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심리학 - 서운한 엄마, 지긋지긋한 딸의 숨겨진 이야기
클라우디아 하르만 지음, 장혜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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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번 어렵고 멈칫하게 되는 주제이다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접근하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도 든다만약 책을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결심을 하거나 행동을 바꾸는 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단계일 것이다다행히 그런 심각한 상황은 아니고 별 다를 바 없이 간혹 마음이 부대 끼는 것들이 있으니 다시 책을 읽어 본다.

 

독일 작가가 쓴 책이고 한국 작가가 옮겼다딸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이해와 화해를 위한 책이다얼버무리기 보다는 솔직한 입장을 솔직하게 옮긴 책이고 8장의 <더는 못하겠다면>을 읽고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잘 지내든 그렇지 못하든 그럴 수 있다는 정확한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처음인 듯도 하다.

 

이론을 풀어 적용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심리치료사인 저자가 연구 결과들과 치료 경험을 통해 만난 사연들을 소개하는 자료에 충실한 책이다사연들마다 저자가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빠지지 않는다사례 중심의 이야기들이 주는 공감과 위로는 생각보다 기대보다 크다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상황들을 만나면서 일단 자기 비하와 비난과 위축 등의 축소되는 사고 판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관계와 삶에 대해 공통적인 면면들을 이해하고 용기가 나기도 한다가독성 높은 대화 방식의 에세이처럼 읽힌다.

 

왜 가도 가도 끝이 없을까요?”

엄마와의 문제는 절대 끝나지 않는 걸까요?”

엄마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 모든 해묵은 상처가 화산처럼 폭발하는 듯한 분노를 느끼는 딸들의 이야기.”

내면아이의 깊은 상처

이 세상 모든 딸들과 엄마들이 지닌 상처의 백과사전이자 치유 모음집.”

성장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응원의 책.”

 

모두 다 낯설지 않은 문장들이지만 단 하나의 선명한 정답도 못 만난 문제이기도 하고무섭지만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엄마라 해도 자식에게 완전히 충분하게 완벽하게’ 사랑을 줄 수는 없다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자식들에게 결핍성 욕구가 생길 수 있고 그 욕구는 살다가 불쑥 튀어나와 삶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저자는 엄마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 제안한다성장하고스스로를 치유하고원하는 삶더 나은 삶을 살아내고가능하면 엄마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존재가 되라고.

 

오늘 상처 입은 아이는 훗날 상처 주는 어른이 된다.”

 

딸에게만 가혹한 것이냐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나조차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밖에는현재에서 출발해서 미래로 나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이런 여정을 살아가려면 우선 이해해야한다그리고 화해해야한다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서로의 삶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을수록 더 어려울 것이다.

 

작가 역시 심리치료를 하면서 가족의 애착과 관계 역학이 성인인 딸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여 연구하고임상 치료 시에는 신체지향적 심리치료와 대화치료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화를 보듯’ 엄마의 삶을 바라보고여성이자 인간으로 이해하고딸인 자신도 독립적이고 온전한 인간으로 인지하고그러면서도 유기체처럼 완전히 떼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도 이해하고이미 살아 온 엄마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아무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하고내 엄마는 완벽해야 한다고 기대하지 말고인정하고 존중하는 부분들을 늘리고가능한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자는.



르누아르 풍 책 표지가 아름답고 평화로워 무척 슬프다. <Young Mother> 메리카스사트작품 제목을 알게 되니 더 슬프다표지 그림 속 엄마가 어려서내 나이로 짐작해 본 내 엄마가 엄마가 된 나이가 아득하게 젊어서저 말간 얼굴의 어린 딸이 성장하며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들이 쉽지 않아서.

 

세상에는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고 거듭나는 이들이 있다그에 비해 나는 대단한 상처도 대단한 부담도 없지만 작은 일에도 지치는 기분이 든다사랑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고 원망과 비난을 쏟아내지도 않지만잘 엉키는 감정 덩어리는 사라지지도 않는다깜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변명처럼 자주 사용하지는 말아야겠다저자는 분명히 성장하라고 제안했다.

 

생각해보면 부모보다 해주는 것 없이 요구만 많고 무례한 이들도 만나게 된다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쉽지 않은 어느 하루가 무한 반복되는 듯 난감한 기분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옅어지겠지만일단 무척 마음에 드는 인용문을 만났다.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어둠은 안 봐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인리히 베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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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자를 만날 시간 - 숨 고르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석한남 지음 / 가디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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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월요일 휴일을 몇 번 만나겠어신나는 휴일, ‘노자’ 뜻은 다르지만 책 읽으며 놀고 싶을 때 만나기 좋은 호칭이시라 읽었다동양철학과 노장사상에 대한 기본기도 없으니 맘 편하게저자께서 수백을 넘는 주석이 달린 글이니 단정도 말고 즐겁게 읽으라셔서 더욱 편하게 읽었다.



