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시공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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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치매를 앓는 상황에 대해 자식이 보고 겪은 병상일기와 다큐멘터리자전소설에세이가 드물지 않게 보입니다제 지인들친구들이 먼저 겪은 일이기도 하고 저도 남의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늘 두렵지만 공부도 준비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읽게 됩니다.

 

아무래도 엄마가 치매에 걸린 것 같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니 더 피할 수 없어진 노후의 모습이기도 하고나이와 관계없이 발병되기도 하니 점차 더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대비해야할 듯합니다특히나 개인에게 가족에게 전담시키지 않고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가 세심하게 마련되고 운용되길 바랍니다.

 

대표적인 장수국가인 일본에서는 어쩌면 더 흔한 풍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고령의 부모님이 고향에 사시고자식은 도시에서 직장 일을 하는 가족 구조입니다발병이 되었다고 해서 당장 일을 그만두고 간병을 시작하기도 힘든 형편입니다.

 

치매진단을 받은 엄마를 93세의 아버지에게 떠맡기고 이렇게 떠나는 게 정말로 잘하는 일일까. (...) 버스 안에서도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부끄러울 만큼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부모의 모습을 촬영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부럽습니다이전에 저자 본인이 40대에 유방암에 걸린 경험을 다큐멘터리 <가슴과 도쿄타워나의 유방암일기>로 제작해서 방송에 내보낸 경험이 있습니다그리고 평상시에 부모님과 만나는 일상을 20년이 넘게 카메라에 담아 왔다고 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기획을 따로 해서 영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참 다행이고 그래서 아마 시청자들의 반응이 대단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치매를 겪는 모습도 각자 다 다르겠지만 제가 책을 읽듯 영상으로 배우고 준비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겠지요.

 

카메라를 들고 자세를 취하면서 자연스레 객관적인 시점을 취하게 된다그러면 딸의 시선으로 볼 때는 비참하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일이 의외로 다르게 다가왔다. (...) 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점차 왠지 모르게 이 두 사람 훈훈하다좋은 캐릭터구나사랑스럽다고 느끼게 되었다.”

 

책 제목과 일러스트가 온화하고 따스한 것도 참 좋습니다괴로움과 슬픔은 대단하겠지만 병 자체가 된 것이 아니라병을 앓으며 사는 이전과 같은 존재로서의 삶을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담아낸 것만 같습니다


다행히 저자는 아버지가 곁을 지켜주시고데이케어센터의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제가 경험이 없어서인지센터장과의 대화가 무척이나 안심이 되고 뭉클합니다.

 

내가 뭘 해야만 한다고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지금도 따님은 충분히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우리를 부모님과 만나게만 해주시면그걸로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는 말이 얼마나 의지가 될까 짐작해봅니다몇 달 전에 대한민국의 치매국가책임제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살펴보았는데 다른 변화가 있는지 잠시 또 둘러봅니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이나 보도자료로 가셔서 
'치매'을 입력하시면 관련 정보를 모두 찾으실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비용 부담에 대한 내용부터중앙 정부만이 아니라 지자체별로 협력하는 정도가 다 다르고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기업들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치매 관련주에 대한 정보가 엄청나게 업데이트 되고 있는 것도 한국 사회의 일면입니다.

 

당사자들에게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아쉬운 면면이 있더라도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보다는 분명 도움을 받은 이들이 늘었을 거란 생각에 조금은 마음을 풀고 긴 숨을 쉬어 봅니다.


 멀게 느껴지는 정책으로 존재하지 말고 곳곳에 접근 가능한 치매센터들이 최대한 잘 활성화되기를 응원합니다그리고 부디 실질적인 예산 책정과 고용 인력 확보에 차질이 없길 바랍니다.

