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이 되어 줄게 - 할아버지가 엄마에게는 해 주지 못했던 말
한기호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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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아 품에 안고 보니 온몸이 떨렸습니다앞으로 이 아이가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니 온통 걱정뿐이었고앞으로의 미래는커녕 한 치 앞도 명확하지 않아 두려웠습니다.”

 

스스로의 성장기를 되돌아보면 매순간 부모가 함께 해서 모든 길을 미리 닦아 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하지만 눈앞의 어린사람들을 보면 그런 세월은 잊고 버거운 걱정들이 가득해진다.

 

친구들 중에는 아이를 낳고 통곡을 여러 번 한 이도 있다다른 이유는 아니고 미안한 것들후회되는 것들이 많아서였다고 한다주로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어야 하는데였으니 번역하면(?) 아이가 살아갈 미래가 염려된다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간절해도 아이들이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 때조차 도움을 줄 수 없을 지도 모르고 곁에 있어 줄 수 있을지조차 보장이 없다그러니 어른이 있건 없건 아이들이 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길 돕고 바랄 수밖에.

 

책을 읽고 지혜를 얻기만 하면 어떤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나는 편지에서 그런 지혜를 꼭 전해 주고 싶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책읽기를 좋아하면 좋겠다저자의 아버지 한이의 할아버지가 전하고픈 이야기는 일관적이다사실 한 문장으로 다 할 수 있지만왜 그래야 하는지 정성 들여 설명하는 내용이랄까그렇다 고해서 지루하거나 한건 전혀 아니다책읽기 공감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필사량이 점점 늘어날 뿐.

 

만약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혼자서 해결할 수 없으면 이나 도라’ 같은 친구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겠지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힘겹게 살아남은 이들은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확률이 높단다그런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가혹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읽어 보렴어떤 상황에서도 질문을 통해 해결점을 찾는 힘이야말로 네가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란다열일곱이 될 때까지는 이 무기를 꼭 갖추기 바란다.”

 

무척 좋아하고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을 예로 들어 주어 반갑고 기뻤다. <아몬드> 손원평


할아버지는 네가 숫자만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는 안목부터 기르도록 해아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지표는 분명 있기 마련이다그런 지표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소중하겠지. (...) 절대로 대가 없이 얻은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길 바란다. (...) 책의 깊이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의 깊이사유의 깊이 같은 것도 느끼며 살았으면 한다.”

 

정량적인 계산과 평가가 필요한 것들을 숫자로 잘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다문제는 정성적인 것들을 측정할 수 있다고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하는 주장들이다이 구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는 아주 힘들고 거의 불가능하다가치 체계란 생각보다 많이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두 가지는 공유와 연결이란다. (...)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나만 살겠다는 탐욕부터 버려야 한다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부터 키워야 해공유와 나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단다.”

 

한이에게 하나쯤 강한 무기를 만들어 주려고 해요그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힘이에요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뜻을 간파하는게 우선이에요그 상대는 사람이기도 하고 세상이기도 해요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려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하죠그러니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하고 이해하는 힘이런 힘을 기르기에는 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그리고 엄마의 글이 교차되는 내용들이 단 한 명의 수신자가 이미 정해져 있어 사적인 대화들일 수 있는 편지라는 장르를 확장시키는 틈이 되어 주기도 한다대담을 읽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자리를 옮겨 가며 읽는다.

 

아이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해요이건 기회라기보다는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해요그렇지만 저나 남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계점은 분명 존재해요요즘 사회는 당연히 누려야할 기회와 권리조차 쉽게 박탈하는 기형적 구조이기 때문이에요.”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은 수시로 바뀌고 어제의 유용했던 자격증은 내일 쓸모없어질 지도 모릅니다지금 당장 시대가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건강하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면 아마 조금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유사한 분석과 제안을 적지 않게 접했는데, ‘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가족으로서의 심정을 짐작하며 읽으니 막막함이 더하다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하면 좋은가부터 누가 얘기해준다면 얼마나 편할까날이 갈수록 나는 그냥 닥치는 대로 할 일을 하며 버티는 삶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것만 같다.