<도덕경>을 읽지도 않고 도덕경을 해석한 책을 읽어도 되나잠시 멈칫거렸지만 어차피 고문헌은 못 읽으니 언제 읽어도 직역에 가깝게 해석된 글을 읽어야 한다<도덕경>은 5600여 자, 81, 1-37장이 도경, 38-81장이 덕경이라 분류된다춘추시대 말기 실존 인물인 노자의 성명은 처음 알았다성은 이이름은 이(), 자는 담(). 신기하다이름은 이고 자는 귓바퀴 없음’ 2,600년 전 작명법인가.


Lao Tzu leaving the kingdom on his water buffalo

https://www.theschooloflife.com/thebookoflife/the-great-eastern-philosophers-lao-tzu/


나는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아야겠다류의 욕망은 구체적으로 없었고비교적 일찍부터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데 집착했다독립이라 적으면 거창하지만 실은 내가 필요한 생활비를 자급하고 그 덕분에 재정 지원에 따르는 불필요한 간섭을 줄이는 방식의 단순한 내용이었다알고 보니 다들 별 말 없이 하는 일을 별나게 선언하듯…….

 

그러니 노자께서 평균의 삶을 위해 애쓰는 것들을 말리시는 내용은 편안하게 읽고 지났다큰 소원이 없이 살아온 삶이 도움이 될 때가 간혹 있다.

 

有無相生(유무상생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겨난다.

우주에 속하는 모든 일상이 모두 그러하긴 한데선생의 뜻은 헤아릴 방법이 없어 아쉽다.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내가 살아 보니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는 욕심은 곤란하다언제나 반드시 필연적으로 화를 부른다하지만 그런 시도는 그치질 않는다그러니…….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무위에 이르게 되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무위에 이르고 싶다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전지전능이 아님을 잠시 잊고 욕심이 막 났다이래선 노자께서 말하는 작위가 없는 유위가 아닌 무위에 이르긴 어려울 듯네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라는 것과 상통하는 것인가.

 

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잘 모르는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말을 많이 하는 상황들은 지겹도록 보긴 했다정확히 알고 배우고 말을 줄이고 잘 듣자.

 

信言不美美言不信(신언불미 미언불신신뢰가 가는 말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고 아름다운 말은 믿기 힘들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표현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잘 꾸민보기 좋은이란 뜻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화술화법 말고 발화자가 전하려는 내용에 더 집중하면 들릴 것이다오래 전 영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는 분의 강의를 수십 명이 집중해서 무척 즐겁게 들었다감탄하고 배울 내용이 가득했다그러니 외국어 공부하실 때 발음과 문법에만 힘을 다 쓰지 마시길중요한 것은 늘 언제나 담고 있는전하려는 내용이다모국어도 마찬가지지만.

 

뭇 사람들이 평하듯 내용들이 부드럽고 다감하다공자의 <논어>를 오랜 시간 좋아한 지라 두 분의 차이가 잘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가볍게 읽었다어려운모르는 한자를 찾아보지 않고 계속 읽은 방식이 뜻밖에 편안했다.


해치는 법 없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도다툼 없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성인의 도예전엔 높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쳐 두었던 말씀들이 이제는 선후판단 없이 편안하게 생각해볼 심적 여유가 있다이해 수준은 별 다를 바 없더라도힘을 뺀 것이 아니라 나이 탓에 힘이 빠진 것이라 해도 다행이다 싶다그 덕분에 내 삶에서 다투고 해치는 일이 덜하리라는 그런 기대가 높아졌으니.


2,600년 전 스승의 글을 만나니 무해한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는 2021년 어느 저자가 떠오른다무위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삶의 방향은 무해를 향해 똑바로 보고 가보려 한다가능한 열심히 무해하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변하고 있는 방향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쪽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저 사는 대로 살아지기 전에

스스로 신념을 가꿔가며 사는 일이

오래오래 성장에 대한 영감과 안정감을 줄 거라고 믿는다.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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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작품의 재구성
강용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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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접 읽어 본 적 없는 철학자에 대한 ~카더라 식 이야기들 중 니체 관련 내용은 초인과 권력에의 의지가 있었다맥락 없는 짧은 인용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솔직하고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위험하지만 무척 매력적인 이미지로 해석되었다이는 일종의 해방적 역할은 하는 지라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닌 척하는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감에 복무하면서 근거 없는 내용치고는 꽤 오랜 세월 널리 회자되었다.