 

인간적이고 따스하고 긴밀한 사적인 내용을 담은 책을 차분하게 읽고 생각은 내가 사는 현실에 오래 머물렀습니다지금 할 수 있는나눌 수 있는 것들을 망설이지 말고 뭐라도 하고확실하게 치매 진단을 받으면 결과를 인정하고최대한 오래 즐겁게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상황을 바꿀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치매를 앓는 이도 가족도 친구도 지인들도 다치고 상처 받지 않고 관계를 이어나갈 현명한 제안이라 믿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뜻밖에 개인으로서의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간혹 고민을사는 일을 간명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생각을 튼튼하게 단단하게 하는 노력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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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안개초등학교 1 - 까만 눈의 정체 쉿! 안개초등학교 1
보린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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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동화인데 강렬한 미스터리라니다섯 번째로 전학 온 학교가 하필 1년에 300일은 안개에 덮이는 곳이라니암흑도로와 빨간목욕탕……무섭고 궁금하다.

 

읽고 싶어 두근거리며 유일한 초등생에게 슬쩍 물어 본다다행히 읽어 보고 싶다고 해서 신나서 출간 전 가제본부터 읽어 보자 신청했다<어린이 미스터리 탐험단>이 되었다어른인 나도 아이만큼 기쁘다.

 

컬러 전인 표지의 일러스트가 멋지고 묘하고 매력적이고 살짝 무섭다상상 속에서 너무 이야기를 키웠나어른답게 아이 먼저 읽으라 양보하고 궁금해 하다 이제 드디어 순서가(?) 되었다.

 

작가 소개 4줄 읽고 팬심이 무럭무럭 큰다창비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품들이 거의 매번 엄청 좋았던 경험 때문이다차례를 보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조금 서글프다그래도 내용을 읽으면 알게 되리라.

 

‘100년이 넘은 학교학교 뒤 음침한 아파트지하에 미라가 살고 있다는 소문학교 앞 암흑도로는 늙은 가로수들이 머리를 늘어뜨려 한낮에도 어두침침건너편 해골 계곡안개를 구물구물 피어 올리는 큰 강은 빨간목욕탕이라 불린다.’

 

묘한 분위기의 묘한 학교에 전학 온 주인공 이름은 묘지은이다전학을 자주 다니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학교에서 묘하고 불길한 느낌을 안 갖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어쨌든 지은이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그나저나 아이를 묘지라고 부르고 혼내는 담임은 뭔가이야기 속이지만 분노가 차오른다.

 

학교 텃밭에서 만난 조마구와 지은이는 친구가 된다당연히 친구에게는 힘든 일을 털어 놓게 되는 것이고자신을 공공연하게 망신시키는 선생님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꺼낸다.

 

사실 표지 그림에서부터 나는 즉각 어떤 무서움을 느낀 조마구는 이름도 연상되는 바가 있어 무서웠는데 역시무서운 면이 있다스포라 상세 언급 생략!

 

지은이 역시 새 친구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피하고 싶었으나 자신을 쫓아다니는 까만 눈동자가 무서워 다시 조마구를 찾아 가게 된다.

 

내가 어릴 적 학교괴담들과는 아주 결이 다른 이야기이고아이는 제가 다니는 학교의 괴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1년 다니고 코로나로 변화가 극심해서 아이들끼리 모여 괴담 나눌 틈도 없었을 듯하다.

 

확실한 건이 괴담이 엄청나게 더 섬뜩하고 무섭다는 것이다일단 담임이 너무 끔찍하고까만 눈동자가 쫓아다닌다니 그 역시 끔찍하다괴담이란 결국 당사자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일까아니면 더 어둡고 깊이 묻힌 부당한 사건을 알려 주는 이야기일까?

 

우리 집 원칙주의자이자 성실하고 진지한 초등생의 감상평은, 

일단 저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과 대통령에게 알려서 얼른 학교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담임은 아주 중요한 분이라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조마구는 무서울 수도 있지만 힘든 사람을 돕고 친구가 되어줬으니 진짜로는 좋은 존재라 한다

좀 힘든 성격(?)은 사귀면서 잘 얘기해서 서로 맞춰 가면 된다고 하니 

무척 담담하면서도 강한 결단력이 필요한 평가이다.