 

선을 그어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안전을 위해 보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립되는 것이란다선입견과 편견에 싸여 세상을 보는 건 광활한 대지에 서서 자신 주위의 흙을 야금야금 파먹는 것과 같아선이 깊어질수록 점차 고독한 섬이 되어 가는 것이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는 법이고생각의 차이가 바로 상상력으로 이어진다고이 말을 잘 기억해 두렴.”

 

짧은 인생편애와 편견과 편식을 하며 살자고 마음을 정한 나는 무척 불편한 마음으로 읽었지만그렇다고 뭘 반대하거나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다그저 나는 사고든 말이든 행동이든 최초의 출발점은 내 경우엔 언제나 편향된 나의 무엇에 기인한다는 것을 오래 전 깨달았고 도무지 편견이 없는 사람이 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의도적으로 공격적으로 누군가를 해하려는 목적으로 편견을 자랑하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그런 건 흉하다는 내 편견에 근거해서 그러하다서로가 이런 사람저런 사람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은 안 되려나.

 

너도 자라면서 글을 쓰게 될 날이 있을 거야우선은 일기부터 쓰도록 하렴그날 있었던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부터 정리한 다음 반드시 네 생각을 솔직하게 붙여라그런 일이 장차는 너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너는 어떤 꿈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자세부터 가져라그리고 머릿속에 상상력의 저수지부터 채우렴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이 필요하지. (...) 책에는 무수한 간접 체험이 담겨 있다그러니 책을 읽는 것도 체험의 일종이란다. (...) 상상력의 저수지를 꾸준히 채워 나가도록 해라그러다 보면 반드시 행복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행복이 반드시와 함께 등장하니 기쁘고 마음이 즐겁다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좋은데... 왜 안 되는 걸까. ‘행복도 도 이뤄지지 않는 세상살이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매일 다들 힘겹게 애쓰며 버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정한다고 달라질 리 없는 과학적 발견들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가끔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우주의 역학운동이나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나 죽음은 결합한 원소들의 분해라는 사실들 말고... 그래서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어떻게 유의미하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더 이야기 하고 나누고 싶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날마다 편지를 쓰고 있지만 너에게 무엇을 강요할 생각은 없단다. (...) 그냥 네가 자신의 의지대로 잘 성장하기를 지켜봐 주기를 바랄 뿐이다너도 가족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살피지 말고, ‘개인을 존중하는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시모주 아키코*는 가족이라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인간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고쌍둥이라고 해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다르며개인으로서의 자유는 헌법상에도 보장되어 있음을 들어 가족 간에도 역할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가족이라는 병>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어차피 한이는 한이만의 인생을 찾아 떠나야 하니 말이야나의 역할은 오로지 한이라는 행성을 엄마가 가 보지 못한 우주의 궤도로 올려 보내는 것이니 말이야. (...) 한 번 실패하면 계속 시도하면 되니까 긴장하지 마어차피 산다는 건 수없는 시도와 실패로 점철된 순간들을 흘려보내는 것뿐이니까.”

 

누구의 삶도 지나면 순식간에 지나고 말 것이다삼 대의 삶을 다 합쳐도 여전히 세월은 그렇게 느껴질지 모른다나는 태가 태어났을 때부터 계셨던 조부모님들이 어느새 떠나신 것이 여전히... 어떻게 그럴 수가그분들이 모두 그렇게 사라지셨을 수가하며 한 번씩 원망을 퍼붓고도 싶고내 부모가 매일 쇠약해지시는 것 또한 얼마쯤은 거부하는 현실로 억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순서란 것도 없이 우리 중 누구도 어느 순간 삶이 끝나 버릴지 모른단 가능성을 잊지 않으려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삶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그러니 가족으로 사는 눈물 나고 서럽게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최선을 위해 애쓰는 마음과 모습을 좀 더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떠날 때까지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함께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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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노빈손의 달려라 달려! 취재 25시 노빈손이 알려 주는 전문가의 세계 4
박형민 지음,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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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언론사 주식을 오래 보유하기도 했지만 저널리즘도 기획기사도 스타기자도 모두 사라졌나 의아하기도 하고 포털을 살찌울 소식만 퍼 나르는 일이 요즘 기자일인가 싶기도 하다물론 어느 분야든 모두 그럴 리는 만무다문제는 그런 일에 열심히 이들이 주류이고 승진하고 세력을 형성한다는 것.

