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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자를 만날 시간 - 숨 고르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석한남 지음 / 가디언 / 2021년 4월
평점 :
살면서 월요일 휴일을 몇 번 만나겠어. 신나는 휴일, ‘노자’ 뜻은 다르지만 책 읽으며 놀고 싶을 때 만나기 좋은 호칭이시라 읽었다. 동양철학과 노장사상에 대한 기본기도 없으니 맘 편하게, 저자께서 수백을 넘는 주석이 달린 글이니 단정도 말고 즐겁게 읽으라셔서 더욱 편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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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읽지도 않고 도덕경을 해석한 책을 읽어도 되나, 잠시 멈칫거렸지만 어차피 고문헌은 못 읽으니 언제 읽어도 직역에 가깝게 해석된 글을 읽어야 한다. <도덕경>은 5600여 자, 81장, 1-37장이 도경, 38-81장이 덕경이라 분류된다. 춘추시대 말기 실존 인물인 노자의 성명은 처음 알았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신기하다. 이름은 ‘귀’이고 자는 ‘귓바퀴 없음’ 2,600년 전 작명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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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o Tzu leaving the kingdom on his water buffalo
https://www.theschooloflife.com/thebookoflife/the-great-eastern-philosophers-lao-tzu/
나는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아야겠다, 류의 욕망은 구체적으로 없었고, 비교적 일찍부터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데 집착했다. 독립, 이라 적으면 거창하지만 실은 내가 필요한 생활비를 자급하고 그 덕분에 재정 지원에 따르는 불필요한 간섭을 줄이는 방식의 단순한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다들 별 말 없이 하는 일을 별나게 선언하듯…….
그러니 노자께서 평균의 삶을 위해 애쓰는 것들을 말리시는 내용은 편안하게 읽고 지났다. 큰 소원이 없이 살아온 삶이 도움이 될 때가 간혹 있다.
有無相生(유무상생)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겨난다.
: 우주에 속하는 모든 일상이 모두 그러하긴 한데. 선생의 뜻은 헤아릴 방법이 없어 아쉽다.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 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 내가 살아 보니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는 욕심은 곤란하다. 언제나 반드시 필연적으로 화를 부른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그치질 않는다. 그러니…….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무위에 이르게 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 무위에 이르고 싶다.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전지전능이 아님을 잠시 잊고 욕심이 막 났다. 이래선 노자께서 말하는 작위가 없는 유위가 아닌 무위에 이르긴 어려울 듯. 네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라, 는 것과 상통하는 것인가.
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 잘 모르는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말을 많이 하는 상황들은 지겹도록 보긴 했다. 정확히 알고 배우고 말을 줄이고 잘 듣자.
信言不美美言不信(신언불미 미언불신) 신뢰가 가는 말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고 아름다운 말은 믿기 힘들 수 있다.
: 아름다움이란 표현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잘 꾸민, 보기 좋은, 이란 뜻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화술, 화법 말고 발화자가 전하려는 내용에 더 집중하면 들릴 것이다. 오래 전 영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는 분의 강의를 수십 명이 집중해서 무척 즐겁게 들었다. 감탄하고 배울 내용이 가득했다. 그러니 외국어 공부하실 때 발음과 문법에만 힘을 다 쓰지 마시길, 중요한 것은 늘 언제나 담고 있는, 전하려는 내용이다. 모국어도 마찬가지지만.
뭇 사람들이 평하듯 내용들이 부드럽고 다감하다. 공자의 <논어>를 오랜 시간 좋아한 지라 두 분의 차이가 잘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가볍게 읽었다. 어려운, 모르는 한자를 찾아보지 않고 계속 읽은 방식이 뜻밖에 편안했다.
해치는 법 없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도, 다툼 없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성인의 도, 예전엔 높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쳐 두었던 말씀들이 이제는 선후판단 없이 편안하게 생각해볼 심적 여유가 있다. 이해 수준은 별 다를 바 없더라도, 힘을 뺀 것이 아니라 나이 탓에 힘이 빠진 것이라 해도 다행이다 싶다. 그 덕분에 내 삶에서 다투고 해치는 일이 덜하리라는 그런 기대가 높아졌으니.
2,600년 전 스승의 글을 만나니 무해한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는 2021년 어느 저자가 떠오른다. 무위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삶의 방향은 ‘무해’를 향해 똑바로 보고 가보려 한다. 가능한 열심히 무해하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변하고 있는 방향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쪽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저 사는 대로 살아지기 전에
스스로 신념을 가꿔가며 사는 일이
오래오래 성장에 대한 영감과 안정감을 줄 거라고 믿는다.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신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