 

초등생의 평가를 듣고 나니 조마구에 대한 무섬증이 사라졌다자꾸 마구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멜로디는 모르고 랩처럼. “조막만한 조마구걸핏하면 혼자지혼나면 커지지커지면 세지지세지면 한입에 호록냠냠 맛있다…….”

 

주인공이 3학년이니 3, 4학년들 읽기에 가장 적당하게 재밌지 않을까 한다물론 40대인 나는 충분히 재밌게 읽었고한국어 단어 공부도 했다.

 

비실비실이 아니라 비슬비슬’ : [부사자꾸 힘없이 비틀거리는 모양.

되록되록 : [부사크고 동그란 눈알이 자꾸 힘 있게 움직이는 모양.

조막 : [명사주먹보다 작은 물건의 덩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책은 편 까만 눈의 정체이고다음 편을 읽어야 이야기를 확실히 알 수 있다하루 빨리 2권을 출간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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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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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살던 사회의 모습입니다책 소개를 접하고 아차싶었지요현대문명의 본질을 알려 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문서가 존재를 규명하니까요.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다니행정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정에 편입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한국 사회를 새삼스럽게 보게 합니다이런 우선순위는 누가어떻게 정한 것일까요.

 

미등록 아동들을 죄인이라고 전제하죠저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학교에 갔을 뿐이거든요그 사이에 아빠가 본국으로 떠나니까 다음날 갑자기 불법체류자가 된 거에요.”

 

출생신고와 더불어 주민번호가 부여되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면서모두 가 국가에 등록되어 사는 줄 알았던 예전 생각이 납니다한국적 특수상황이란 것에 무척 놀랐지요.

 

그럼 다른 나라들은 다 무질서와 혼돈과 범죄가 판치는 상황인가요전면적인 통제 사회에서도 오히려 한국의 범죄 양상과 순위를 보면 한편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하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의 편견은 대상과 직접 부딪히며 생기는 경우보다는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경우가 더 많다. (...) 난민을 본 적이 없고 잘 모르기 때문에 가짜 뉴스만 보고 이미 편견을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주민등록제와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살아 볼 기회를 모르는 새 적당히 교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열렬한 생각을 하니 당장 책을 펼쳤을 것도 같지만미루고 있다가 책도 안 읽고 은유 작가님 북토크 먼저 보고읽고 참여하신 분들의 질문들에 반성과 공부를 하고그러고도 미뤄두다 '꼭 읽으라!' 책까지 보내 주신 <국가인권위원회> 담당자분께 죄송해서 허둥지둥 펼쳤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고 또 갚기 위해서라면시인의 기도대로 우리는 영원히 슬퍼야 하리라.”

 

비대면을 이유로 참여도 행동도 줄어든 저와는 달리 멈추는 법 없이 늘 열심히 소신껏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이 반갑고 감사하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한반도에 갇혀 사는 일이 종종 숨 막힐 듯 답답한데이렇게 모르는 세상 소식을 들으며누군가를 무시하고 소외시키기엔 충분히 넓고 복잡한 세상이란 생각도 합니다


보험 가입이 안 되고자격증 시험을 볼 수 없고대학 진학도 못하고이 상태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이루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노력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니까 또 다른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획서기획서보고서 등등 온갖 문서로 업무를 파악하는 저는 어쩌면 누구보다 문서의 권위를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그래서 적어도 시간을 내어 실존보다 힘이 세진 사회에서 미등록된 아동들의 삶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의무가 있다고 느낍니다.