 

이런 기사는 중대사회범죄가 아닌가 싶은 글들도 있지만 기레기나 기더기라는 멸칭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원칙적으로 그릇된 일이고 그렇게 부른다고 뭐가 바뀌지도 않는다수치심이나 염치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하지도 않고 그런 일들을 태연히 하는 사람들은 멸칭쯤은 안중에도 없다.

 

유튜브 세대들은 언론 미디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이들은 누구나 자신이 만든 영상 콘텐츠를 세상에 제공할 수 있다고 배웠고 그런 이들은 크리에이터라 부른다정보와 지식과 사실과 진실과 논설과 가짜뉴스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고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고 있을까.

 

이 책은 7년차 신문 기자인 박형민 저자의 네 번째 소설책이다 특이사항(?!) 수학 전공그가 믿는 기자란시민들이 부여한 신뢰와 기대를 무기로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의 진실을 파헤치고권력자들의 비리를 추적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라 한다.

 

심층 취재와 탐사 보도에 익숙한 기자로서 책 속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한 사건 추적처럼 느껴진다취재 경험이 현장감 가득하게 펼쳐지니 한 편의 모험담 같다시사성과 현실성도 휘발되지 않아 김영란 법이나 자극적인 기사를 옹호하는 관행주의에 대한 고발도 있다그리고 외부에서는 잘 알 수 없는 언론사 내부의 부조리와 부패도 끔찍함을 덜어내고 재밌지만 날카롭게 담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웃픈 노빈손(NO빈손으로 보이지요.)은 인턴 기자인데 적극적인 취재 방해와 기사 지침을 뿌리는 멸칭의 대표적 사례와 같은 상사의 지시로 고생이 많다승진을 바라는 것은 직장인의 당연한 목표이기도 하고새로운 법은 적응할 때까지 힘든 점도 있을 수 있지만 뇌물을 받고 날조된 기사를 쓰는 건 직업윤리를 따지기 전에 범죄다사과도 변명도 필요 없다구속 처벌하면 될 일반면에 기자 정신을 장착한 선배 기자의 이름은 고생만... 울컥...

 

그래도 언론의 순기능을 믿고 참여하고 싶은 청소년들이 읽는 다면 이런 비판할 모습 이외에도실제로 기사가 만들어 지는 과정과 기자들의 작업 환경 등을 흥미롭고 유익하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보가 어떤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한반도 분단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오보를 접하며 언론의 역할에 대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그 후에도 오보 기사들은 이어졌고 그로 인해 관련 업종 종사자들의 막대한 피해와 사회 경제 손실은 물론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는데 언론이 얼마나 책임감 있게 정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을 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언론은 강조할 필요 없이 중요한 사회의 창구이자 기능이다이런 시절에도 나는 종종 무척 감사한 기사들로 세상을 배우고 오류를 바로 잡고 기억을 새롭게 한다. ~카터라통신은 자극을 제공할 수 있을 진 몰라도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재활용도 불가능한 허접한 쓰레기이다독성도 가득한 쓰레기를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먹고 소화시킬 이유가 있을까.

 

사회와 국가를 다루는 스케일의 언론 관련 소설이지만 나는 이 책의 마무리에 언론과 독자가 합세해 결국엔 살해하고만 아깝고 서러운 사람들 생각이 떠오른다이제 댓글 창은 없어졌지만 수없이 특정인들을 겨냥해 선제공격을 하던 기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범죄자들과 그들을 고용하고 그런 식의 업무를 하도록 부추긴 조직들과 그에 편승해 비수처럼 꽂힐 악랄한 말들을 쏟아내던 댓들 작성자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는가오늘도 제 밥은제 권리는 모조리 잘 찾아 먹고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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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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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코너>와 <위스퍼링 룸>으로 출간된 전작들을 체감상 100만 명은 읽고 누구나 다 사랑하는 캐릭터가 된 듯한 제인 호크 시리즈 저와 제 주변만 그런가요 의 고대하던 세 번 째 작품 <구부러진 계단>이다.표지 디자인 후보 중에 제일 맘에 들었는데 출간되니 더 강렬한 느낌!

