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니체 작품의 재구성
강용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1
직접 읽어 본 적 없는 철학자에 대한 ~카더라 식 이야기들 중 니체 관련 내용은 ‘초인’과 ‘권력에의 의지’가 있었다. 맥락 없는 짧은 인용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솔직하고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위험하지만 무척 매력적인 이미지로 해석되었다. 이는 일종의 해방적 역할은 하는 지라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닌 척! 하는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감에 복무하면서 근거 없는 내용치고는 꽤 오랜 세월 널리 회자되었다.
20대에 읽어 보고 싶었지만 무척 존경하는 교수님이 니체를 먼저 읽고 나면 철학사에 중요한 다른 저작들을 읽기가 힘들어진다고 만류하셨다. 신뢰하는 분의 말씀이라 진지하고 성실한 기분으로 칸트의 이성비판을 먼저 읽었다. 후회는 물론 없다. 칸트 선생 역시 무척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분이고, 특히 저술에 있어 치장과 과장과 억측이 없는 아름다울 정도로 정직한 고찰을 하신 분이었다.
이후 분야를 달리하는 전공 공부로 인해 니체를 잊고 살다가, 2005년 한국의 니체 전공자들이 니체 전집 2권을 완역/완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읽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조각나고 왜곡되고 오도된 것들은 시원하게 바로 잡힐 거란 기대를 했다. 아래 인용은 니체편집위원장 정동호 교수의 출간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8763.html
“니체는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념과 신앙은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생의 의미’는 이 땅 위에 있다고 했죠. 그런데 ‘초인’이란 번역어는 그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죠. 니체는 초월적 존재를 반대했는데 말이죠. 독일어 ‘위버맨시’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쌓인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도 미국에선 ‘수퍼맨’ ‘오버맨’으로, 우리말에선 초인으로 바뀌었어요.”
전집에서 위버멘시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하고 원어의 발음대로 표기됐고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로 수정됐다고 한다.
“권력, 힘을 뜻하는 독일어(Macht)를 니체는 정치, 사회적 힘뿐 아니라 에너지, 생명, 물리법칙 같은 자연의 힘을 말할 때에 주로 썼습니다. 권력이란 번역어는 그 뜻을 왜곡합니다.”
“니체 사상은 생명윤리학에서도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내세의 소망이라는 짐을 잔뜩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정신이 자유의 쟁취를 만끽하는 ‘사자’의 정신으로 변했으나, 이제는 기만과 미몽을 벗은 순수긍정의 ‘어린이’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왜곡되지 않은 생명, 순화되지 않은 자연 생명을 강조했습니다.”
2
그리고 2021년, 기분으로는 백만 년 만에 니체작품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니체의 문화철학으로 독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강용수 교수께서 대표 작품 다섯 개를 현대어로 친절히 풀어 재구성한, 논리적 순서로 글을 재배치해서 비전공자인 나와 같은 독자도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입문서나 해설서가 아니라 좋다.
“고심 끝에 그는 인간은 ‘약속이 허용되는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 비극 예술의 균형이 깨어지게 된 원인은 음악에 대한 가사(언어)의 과도한 지배다.”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영원 회귀는 (...)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인간의 지위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겸손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유사하며 ‘정신’은 교활함의 결과일 뿐, 진화나 창조의 궁극적인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력들의 서열, 거리, 적대시키지 않으면서도 분리하는 기술, (...)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함을 갖지만 카오스와는 반대되는 것이 니체의 (...) 본능의 전제 조건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선한 인간은 사실 악한 인간이다. (...) 그들은 진리와 미래를 희생시켜 자신의 존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니체의 윤리관, 예술관, 인생관, 종교관, 자서전을 다는 아니지만 잘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정되었고 설명은 상세하다. 나로선 무척 흡족한 한 상 차림 같은 책이다. 니체가 망치를 들고 어떤 것들을 깨부수며 살았는지 신나게 재밌게 읽었다.
예전의 오독자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확실하다. 여러 평가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현대적’인 인물인지는 몰랐다. 기본기와 깊이와 탁월성을 가진 철학자가 정면으로 덤벼드는 체제 전복을 위한 지적 사고. 여전히 그리고 오랫동안 니체와 그의 철학은 거듭 그 매력을 재평가 받고 인정받을 것이 분명하다.
3
마지막으로 이번이 아니면 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무척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운명애는, 파티피플이 되어 요란한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연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살면서 내게도 경직되고 오만한 생각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순간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노래를 처음 우연히 들은 순간 마치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착실히 들어 가사가 다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니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아모르파티’가 젊은 시절 자신을 흔들어 놓았다”며 간단 설명한 작사가에게 심층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라 성실한 비판을 할 순 없지만 마음에 든다고 학자의 사상에서 한 구절을 떼어와 맥락 없이 희화해도 좋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 않나. 그 대상이 오래전 사망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더구나.
자신의 철학을 왜곡한 21세기 한국대중문화사의 이 현상이야말로 니체가 뜻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운명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라는 부정성을 포함하는 긍정’을 담고 있는 일화로 보인다.
니체가 전하는 철학적 성찰은, 특히 자신에 대한 성찰은 삶의 여정을 통해 낯설고 고민스럽게 평생 마주해야할 질문이며, 자신의 행동이 선악에 휘둘리거나 좌우될 때의 선택과 결단과 책임으로 이어진다.
매 순간 선과 악의 근원에 대해, 주류의 지위를 성취한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가치를 끈질기게 따져 묻는, ‘모든 것을 전복하라!’는 다소 격한 구호로 연상되기도 하는 사상적 성취이다.
상업대중문화에서 주류로서 성공한 사례들을 자랑하는, 짜릿한 작업을 즐긴다는, 백 억 대 수익 구조가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내용들과는 섞일 수 없는 철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