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예찬
앙리 라보리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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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라는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난 글, 사상의 자유를 빨리 보장받은 사회공동체에서 사회화된 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동시에, 자기검열에 익숙한 한국사회의 움츠러듦이 생각나니, 자유롭고 재기발랄한 발화에 조금 속상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읽는 재미는 확실하다. 화가 치미는 시절에, 이 책은 내게 책 속으로의 즐거운 도피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더불어 쿠데타 상황에서 영리하게 도피하고 용감하게 맞선, 그래서 비극적 희생이 없는 상황이 새삼 안도가 된다.

 

물론 외과 의사이자 신경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가 예찬하는 도피는 물리적 도망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이 투장과 억제와 도피이며, 사회가 물리적 투쟁을 금지하는 동시에 도피를 반사회적인 것으로 억제시키는 행태에 대해 지적하니 현 상황에도 시의적절 했다.

 

자기를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 상당수가 개인과 집단, 계급, 국가, 국가연합 등을 막론하고 지배 구조를 구축하려고 궁리하면서도 정상을 유지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한, 도피는 자기 자신에 비춰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영민하고 통쾌한 문장들이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블랙코미디나 시니컬하게 반짝이는 과학 지성을 좋아하는 분들은 자주 웃으며 즐길 수 있다. 과학과 철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자를 따라가는 게 조금 버거워질 수도 있으나, 최대한 즐기시길. 독서란 시험에 들게 하는 함정이 아니다.

 

중추신경계 기능은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간이 되기에 (...) 중추신경계에 대한 지식을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습득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읽는 시간에는 현실을 잊고 웃었다. 저급한 인간이 저지른 최하질의 국가적 범죄 처벌이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한 시간에, 아주 다른 시선과 태도로 세상의 여러 당연한 것들을 뒤집어 보는 책과의 안전한 시간이 큰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아무 메아리도 없는 절망적인 비명에 불과할 뿐이라고 깨달았다.”

 

저자가 선택한 주제어들 중에도, 우리 인간이 저항과 도피라는 수단을 아예 사용하지 못할 상황들도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의 운명은 생물학적일 뿐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생은 영원히 매혹적일 테지만, 더 유용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어떤 내용으로 살 것인가이다.

 

아주 작은 시도라도 해야 한다. 우주는 자연법칙에 따라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지만, 인간 사회는 아무리 강고해도 지배 시스템에 틈이 있고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벌려 구조물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도 가능하다. 계기가 무엇일지는 사건event 발생 전에는 누구도 정확히 모른다. 완전히 절망하고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 책은 개별 존재인 우리 자신을 생물학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그리고 철학적 주체로 생각해보는 유쾌한 공부를 돕는다. 그리하여 온갖 모순과 갈등과 경쟁과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좀 더 이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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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무래도 내가 너를 - 나태주 한서형 향기시집
나태주.한서형 지음 / 존경과행복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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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에는 익숙하지만, 정신도 기분도 다잡고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하지만, 공황이 코앞에 다가온 듯 심장이 뛰고, 아무 데서나 광광 울고 싶은 심정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올 해는 특히 더 그렇다.

 

병마(病魔)와 사별과 간병과 양육과 살림과 업무의 좁은 틈 사이에서 살아가는 매일이 체력도 정신도 녹슬게 한다. 어느 순간 바스스 부서져서 사라질 것만 같다.

 

특히나 실패한 내란 수괴와 주동자들을 구속 처벌도 못하고 지나는 매 시간은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킨다. 집중이 어려워서 자꾸만 SNS를 뒤적이게 되니 더 괴로웠는데, 책이 도착하니 향이 퍼지고 고단한 정신은 그 향에 달라붙는다. 비로소 차분히 안정이 된다.



 

책 자체에도 향이 스며있고, ‘사랑꽃 향 갈피에도 향이 난다. 한 장씩 넘겨가며 읽으니 손가락에도 향이 물드는 듯하다. 향이 진하면 불편한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거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시를 천천히 다시 읽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향이 가만 읊조려보는 시구들과 함께 내 기억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호흡도 편안해지고, 덕분에 불안이 가라앉는다.

 




<잠시향>으로 처음 만난 한서형 작가님이 만든 향이 반갑고 고맙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친필 시를 써서 액자로 보내주신 나태주 시인에게 감사드린다. 두 분이 문답을 주고받은 책 말미의 몇 장도 고운 시들처럼 다정하게 들린다.