 

이제까지 시난고난 우여곡절을 다 겪은 제인이 드디어 알아 낸 범인은 나노테크놀로지로 인간의 뇌를 조종하는 테크노 아르카디언이다나노테크놀로지가 의학 분야에 다양하게 활용되면 암세포만 추적해서 죽일 수도 있고 장밋빛 전망을 들려주는 연구 보고는 몇 차례 들었는데범죄 수단으로 등장하니 흠칫 놀라게 된다소설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듯한 경고가 들린다.

 

잡히지 마라주사를 맞으면 죽음보다 더한 짓을 당할지도...”

 

뇌를 망가뜨리는 것도 아니고 뇌 속에 네트워크를 설치해서 메시지를 주입하고 조종하는 원리이다그러니 멀쩡하게 살다 자꾸만 뇌에서 들리는 말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살인도 하고 자살도 하고 타인의 조종에 저항도 못하게 된다.

 

심각한 지점은 이런 뇌조종 범죄의 목적이 자신들만의 기준에 따라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혼란스럽고 애매한 일들이 많을 때는 선명한 것들이 반갑기도 했다그러다 사는 일이어떤 일이라도 명료한 것들은 드물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자선명하고 확신에 찬 말들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은 상상도 안 하는 이들의 신념들이 무섭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무균실 속에서 살아가는 체제순응론자들이에요상식과 보통 사람들을 경멸하죠.”

 

한 때 무지한 자가 용감하고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큰 사고를 친다는 말이 꽤나 회자되었는데내 경험은 좀 다르다많이 배운 똑똑한 확신범들이 큰 사고를거대한 범죄를피해와 후유증이 큰 대부분의 범죄를 저지른다.

 

현실에도 이미 활용 가능한 감시카메라위치추적장치사물인터넷 등은 곧 그들의 범죄 수단이 된다.현실의 기업들이 몇 개의 거대한 독점 기업화 경향을 실제로 보이고 있고 전 세계의 권력 구도와 질서도 치열하게 재배치되는 시절이다소설 속 악의 무리들이 정재계언론 요직을 장악한 것이 낯설지 않아 답답하다. 우리의 제인이 천신만고 끝에 악당의 정체를 밝혔는데 어디다 알려야 하나.

 

당연히(?) 이들이 제인을 여러 죄목으로 공격하는 일은 손가락 튕기듯 쉬워 보인다소위 클래식한 방법인 누명씌우기인데디지털 조작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세상은 그 누명 벗기가 우주 최고로 어려워 보인다더구나 제인의 아들까지 노리는 비열한 놈들!

 

제인은 바위 선반에서 굽어보는 수백 개의 퀭한 안구와 섬뜩한 미소 앞에서 멈췄다. (...)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이 공간에는 온통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저 바깥 세상 역시 죽음투성이다이상과 현실 사이에동작과 행동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죽음의 음침한 계곡에서도계속 움직여야 한다행동을 계획하고 단호하게 실행하자망설임은 치명적이다.”

 

끔찍하게 힘겨운 와중에 소설가들을 문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더없이 위험한 요인으로 간주하고 끝까지 가진 자원을 다 쏟아 부어 추격하는 구성은 어쨌든 시리즈의 흐름 상 조연에 해당하는데도 무척 흥미롭고 재밌었다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는 이들이 가진 혁명성에 주목하다니!

 

빛이 있을 때 길을 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소년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박쥐 똥을 먹고 사는 동굴 속 쇠똥구리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그때야말로 너는 뭔가가 되는 거야이 계단은 인생이다소년인생의 진실이 어둔 세상의 진실잔혹하고 악랄한 인류의 진실살아남고 싶으면 나처럼 강해지는 법을 배워라이 비루하고 한심한 것아구멍으로 내려가서 배워소년내려가.”

 

전작의 결말에서 답답하고 궁금해서 어찌 되었나 조바심이 났는데이번 편은 <구부러진 계단>에 도착해서 끝이 나는 바람에 비명을지금 당장 여기서 더 얘기해 달라재밌는 과정만큼 짜릿한 결말을 볼 수 있나 싶어 한 번에 다 읽은 것이 서운할 지경이다스토리의 연결이 매끄러워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되고인물 자체가 매력적이라 갈수록 더 애틋해지는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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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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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20세기 어느 날프랑스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는 작품을 처음 만났다<프린스 앤 프린세스보고 보고 또 보며 마치 애니메이션 종사자가 될 것처럼 집착하고 사랑했다홀렸다가 맞는 걸까지금도 집에 CD가 있다 옛날 옛날 CD라는 물건이 있었답니다.