 

알아야겠다.” 이런 관심이나 생각이 생기신 분들이 많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우리는 누구를혹은 무엇을 알아서 돕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동안에만 사람을 알고 진실을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마리나페버민혁카림달리아


미등록 이주 노동자는 20~30만명미등록 이주 아동은 2만명이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대한민국은 <유엔아동권리협약> 비준국가입니다즉 미등록 이주 아동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와 아이를 모두 추방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추방이 비일비재합니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게 공적 지원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미나시타 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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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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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라고 명명하니 신비롭고 멋지고 명예롭고 신나는 시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법도 안전장치도 국가 간 협약도 없이 잦은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이기도 하다살고자 한다면 영웅이 되고자 한다면 타인을 죽여야 한다.

 

명성이라는 게 희한한 물건이란 말이지이 세대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기억의 대량학살 속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야. (...) 우리는 잠깐 타오른 횃불의 불길과도 같은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피로 이루어진 세상그 피로 영광을 쟁취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싸우지 않는 건 겁쟁이들뿐이었다왕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죽든지둘 중 하나였다.”

 

절박한 절명의 시대라도혹은 그런 시대이니 목숨을 건 사랑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우리가 복기하고 찬양하는 지극한 사랑에는 언제나 죽음의 배경이 짙고 깊다시대도 상황도 다르나 누구의 사랑이라도 간절함과 지고한 존재 방식 때문에 감정의 밀도가 높아서 슬픔도 눈물도 참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그의 존재가 신발 속으로 들어온 돌멩이와 같아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그의 이름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제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눈이 멀어도 그가 숨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죽더라도 땅 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과몰입도 모자라서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문장들에 설렌다계절이 바뀌는 저녁이라 줄어드는 자외선 탓을 해본다넘긴 페이지가 많아질수록 신 내린 듯 쓴 문장들이 늘어난다이토록 실감나는 전쟁의 장면전쟁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긴장충돌공포기대를 각자의 것들로 모두 체험한 듯 기록하고 그려낸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아무 지분도 없었던부재도 모자라 모멸 당하던 존재인 님프를 <키르케Circe (2018)>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한 작품을 만들어 낸 저자의 저력을 다시 느낀다<키르케>가 두 번째 작품이나 먼저 읽은 탓에 이렇게 느낀다.

 

호메로스일리아스아킬레우스라는 이름들에 익숙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완역본을 읽어 보려 노력은 했지만 결국 읽지 못한 나도 이름과 간단한 이야기들만은 기억한다그럼 파트로클로스Patroklos, Πάτροκλος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그는 주변과 가장자리와 경계와 약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능력자 매들린 밀러의 화자이며이 작품 속에서 완벽한 부활을 누린다.

 

최고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극심한 우수성의 문화에 살았던 그리스 영웅들그런데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아닌 친구 아킬레우스가 최고라는데 만족하는 인물이다그와 친구가 되고 그의 그림자가 되는 걸로 충분하다 여긴다파트로클로스는 그런 자신의 성정에 괴로워하지 않았고그것이 바로 파트로클로스를 독특한 인물로 만든다나는 이 놀라운 인간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저자의 말 중에서



첫 소설인 <아킬레우스의 노래The Song of Achilles (2011)>는 10년간 집필한 작품이다그 노고를 짐작해보면 재밌고잘 읽히고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얼른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이 미안해진다평생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은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가 생을 가진 인물로 살아나고사랑하는 이야기에 홀린다.

 

연약하지만 성품이 곧은 이 파트로클로스 -를 사랑하는 것도그 대상에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도그 사랑을 죽음으로부터도 지키겠다고 하는 것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내 설렌다사랑은 목적도 없이 열렬하나 인간은 인간적일 뿐이라 슬프고 아름답다.

 

행복했던 영웅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영웅이 되는 길에 쏟아진 피를 생각하면 그 운명은 비극 외에는 어울리는 것이 없다고 느낀다아킬레우스는 행복한 첫 번째 영웅이 되고 싶었고저자는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트로이 전쟁은 기록된 전쟁사로 기억했을 뿐 참여했거나 휘말린 실제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공감까지 하며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아킬레우스가 느끼는 분노가 저자의 섬세한 서사로 극적으로 펼쳐지니 평생 공감하리라 상상 못 해본 인물의 분노를 받아 안은 듯 느끼며 읽는다.