 

20대에 읽어 보고 싶었지만 무척 존경하는 교수님이 니체를 먼저 읽고 나면 철학사에 중요한 다른 저작들을 읽기가 힘들어진다고 만류하셨다신뢰하는 분의 말씀이라 진지하고 성실한 기분으로 칸트의 이성비판을 먼저 읽었다후회는 물론 없다칸트 선생 역시 무척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분이고, 특히 저술에 있어 치장과 과장과 억측이 없는 아름다울 정도로 정직한 고찰을 하신 분이었다.

 

이후 분야를 달리하는 전공 공부로 인해 니체를 잊고 살다가, 2005년 한국의 니체 전공자들이 니체 전집 2권을 완역/완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읽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조각나고 왜곡되고 오도된 것들은 시원하게 바로 잡힐 거란 기대를 했다아래 인용은 니체편집위원장 정동호 교수의 출간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출처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8763.html

 

니체는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념과 신앙은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생의 의미는 이 땅 위에 있다고 했죠그런데 초인이란 번역어는 그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죠니체는 초월적 존재를 반대했는데 말이죠독일어 위버맨시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쌓인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도 미국에선 수퍼맨’ ‘오버맨으로우리말에선 초인으로 바뀌었어요.”

 

전집에서 위버멘시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하고 원어의 발음대로 표기됐고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로 수정됐다고 한다.

 

권력힘을 뜻하는 독일어(Macht)를 니체는 정치사회적 힘뿐 아니라 에너지생명물리법칙 같은 자연의 힘을 말할 때에 주로 썼습니다권력이란 번역어는 그 뜻을 왜곡합니다.”

 

니체 사상은 생명윤리학에서도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그는 내세의 소망이라는 짐을 잔뜩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정신이 자유의 쟁취를 만끽하는 사자의 정신으로 변했으나이제는 기만과 미몽을 벗은 순수긍정의 어린이’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왜곡되지 않은 생명순화되지 않은 자연 생명을 강조했습니다.”


2

 

그리고 2021기분으로는 백만 년 만에 니체작품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니체의 문화철학으로 독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강용수 교수께서 대표 작품 다섯 개를 현대어로 친절히 풀어 재구성한논리적 순서로 글을 재배치해서 비전공자인 나와 같은 독자도 읽을 수 있는(?) 글이다입문서나 해설서가 아니라 좋다.

 

고심 끝에 그는 인간은 약속이 허용되는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 비극 예술의 균형이 깨어지게 된 원인은 음악에 대한 가사(언어)의 과도한 지배다.”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영원 회귀는 (...)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인간의 지위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겸손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유사하며 정신은 교활함의 결과일 뿐진화나 창조의 궁극적인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력들의 서열거리적대시키지 않으면서도 분리하는 기술, (...)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함을 갖지만 카오스와는 반대되는 것이 니체의 (...) 본능의 전제 조건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선한 인간은 사실 악한 인간이다. (...) 그들은 진리와 미래를 희생시켜 자신의 존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니체의 윤리관예술관인생관종교관자서전을 다는 아니지만 잘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정되었고 설명은 상세하다나로선 무척 흡족한 한 상 차림 같은 책이다니체가 망치를 들고 어떤 것들을 깨부수며 살았는지 신나게 재밌게 읽었다.

 

예전의 오독자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확실하다여러 평가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현대적인 인물인지는 몰랐다기본기와 깊이와 탁월성을 가진 철학자가 정면으로 덤벼드는 체제 전복을 위한 지적 사고여전히 그리고 오랫동안 니체와 그의 철학은 거듭 그 매력을 재평가 받고 인정받을 것이 분명하다.


3

 

마지막으로 이번이 아니면 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무척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본다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운명애파티피플이 되어 요란한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연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살면서 내게도 경직되고 오만한 생각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순간은 없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노래를 처음 우연히 들은 순간 마치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착실히 들어 가사가 다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니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아모르파티가 젊은 시절 자신을 흔들어 놓았다며 간단 설명한 작사가에게 심층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라 성실한 비판을 할 순 없지만 마음에 든다고 학자의 사상에서 한 구절을 떼어와 맥락 없이 희화해도 좋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 않나그 대상이 오래전 사망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더구나.

 

자신의 철학을 왜곡한 21세기 한국대중문화사의 이 현상이야말로 니체가 뜻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운명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라는 부정성을 포함하는 긍정을 담고 있는 일화로 보인다.

