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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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건강염려증건강정보건강식품신비한 완치체험 등등을 믿지 않는 지라 아프면 의료면허가 있는 의사가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에 간다는 질환에 관한 나의 유일한 상식이고 태도이고 해법이다판데믹 시절 백신 개발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이 자세히 보도되는 미디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온갖 의학 미신들이 사멸하고 의학과학적 사고방식이 득세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내가 기대하는 것이 기대대로 잘 구현된 사례가 드물다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현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아시니까 구구절절 보고는 넘어간다.

 

그러니 내가 보는 세상은 의학과학을 신뢰하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이었다그리고 이 책을 만나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염두에 두지 못한 세상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고 배운다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상식을 따를 수 없는 이들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아픔통증보다 더 어렵고 힘든 병원 가는 여정열 장도 못 읽고 일단 조금 울었다반성과 감동과 안타까움과 속상함과 무심함과 안도와 기타 등등이 섞인 눈물이 났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아주 오래전 진폐증으로 병원을 오는 광부들을 치료해주던 의사가 똑같은 병이 재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환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약을 처방해주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의료방식의 한계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일도 떠올랐다한 개인이 괴로워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없게 두는 사회가 함께 원망스러웠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방과 방의 경계선이 점점 사라졌다여기가 안방인지 부엌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었다먹다 남은 찬거리와 음식들이 펼쳐놓은 이부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그러다가 집과 집 아닌 것의 경계선도 점점 사라졌다멀리서 보면 집인데 가까이서 보니 움막이었던 곳도 있었고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분들도 만났다.”

 

돈 없는 환자에 돈 없는 병원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는 내게 물었다만약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길어져서 입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감당할 수 있는가자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수술을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가 왕진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을 이렇게 56편의 글로 만들어 주었다의사가 아픈 사람 만난 이야기일 뿐인데 56번 울컥한다.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궁금해할 여력도 없다진료실이라는 창백한 멸균 공간에 환자가 들어올 때 그는 자신의 맥락을 모두 버리고 들어온다. (...)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한 20분 진료가 허락되지 않았을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시간이 많은 의사도 필요하다.”

 

여력이 없다는 글이 핵심이다진료대기표를 볼 때마다 절감하는 문제이다보호자로 진료실 문 밖에 앉아 나는 진료실 안의 풍경에 난감한 기분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의도하지 않아도 진료 시간에 대기명수를 보면 일인당 배정된 시간 계산이 되기 때문이다꼼짝 못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여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의사들의 근무환경은 모두의 처지를 안타깝고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야 장의사처럼 나타나서 사망 선고를 하고 가버렸다는 전공의그는 결국 그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엇을 체득하게 될까.”

 

가족 친지들 중 의료인이 세 명이다심장 외과와 응급 의학 분야이니 소위 상대적으로 편할 수도 있다는 분야도 아니다보고 들은 일들로 짐작하건대 20살이 되자마자 의학서적을 독파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테스트를 치러야하는소위 교양과정조차 허락하지 않는 교육시스템은 옳지 않다30살이 훌쩍 넘어 어느 날 직업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상담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생각해보라는 말 이외에 해줄 말이 없어 몹시 난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현직 의사로서 저자가 제안하는 두 가지를 해법을 소개한다첫째, ‘의사들의 왕진 제도화.’ 왕진 수가를 현실화하고왕진 주체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꾼다방문진료 전담 센터를 만들고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둘째, ‘고령층의 정치세력화.’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화할 수 있는 어르신 정당이 절실하다.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당하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가족 간병과 관련된 제안을 소개한다가족의 간병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비겁하고 비열한 사회이다부정적 결과로 발생한 사건을 두고 가족애니 효도니 그 따위 수준의 망발은 부디 누구라도 삼가길 바란다.

 

가족들에게 간병하지 않을 자유를 주지 못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사회다.

우리에겐 가족을 간병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 권리를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내가 그를 간병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를 간병해줘야 한다.

만약 내가 간병을 선택한다면

사회가 치러야 할 공동체의 비용을 아무런 조건이나 장벽 없이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택할 수 있다.

간병 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는 간병할 자유간병 받을 자유와 같은 말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치료받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삶이 중요한 공간과 시스템에 대한 치열하고 심도 있고 실용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진무엇보다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방식의 논의와 대안과 정책을 기대한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 나는 늘 믿어왔다한 사람의 이웃이 국가보다 중요하다고그렇다면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이웃이 되면 안 되는가그런 질문들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나는 다시 왕진가방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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