 

신들의 거래란 늘 그랬다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살려 주지 않았다이들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예정된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초월하는 방식 밖에는그런 믿음 외에는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Achilles and Patroclus: Archetypal Heroes


The photo above shows Achilles mourning the dead Patroclus”, 

a scene from the front panel of a Roman sarcophagus that is currently at the museum of Berlin.


나이가 들어가니 믿고 싶은 것들이 늘어난다땅이 꺼지듯 슬프고 아픈 그리운 이들의 죽음 이후에 그들 모두가 어딘가 좋은 곳에 가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를 나누고 싶다저자의 명백한 의도에도 역시 동조하고 싶다이들이 저승 어딘가에서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고.

 

추억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속도가 막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말로 나오는 게 아니라 꿈처럼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른다이런 게 있다고 나는 말한다이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다고여름 햇볕을 받으면 그의 머리칼이 어떻게 보였는지달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수업을 받을 때면 올빼미처럼 진지했던 그의 눈빛이런그리고 이것행복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읽는 동안 느낀 설렘은 결말에 이르자 그만큼의 슬픔으로 바뀐다그동안 쌓인 친분이 커서인지 슬픔의 크기가 오히려 더 크다내가 어설프게 알던 아킬레우스는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에서 그려진 오만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미지였다.

 

매들린 밀러는 고전을 재해석한다기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재집필한다개연성에 휘말려 들어 설득되고 나면 중간에 빠져 나올 길이 없다감정의 쓰임이 운명에 도전하듯 강렬하다읽기 전이라면 마지막 페이지의 스포를 꼭 피하길!

 

퍼즐 풀이의 달인처럼 구성한 모든 질문들이 결말에 이르러 모두 정확하게 회수된다복선인 줄 모르고 지나친 내용들이 답지와 동시에 복선임이 밝혀진다도망치려고 한 모든 시도가 예언을 구현하는 조각들인간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운명<아킬레우스의 노래>에 연주되는 것은 파트로클로스의 노래이다.

 

언어를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는 곳들을 여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언젠가 터키로 향한다면 가방 속엔 <아킬레우스의 노래>일정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묻고 이름을 새겨줘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줘.”

 

인간이 사는 방식에는 승리보다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전능한 신이 아닌 나약한 인간이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기적이다신은 인간을 실패 없이 벌하는데 골몰하나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고민거리들을 거듭 생각하며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려 한다.

 

현실의 현재의 인간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성공으로 인한 오만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휴브리스휴먼이 아니라 스스로 야기한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길을 가길 간절히 바란다.

 

휴브리스 hubris : 문학그리스 비극에서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신과 갈등을 일으키고그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이나 영웅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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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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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구독에 열의가 없는 제가 알람 설정까지 해 둔 유튜버는 스티븐 킹 작가입니다불쾌한 적도 실망한 적도 없어 꾸준한 애독자가 되었습니다작가의 육성으로 듣는 작품을 무척 좋아하는데 <If it bleeds>를 낭독해 주어 신났지요여러 번 듣고 주변에도 권했습니다.

 


영어책 그대로 읽어도 좋고 중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깔끔하고 멋진 문장들 - ‘빨리 빨리의 최강국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으로 읽어도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더구나 체온 유지만으로 기운이 달리는 여름에는 단편이 좋은데이 책은 단편 4개로 이루어진 책입니다더 바랄 게 없습니다.

 

늘 그렇지만 600페이지가 아쉽습니다언제 다 읽었는지 서운합니다신간 기다릴 생각에 아득합니다시작하기 전에물과 식량을 준비해 두시고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휴대폰도 가능한 멀리 하시고 재밌게 읽으시기 바랍니다분명히 쉬지 않고 방해 받지 않고 빠져 들어 머물고 싶어지실 테니까요.

 

버릇처럼 의식처럼 표제작부터 읽어 봅니다.