 

아직 손끝에서 향이 희미하게 난다. 오늘은 이 향기시집을 가까이에 두고 잠을 청할 것이다. 시처럼 향처럼 곱고 아름다운 일들이 늘어나는 날들을 희망하고 상상하면서. 운이 좋으면 그런 꿈을 행복하게 꾸는 선물 같은 밤을 바라면서.

 

12월이란 갖가지 생각을 더 복잡하게 하고, 때론 무척 힘든 기분이 들게 한다. 짐작보다 힘이 센 향이라서 더 좋다. 불안하던 정신을 붙잡아주다니. 시집과 향 모두를 즐기시는 이들에게 선물로 드리거나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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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
에밀리 부틀 지음, 이진 옮김 / 푸른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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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도 만화도 아닌데도 읽고 나니 아쉽고 허전해서 재독을 할까 싶었다. 마치 자장면으로 통일!”이라고 외치는 회식의 무한 굴레에 갇혀 있다가 비상구로 탈출한 기분이다. “어디에나있는 진정성에 만성 체증이 나던 참이었다.

 

삶의 목표를 제공하고 자기 성찰을 교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진정성은 세속의 종교를 닮았다.”

 

행동주의를 앞세운 종교와 상업자본주의가 만든 개념일까 싶었는데, 1700년대 후반 처음 등장했다니 놀랍다. 이후로 계속 생존하고 강조되고 다양하게 활용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과학기술에 힘입어 전파력이 넓고 강력해졌을 뿐.

 

진정성은 자신을 소유하는 것, 자기 소유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이 주제로는 1000페이지 벽돌책도 반갑겠지만, 저자는 개념과 사상 말고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인식을 다루었다. 시의성과 전달력은 좋지만 풀세트 무기를 갖추고 싶은 독자로서 더 많이 깊이 읽고 배우고 싶어서 아쉬웠다.

 

진정성은 자본주의에 포섭되면서 그 의미를 잃었고, 전통적인 성공의 개념에 영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더 당신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품들만 양산했다.”

 

누군가의 진정성이 진짜인지 알 방법은 없다. 말과 행동을 통해 판단해볼 수는 있지만. 그러니 우리는 공감으로 타협한다. 따라서 진정성이든 공감이든 객관적인 정의도 측정도 불가능해진다. , 믿을 순 있겠지만 알 수도 있을까.

 

공감하면 이해하는 걸까, 한 번의 공감으로도 충분할까, 아니면 얼마나 반복해서 공감해야 진정으로 이해한 걸까. 고백의 형식을 갖추면 다 진정한 것일까. SNS에 표출된 콘텐츠들의 연출 여부와 진짜real는 항상 구분 가능할까.

 

누구의 삶이든 주체가 속한 사회의 현실 속에서 발생한다. 나는 고립이 아닌, 자신만의 진실에 따라 자립해서 생존하는 자연인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정성은 포장일 때 100% 진짜 같고, 진짜라고 우길수록 가짜 같다.

 

브랜드에도 인간과 동일한 진정성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진정성은 자아실현을 의미했다.”

 

모든 존재는 공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독자인 내게, 진정성과 정체성 논의, 정체성 정치로의 논의 전개는 흥미진진했다. 다만 요령있게 요약 전달하지 못하는 능력 부족이 안타까울 뿐이다.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진정성을 요구하는 정체성은 한 가지 버전의 진실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므로, 다른 존재를 제압하고 침해하고 말살하고 부정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는, 아니 이미 그렇게 행동하는 이들을 만든다는 점이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에게 하나의 유형에 맞추고, 하나의 입장을 취가호, 이분법적 결정의 과정을 거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해서 외부인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당위와 구별 불가능한 개념에서 비롯된하나인 가치 실현보다 에도 불구하고자유롭게 자신을 만들고 찾고 변화하는 삶이 간절하다. “저마다의 진실은 모두 다른 모습일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논의와 토론과 협의가 가능할 것이란 신뢰 구조가 필요하다.

 

진정성 논의는 자기 돌봄과 마케팅과의 연관을 꿰뚫어보면서 더 흥미로워진다. 줄친 내용을 간략하게도 못하고, 졸고를 줄이지도 못하는 감상문이 진정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강추는 외쳐볼 수 있다. 이것저것 가능한 모른 척 살고 싶던 반백의 독자의 눈도 반짝 뜨이게 해주는 반가운 책!

