숫자가 다 채워질 때까지 영생을 살고 싶은 기분도 든다. 일 년에 두세 권 씩 출간한다고 해도…… 백 년도 못될 가능성이 높은 인간의 수명이 슬프다.
어마어마하게 재밌다. 이 책은 확고한 또 다른 세상이다. 애써 문을 찾을 필요도 없이 책만 펴면 마법처럼 입장이 가능하다니! 공연과 전시회가 사라진 내 세상이 간만에 떠들썩하고 음악 소리가 달다.
“퀸딩거가 데려간 공연에서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처음 들었다. 훗날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기억했다. 그것은 완벽한 계시였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열광했고 황홀경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몇 주 동안 나는 성악 피아노 반주 편곡으로 그 곡을 연주했다. 잠잘 때마저도 나는 이 신성한 음악과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달콤한 꿈으로 이끌고는 했다.”
얼른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플레이해서 감상해본다. 그리고 차이콥스키 자서전의 발췌문을 다시 읽어 본다. 얼핏 두 거장은 대치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과문한 내 느낌과는 별개로, 황홀과 신성함을 느낀 열일곱 살의 차이콥스키의 열광적인 평가는 참 달콤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PYjqz7nToY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이야말로 그의 전 작품 가운데 핵심이며, 러시아 음악의 결정적 한 방이다. 이 곡으로 러시아는 서유럽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은 성과를 단박에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타티아나의 편지> 한곡만 외우면 오페라의 절반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해서 Krassimira Stoyanova. Tatiana's Letter scene from "Eugene data-onegin" by Tchaikovsky 를 들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P8K87bKYYog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403/pimg_7391901682900057.jpg)
1874년 완성된 파리의 튀일리 정원 쪽에 있는 잔 다르크 기념상이다. 차이콥스키도 이 앞을 지났을 것이다. <오를레앙의 처녀>란 제목은 실러의 작품이기도 하고 차이콥스키의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 인물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타타아니와 동일 인물인 듯 성격이 닮았다.
“독일 교향곡은 높고 견고하게 쌓은 고딕 건축물에 비견된다. 탄탄한 토대에 견고한 기둥과 대들보를 올려 까마득하게 세운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그렇게 수직적이지 않다. 그는 엄청난 유량을 만들어 끝없이 흘려 보낸다. 구조는 엉성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독일이 만든 둑을 허물기라도 하려는 듯한 거대한 물줄기에 듣는 사람의 넋을 앗아 가고 만다. 이미 앞선 두 교향곡에서 잔뜩 가둔 물이 둑까지 찰랑찰랑하더니 마침내 <교향곡 제3번>에서 둑을 넘어 단숨에 대양까지 흘러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mYU3HZxmMEA
“차이콥스키는 거의 죽을 때까지 모든 교향곡과 오페라, 발레를 “지금까지 쓴 것 중 가장 좋다”라고 했다. 그가 괜한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 현실은 그가 쓴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대부분 뒤로 미루어 두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을 믿는다면 혹은 작곡가를 존중하고 싶다면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은 연대순으로 감상해야 가장 좋은 것에서 새롭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이동하며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제멋대로인 나는 그건 차이콥스키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이지, 이렇게 오만하게 무례를 무릅쓰고 늘 그렇듯 내가 좋은 것을 더 좋아라 할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선뜻 말하지 못하는 사고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가장 좋은 것들이 여러 개이거나 좋은 것들이 아주 많거나.
“나는 제네바 호수와 알프스산맥, 바이런을 추억하는 시용성이 모두 보이는 산기슭에 섰다. 발아래에는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 시시의 동상이, 내 옆에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밤은 부드러워라』를 쓴 곳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그곳에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머릿속에 그린다. 무아지경의 연주가 끝나고 난 뒤 나는 위에 언급한 명사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https://www.youtube.com/watch?v=-Jtzq55kcQI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교향곡 제4번>의 자필 악보와 그 아래 놓인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이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더라도 예쁘게 꽃을 그린 엽서가 부인의 편지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마지막 힘을 다한 <교향곡 제6번 ‘비창’>의 악보는 마치 스페이드의 여왕이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듯이 광기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0B3M0Oxq-Q
어린 시절 <차르에게 바친 목숨>을 관람하지 않았다면,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성정체성을 숨기고 죽음을 강요당했어도 행복했을까, 인간으로서의 삶은 행복했을까,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한 후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맞은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나면 차이콥스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까, 달라질까, 높아질까, 무엇이 변할까.
공연장에 간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성탄절 무렵에 연례 의식처럼 매년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 제일 재미난 일이었는데. 특히 간혹 어린이 관람객들이 잔뜩 오면 더 기분이 좋다. 근엄하고 불편하게 앉아 즐겁지 않다는 표정들인 어른들보다 백만 배 쯤 더 재밌게 공연을 즐기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LoaMfinbU
“운명이 나를 모스크바로 이끌어 이곳에서 12년을 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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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비창>만으로도 세계 최고이자 불멸이지만, 원한다면 몇 작품들로 제한된 차이콥스키라는 세계를 확장해 줄 수 있는 책이다. 공연장을 직접 가는 것처럼 두근거리진 않지만, 이 시절은 새롭게 제대로 공부하며 내공을 쌓다가 언젠가 마음 편히 일상을 즐기게 되면 꼭 한달음에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나도 일기에 이렇게 적는 것이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우랄산맥 입구에 있는 이젭스크공항에 도착했다.”
“그에게는 국경과 장벽이 없었다. 여러 나라말에 능통했던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토착민이었다. 그의 우상인 모차르트처럼 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르기 마련이고, 그래서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 이후 처음으로 오페라와 교향곡에서 모두 최고봉에 오른 작곡가가 되었다.”
작품들만이 아니라 차이콥스키라는 인간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재능과 더불어 그의 성실함과 다정함에 반할 줄이야. 엄청 재밌다.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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