 

니체가 전하는 철학적 성찰은특히 자신에 대한 성찰은 삶의 여정을 통해 낯설고 고민스럽게 평생 마주해야할 질문이며자신의 행동이 선악에 휘둘리거나 좌우될 때의 선택과 결단과 책임으로 이어진다.

 

매 순간 선과 악의 근원에 대해주류의 지위를 성취한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가치를 끈질기게 따져 묻는모든 것을 전복하라!’는 다소 격한 구호로 연상되기도 하는 사상적 성취이다.

 

상업대중문화에서 주류로서 성공한 사례들을 자랑하는짜릿한 작업을 즐긴다는백 억 대 수익 구조가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내용들과는 섞일 수 없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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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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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건강염려증건강정보건강식품신비한 완치체험 등등을 믿지 않는 지라 아프면 의료면허가 있는 의사가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에 간다는 질환에 관한 나의 유일한 상식이고 태도이고 해법이다판데믹 시절 백신 개발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이 자세히 보도되는 미디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온갖 의학 미신들이 사멸하고 의학과학적 사고방식이 득세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내가 기대하는 것이 기대대로 잘 구현된 사례가 드물다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현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아시니까 구구절절 보고는 넘어간다.

 

그러니 내가 보는 세상은 의학과학을 신뢰하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이었다그리고 이 책을 만나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염두에 두지 못한 세상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고 배운다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상식을 따를 수 없는 이들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아픔통증보다 더 어렵고 힘든 병원 가는 여정열 장도 못 읽고 일단 조금 울었다반성과 감동과 안타까움과 속상함과 무심함과 안도와 기타 등등이 섞인 눈물이 났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아주 오래전 진폐증으로 병원을 오는 광부들을 치료해주던 의사가 똑같은 병이 재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환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약을 처방해주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의료방식의 한계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일도 떠올랐다한 개인이 괴로워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없게 두는 사회가 함께 원망스러웠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방과 방의 경계선이 점점 사라졌다여기가 안방인지 부엌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었다먹다 남은 찬거리와 음식들이 펼쳐놓은 이부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그러다가 집과 집 아닌 것의 경계선도 점점 사라졌다멀리서 보면 집인데 가까이서 보니 움막이었던 곳도 있었고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분들도 만났다.”

 

돈 없는 환자에 돈 없는 병원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는 내게 물었다만약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길어져서 입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감당할 수 있는가자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수술을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가 왕진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을 이렇게 56편의 글로 만들어 주었다의사가 아픈 사람 만난 이야기일 뿐인데 56번 울컥한다.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궁금해할 여력도 없다진료실이라는 창백한 멸균 공간에 환자가 들어올 때 그는 자신의 맥락을 모두 버리고 들어온다. (...)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한 20분 진료가 허락되지 않았을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시간이 많은 의사도 필요하다.”

 

여력이 없다는 글이 핵심이다진료대기표를 볼 때마다 절감하는 문제이다보호자로 진료실 문 밖에 앉아 나는 진료실 안의 풍경에 난감한 기분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의도하지 않아도 진료 시간에 대기명수를 보면 일인당 배정된 시간 계산이 되기 때문이다꼼짝 못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여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의사들의 근무환경은 모두의 처지를 안타깝고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야 장의사처럼 나타나서 사망 선고를 하고 가버렸다는 전공의그는 결국 그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엇을 체득하게 될까.”

 

가족 친지들 중 의료인이 세 명이다심장 외과와 응급 의학 분야이니 소위 상대적으로 편할 수도 있다는 분야도 아니다보고 들은 일들로 짐작하건대 20살이 되자마자 의학서적을 독파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테스트를 치러야하는소위 교양과정조차 허락하지 않는 교육시스템은 옳지 않다30살이 훌쩍 넘어 어느 날 직업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상담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생각해보라는 말 이외에 해줄 말이 없어 몹시 난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현직 의사로서 저자가 제안하는 두 가지를 해법을 소개한다첫째, ‘의사들의 왕진 제도화.’ 왕진 수가를 현실화하고왕진 주체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꾼다방문진료 전담 센터를 만들고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둘째, ‘고령층의 정치세력화.’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화할 수 있는 어르신 정당이 절실하다.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당하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가족 간병과 관련된 제안을 소개한다가족의 간병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비겁하고 비열한 사회이다부정적 결과로 발생한 사건을 두고 가족애니 효도니 그 따위 수준의 망발은 부디 누구라도 삼가길 바란다.

 

가족들에게 간병하지 않을 자유를 주지 못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사회다.