 

어쨌든리베카 솔닛 저자가 반가운 만큼 실루엣으로 표현된 일러스트에 두근거렸다한 장씩 넘길 때마다 설레는 멋진 책이다내용은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많은 기대를 하진 말자고 읽기 전에 생각했다솔닛이지만솔닛이라하더라도 직진하거나 삐끗하거나 뭘 하든 재밌게 쓰면서 새로운 감동을 주기가 무척 힘든 작업이라 생각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건 있을 수가 없고그냥 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밤이 올 테고 다음에는 내일 아침이 오고 그리고 그다음 날또 다음 날이 오고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지구는 해 주위를 돌고 도마뱀은 햇볕이 따스한 벽에 붙어 있고 생쥐는 달밤에 케이크 부스러기를 먹으러 밖으로 나오겠지.”

 

그래도 그림들에 행복해하며 기대 이상 유쾌한 내용들이 재밌어 하며 남은 분량을 아까워하며 읽었다. 그러다 소름!! 척추를 흐르는 뜨거운 느낌은 전율인 건가.


쿠키와 사랑을 나눠 주고 자유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주는 신데렐라를 사랑하는 동네 아이들도 있지.  하지만 친구들은 이제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쓰지 않는대. (...) 이제는 다들 원래 이름으로 불러이렇게.”

 

엘라.

 

신데렐라(Cinderella)에서 신더(cinder, )’를 빼면 엘라가 된다는 사실은 그때는 미처 생각 못 했고 글을 쓰는 도중에 떠올랐어요.  리베카 솔닛

 

반 백 년을 살도록 한 번도 생각 못했다말하자면 신데렐라란 명명은 대상자를 모욕하고 놀리기 위해 부르는 일종의 학대의 장치인 것인데그런 관계 속에서 벗어나 제대로 온전히 살라고 응원하며 본 이름을 찾아 불러 줄 생각을 못하다니.

 

아주 좋아하는 동화는 아니었고 어릴 적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쳐도 

그래서 신데렐라는 놀림 받기 전 이름이 뭐였어?” 

왜 아무도 묻거나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 저랑 제 지인들만 처음 듣는 건가요.  

이게 다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습니다가 주는 망각의 효과라 우겨 보려 해도 큰 위로는 안 된다.

 

이래서...... 리베카 솔닛 책은 의심 말고 믿음으로 앞으로도 감사히 다 읽는 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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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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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후미코

 

궁금했다.

강렬했다.

아무리 독서일 뿐이라지만... 읽고 나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갑자기 후미코의 머리 위에서 유자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일순 감지하고 경탄했다.

세상은 자연은 이렇게도 아름답고,

세상의 고요함은 이렇게도 평화로운가 하고 말이다.”

 

이 낙천성의 근저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참한 인생을 보내던 여자아이치고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다.

대안은 있다.

왜냐하면 후미코 스스로가 바로 사회의 대안이었으니까.”

 

내가 나의 행위에 요구하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 나와서 자신으로 되돌아갈 것.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표준으로 할 것.

따라서 나는 옳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완전히 자율적인 의미임을 밝혀둡니다.”

- 29일 밤중에, 1926년 2월 26일 서간

 

자살을 준비했을 때가 중단했을 때가 열세 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충격에 무감해지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유자매미로 죽음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린 아이는

탈피를 하고 성인이 되어 한 시절을 제 목소리로 울리며 살았다.

  

무자격자를 얕보지 마라.

나의 출생은 데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다.

탈진실post-truth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사실fact 이전에 존재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를 그 누구도 지배할 수 없으리라.

 

아나키스트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자나 여타의 이해 부족 몰지각 에 따른 번역이 아니라,

반복해서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집중된 권력만이 가능한 거대한 폭력을 떠올리며

반드시 자율성과 함께 제대로 이해되길 바란다.

 

인류가 사회문화적으로 얼마나 진화를 거듭해야

자율성을 갖춘 개인의 연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 속에서도 잘 보이진 않지만.

그건 내 상상의 빈약함과 한계로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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