 

온라인에서 우리는 내가 진정성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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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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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시골이 바로 그의 귀신들의 땅이었다. ‘귀신()’이라는 이름은 황량함을 가리킨다.”

 

한반도보다 더 덥고 더 습한 곳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았다. 습식 더위를 몸이 견디지를 못한다. 피부가 보호기능을 잃고 면역체계가 엉망으로 과민하게 날뛴다. 그래서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들과 것들이 많다.

 

친구들이 꼭 읽으라고 칭찬을 거듭해서 번역서 두 권을 사두었다. 하지만 낯선 배경의 이야기를 펼치는데 거의 일 년이 걸렸다. 첫 장을 읽으면서도 두려움이 컸다. 전혀 모르는 세계란 두려움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니까.

 

원래 지명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였는데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 지명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라는 글자는 너무나 조용하다는 걸 의미했다.”






제목이 전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내용은 빼곡하게 짐작을 넘어선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귀신, 그중에서도 죽음과 귀신 이야기가 넘쳐난다. 귀신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으니 무섭지는 않으나, 귀신을 먹이고 부르고 믿어야하는 이유들이 뭘 잘못 삼킨 듯 속을 쓰리게 한다.

 

귀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인간이었다.”

 

평생 귀신보다는 인간들이 무서웠다. 귀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모든 나쁜 일들은 모두 인간들 짓이었지만, 여전히 악귀같은 인간이라며 귀신에 비유하곤 한다.

 

죽인다고 해서 다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수메이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 이것이 그녀가 살아야 하는 가장 큰 동기였다. 살아 있어야 남편이 죽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악귀 같은 인간들, 그들에 휘말려 다른 종류의 잔인한 존재가 되거나 귀신이 된 인간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낯설다고 느꼈지만, 얼핏 일가족의 이야기 같지만, 읽은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이야기는 익숙한 어떤 고통과 확장된 역사와 사회의 문제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너를 안아 준 적이 없다. 너를 때리기만 했다.”

 

몰랐지만 그래서 천진하게 잔인했던 내 어린 시절의 여러 발화들이 생각나서 속은 점점 더 쓰려왔고, 역사와 형편을 몰라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속상하게 했을 대화들이 재생을 거듭하는 영상처럼 생생해졌다.

 

엄마는 문맹이라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쓸 줄도 몰랐다. 그래서 말이 많아졌고,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세상엔 왜 이리 거대한 폭력이 생겨났고, 소멸되지 않는 태풍처럼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일까. 누가 그 회오리에 에너지를 여태 공급하고 있는 걸까. 죽음으로 끝을 내지도 못하는 삶을 살다 귀신이 되는 삶들이 아프다.

 

“‘발전을 외치는 것은 원래 있던 전통적인 것들이 모두 좋지 않고 열등하며 도태되거나 개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스포일링을 피하시고, 이 작품 세계의 광장에 잘 도착해서 풍경을 마주할 때까지 지치지 말고 끝까지 읽어 나가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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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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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을 올 해 후반에 성실하게 펼쳐보고 있다. ‘언젠가란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에 - 스스로에게 한 경우라도 - ‘무조건 읽기 시작이란 계획(?)을 세우고 따르는 중이다.

 

잘 읽히는 드라마여서 편하게 재밌게 읽었다. 인물들 간의 무게중심이 헷갈리긴 했지만, 애초에 경중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란 생각도 한다. ‘주인공에 이입하고 집중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독자, 내 탓일 뿐.




 

당신은 왜 그렇게 죽음과 살해를 좋아하는 거야?”

 

조부모님이 사셨던 시대이니, 그리 멀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요약된 역사나 단편적인 일화들로 채워나갈 수밖에 없는 지난 시절이기도 하다. 역사소설이나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는 건 퍼즐 판을 채워나갈 기대를 늘 하기 때문일지도.



 

낯선 세계의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로웠고, 끝난 적 없는 전쟁에 새삼 선뜩했다. 동시에 국가 간 전쟁이나 제국주의 침략이 아니더라도, 아니 늘 일상인 폭력에 노출된 현실이 극화보다 더 참담하다.



 

짧지 않고 적지 않는 스펙트럼의 역사를 한 권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담아낸 마무리가 반가운 동시에, ‘인물들이라는 무늬가 너무 도드라지고, 체험기라기보다는 식민지 조선 관찰기 같았던 성긴 문양이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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