 

1. 피가 흐르는 곳에

<아웃사이더>란 작품을 읽으신 독자에게 아마 더 반가울 작품입니다그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니까요결말을 알면 모든 매력을 다 알아 버린 듯해 급격히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추리스릴러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려 쉐이프쉬프터(shape shifter: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가 등장합니다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포인가 고민스럽네요혹자는 이 설정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도 여기는데 소설과 드라마에서 엄청 써 먹음 킹에게는 소재가 무엇이든 스토리는 늘 재밌으니 다 좋습니다.

 

작자 미상이라고 써서 읽어 보라고 해도 이건 스티븐 킹의 작품입니다. 초능력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호의를 가지지 않는 능력이고 보면 이 존재가 사는 모습이 행복할 리가 없겠지요더구나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을 식량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더욱 꺼림칙하지요.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연명하고 살찌고 심지어 부를 누리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도 있지요어쩌면 짐작보다 많을 수도 있겠네요제목 - 피가 흐는 곳에 이 의미하는 바를 아시면 바로 추축이 가능합니다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특종이 되는 업계이니까요.*


* if it bleeds, it leads :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 폭력적인 것이 더 잘 팔리는 미디어 산업.


 태생적인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순기능마저 사라진 끔찍한 괴물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분명 종사자들의 책임입니다.

 

괴물의 시선으로괴물 같은 어투로괴물 같은 기획으로혹은 협잡과 오보와 악의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흥행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의 행태는 그야말로 얼굴을 바꿔가며 제가 가진 직업의 공적 가치도 역할도 안중에 없이 제 이익만 챙기는 쉐이프쉬프터에 다름 아닙니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은 내용 노출에 미안합니다그래도 킹의 작품은 직접 읽으면 다른 차원의 재미와 즐거움이란 걸 이마 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2. 해리건 씨의 전화기

너무 슬픈 일이 떠올랐지만 스티븐 킹의 결말을 믿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가까운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번호를 나의 연락처 목록에서 볼 때지울 때혹은 지우지 못할 때.

 

상대의 사후에 어떤 이유로든 그 상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나요만약 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내가 떠올려야 하는 아픈 기억들과는 별개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상반된 두 세대에 속한 각각의 인물들로서 불완전한 기술을 사용해 서로 연결됩니다무척 특이하고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3. 척의 일생

물리학에서 다루는 세상 프랙털 과 물리학에서 현재까지 불가능하다고 밝힌 세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 함께 어우러져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엄청 재밌고 서글프네요삶의 끝을 알고 과거로 걸어가는 일이니까요.

 

끝을 안다는 건 나라면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척의 할아버지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하지만 슬픔에 빠져 살지 않고 무척 성실하게 사신 점이 멋집니다그가 경험한 시간은 다른 이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한대는 숫자가 아니라 과정입니다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온 세상을 품고 있다.”

 

4. 


(안 돼라고 소리 내어 외쳤습니다마지막 편입니다.)


주인공은 마침(?) 작가입니다창작의 고통은 잘 모르지만 알 것도 같습니다다른 모든 일에도 가장 어려운 것은 0에서 1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1에서 100까지 확장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주의하고 노력하면 할 수 있지요하지만 최초의 창조창작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드류 라슨은 자신의 유일한 장편을 쓰기 위해 위험한 거래와 모험을 감수합니다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파우스트와 악마의 거래처럼마침내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로 옮기기 위해 외딴 곳에 위치한 별장으로 가는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체력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잇따른 창작의 실패가 가족마저 위험하게 만드는 경험을 한 작가의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엔딩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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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휴가 낯설어 땅에 발을 제대로 못 딛고 살짝 허둥지둥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습니다그럴 때는 책 한 권 골라 잡는 것이 착지에 도움이 되지요다행히 그 책이 스티븐 킹의 신작이라서 오후가 말끔하게 행복해졌습니다.

 

읽을 때 가장 재밌었던 작품과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르는 작품이 다르네요다른 독자들의 최애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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