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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페머러의 수호자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7
조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6월
평점 :
아프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런 일요일에 이 책을 읽어 다행이다 싶은 고마운 기분이다. ‘수호자’란 단어에 이끌렸을까. 모든 것들이 다 망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시절이라서. 나는 무엇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수호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주인공 ‘나’는 평범하게 지독한 고생을 겪는 취준생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하다 기간제 계약직으로 ‘세계희귀물보호재단’에 입사한다. 어쩌다 한국의 젊음은 통과해야할 지옥들이 이렇게 많은 삶을 사는 것인지. 거기가 끝이다! 힘내라! 라고 말해 줄 수 없어 미안하고 참담하다.
‘나’는 믹서에 영혼을 갈아 넣듯 일한 대가로 기간제 연구원으로 임용되고 미국에서 합동 연수를 받고 선임 교관인 ‘제인’을 만나게 된다. 한국 지사장으로 부임한 제인이 ‘물물교환만 가능한 특별한 경매’에 나를 동행하게 해주었다.
주체측이 참가 조건으로 요구한 물품은 ‘아직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예언서’이고 제인과 ‘나’가 낙찰받을 물건은 스타트렉의 가상 외계인인 클링온인이 사용하는 클링온어를 창안한 스토리 작가의 비망록인 ‘신들의 핸드백’이었다.
비틀즈보다 롤링스톤, 스타워즈보다 스타트렉, 이렇게 살짝 친구들과 취향을 비껴가며 살아온 나는 스타트렉과의 간만의 조우만으로 기분이 휘익 날아오른다. 모토롤라 폴더폰도 생각나네...
체력과 기분이 최저인 상황에서도 자꾸 웃으며 재밌게 읽었는데 적은 내용을 보니 무슨 말인지... 내용도 재미도 전달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글 분위기로는 믿지 않으실 지도 모르지만 무척 유쾌한 작품이다. 특히 낙찰을 위한 테스트 장면, 환각상태에서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장면들은 난해하면서도 무척 웃겼다.
“너의 미궁을 시험하라!, 너의 시대를 시험하라!, 너의 우주를 시험하라!”
갑갑한 현실에서 책 속에서나마 국가들을 마구 넘나들고 우주와 인류 고대사를 아우르는 거대한 신비를 만나는 일도 신난다. 그렇다고 저 공중에 뜬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꼼꼼하게도 잘 녹아들어 있다. 저자가 수호하고 싶었던 것은 사물성을 띤 이페머러ephemera*의 삶을 사는 이들, 쓰고 버려지는 사람들이었다. 분노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자 서글픔이다.
* 이페머러ephemera : 수명이 아주 짧은 것, 잠깐 쓰고 버리는 것.
메시지만으로는 부족할까 각국 특수요원들을 등장시켜 활극까지 보여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분명 재밌게 느끼라 배려해준 장치인 듯! 무거운 소재들을 이렇게 가볍고 유쾌하게 보여주려면 얼마나 대단한 상상력에 필요할지,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고 감사한다.
소설은 창작자나 독자에게 이런 재미와 통로와 세상을 열어주는 장치로서 최고의 장르이다. 특히 영민한 저자가 착실하기까지 한 태도로 부스러기 없이 자신이 펼친 이야기들을 다 긁어모아 착착 기분 좋은 완결성을 가진 결말을 보여준다면.
만약 1000쪽이 넘어가는 분량이라면 하루 종일 이 이야기 속에 머물 수 있을 텐데, 다 읽고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오늘은 더 아쉽다. 과학과 음모론과 현학과 풍자와 위트가 만들어낸 해피엔딩에서 조금 기운을 얻는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