우리에겐 가족을 간병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 권리를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내가 그를 간병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를 간병해줘야 한다.

만약 내가 간병을 선택한다면

사회가 치러야 할 공동체의 비용을 아무런 조건이나 장벽 없이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택할 수 있다.

간병 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는 간병할 자유간병 받을 자유와 같은 말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치료받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삶이 중요한 공간과 시스템에 대한 치열하고 심도 있고 실용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진무엇보다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방식의 논의와 대안과 정책을 기대한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 나는 늘 믿어왔다한 사람의 이웃이 국가보다 중요하다고그렇다면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이웃이 되면 안 되는가그런 질문들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나는 다시 왕진가방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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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오가니즘 - 디지털 생태계의 거대한 지각변동
올리버 러켓.마이클 J. 케이시 지음, 한정훈 옮김 / 책세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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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를 통해 언론 산업은 새롭고 거대한 진화론적 도약을 이룬다나는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만큼이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살짝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오래 전 사회유기체론에 대한 논박을 벌이는 학회 분위기에 발만 담갔다가 미처 정리를 못하고 멀어진 경험 때문이었다사회적으로 실제적으로는 관심 있는 몇 명의 학자들만 합의한 정의분석비판평가들이 내게도 얼마나 오랜 세월 유의미하게 활용될지는 모를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목처럼 이 책에서 다루는 소셜 오가니즘은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정의한 사회는 하나의 생명체사람들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작용을 한다라는 기본 개념을 수용한다.

 

2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소셜미디어가 면모한 모습은 가치 천지개벽 수준이다지금은 매순간 전 세계 사람들이 이른바 실시간 소통을 하고해시태그로 사회운동을 진행시키기도 한다온라인에서의 움직임이 먼저 시작되고 오프라인으로 확장되는 순서도 어색함이 없다.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정보를 공유하고 사용하는 방법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사업을 조직하고정치적 결정을 내리고유대감을 쌓고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인간이 활용하는 매체로서만 활발히 기능한다고 보았다면 굳이 유기체로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무방했을 것이다저자가 보기에는 개인이 생성하는 정보가 유기체의 세포와 같다고 비유한다즉 세포 증식과 번식 기능처럼소셜미디어의 정보가 유사한 방식으로 증식하고 사멸한다고 보는 것이다더구나 속도의 가속화가 엄청 나서 지금은 매우 복잡한 유기체로 이미 진화했다고 판단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그런 평가는 지금도 데이터가 쌓이고 갱신되고 있으며소셜미디어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이용자 혹은 정보 생산자의 여러 의도가 더 촘촘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나로서도 현직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선동해 자국의 의회를 총기로 점령하고 발포한 사태는 정말 충격적이었다건국 이래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일진대왜 아직 처벌 관련 소식이 없는지이제까지의 모든 이슬람 테러 위협을 다 집어 삼키고도 능가할 테러가 아니었나극악한 위선!

 

저자는 소셜미디어에 대한 너무 많은 통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지만나는 좀 더 절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더구나 저자의 입장대로 이미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했다면물론 에너지원이 끊어지면 모두 중단될 것이지만에너지 복구가 되면 가장 먼저 정상가동될 것 역시 소셜미디어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어쨌든 그렇다고 근원적인 회의나 거부 말고 가능한 건강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한다다른 모든 인류의 문제들처럼자정하고 망가지고 재정립하고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의 검열 기능은 경험상 만족스럽진 않지만 신고된 계정 처리에 비해 폭발적으로 등록되는 스팸의 수가 더 많은 것일 터이지만비유하자면늘 살인을 일삼아온 인류에게는 여전히 살인하지 말라라는 종교적사회적법적으로 합의된 규칙이 필요하다살인을 완전히 중단시키기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의 복제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오래 전부터 동의한 나는 소셜미디어 역시 현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경험할 것이라 생각한다이미 여러 영역에서의 불평등은 뚜렷하다


가끔 소셜미디어 사용을 중단해 보기도 했지만판데믹 시절 나는 거의 매일 접속을 한다오래 못 만난 이들어쩌면 더 오래 못 만날 이들을 만날 세상이기 때문이다어쨌든 나는 최대한 건전하게 사용하려 애쓸 것이다투덜거리는 메모 수준의 일기와 편협한 독서감상문이 뭐 그리 큰 해악을 끼치리라고 기대(?)하긴 어렵기도 하다.

 

소셜미디어의 유용성과 의미가 사적으로 커지는 시절잠시 가만히 내 행태를 점검해보는 좋은 시간이 되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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