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일의 라틴어 산책 - 뿌리가 되는 언어 공부
한동일 지음 / 언어평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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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습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깊은 사유의 수단이 되고, 그러한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미래, 다음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카토Cato의 말처럼 'Rem tene, verba sequentur. 내용을 가져라, (그러면) 말은 (저절로) 따라온다.'”


라틴어 문화와 교양이 아닌 라틴어 자체를 배우는 기회는 아주 오랜만이라서 책을 펼 때마다 설렜다. 미래와 가능성을 상상하며 굳게 믿으며 공부하던 옛 느낌이 떠오르고 익숙한 버릇이 달콤한 그리움과 향수를 전한다.


 

얼마나 활용가능한가의 정확한 수치와는 별개로 나는 라틴어가 늘 재밌고 반갑다. 영어 단어들을 덤으로 이리저리 짐작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좋고, 어원학 사전 속 내용은 동화나 신화처럼 흥미롭다.


 

실상 처음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이해하기 쉽게 편집된 이 책이 정겨웠다. 어학교재처럼 어떤 정리는 더할 수 없이 깔끔하고, 새로 노트를 꺼내게 한 연습문제도 좋았다. 외출도 안 하고 독학생처럼 라틴어 공부만 하고 싶다.


 

물론 문법은 생경하고 한국어 사용자로서 명사마다 지정된 성은 난감하게 낯설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유럽어들을 조금씩 배울 때마다 국가별로 성이 다른 경우도 있어서 단어마다 다 외워야하는 것인지 막막했다. 수험생이 아니니 서둘러 포기할 이유가 없어 좋다


 

정갈하고 차분한 번역은 문장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니, 라틴어 문장 필사 의욕이 솟는다. 사진들과 더불어 표지처럼 매력적인 언어이자 문화이다. 어쩌면 실용어가 아니라서 고아함이 더한 지도.


 

공부할 때 가장 좋은 책은 잘 펴지고 멋대로 넘어가지 않는 책이다. 그런 것도 다 고려해서 만든 우아한 학습서이다. 라틴어 문법 기초 공부를 하면서 기쁜 기분이 들다니 나이 먹은 게 이번만은 아깝지 않다.

 

내게는 세계 최고의 라틴어 권위자인 한동일 교수님이 만들어 주신 고마운 라틴어 초급 학습서! 친절하고 다정하다. 강의를 또 듣고 싶다. 교과과정에 쫓겨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역사, 문화, 언어... 학문의 틀이자 인간의 틀인 본질적인 그 공부를 추억과 더불어 새롭게 즐겁게 경험했다.

 

조바심 내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저자의 당부대로 긴 호흡으로 내내 즐겁게 만나고 익히고 싶다. 이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면 <카르페 라틴어 종합편>이 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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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스미스
이시다 가호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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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하체의 날이다.” 🦵

 

인상적인 첫 문장이다. 덕분에 오늘 소리 내어 처음 웃었다. 책 읽기 전에 108배라도 할까, 아니면... 나도 화요일은 108배의 날이다라고 정해버릴까.


오래 전 친구가 하는 스포츠도 보는 스포츠도 싫다고 하기에, 그럼 읽는 스포츠가 좋은 거냐고 놀렸다. 그리고 최근에 운동하는 장면을 읽거나 상상만 해도 운동 효과가 있다는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잘 지내고 있니, 친구.

 

주인공 U노는 퇴근 후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몸을 단련한다. 기상 후 헬스장에서 뛰면서 잠 깨고 샤워하고 아침 사서 출근하던 예전 직장인인 나와는 루틴이 다르다. 물론 집중력도 운동량도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 멋지다.

 

수행하기로 한 종목에 몰두하고, 그동안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것, 또는 그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찾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첫 문장도 그렇지만, 요일별로 몸의 특정 부분에 집중하는 내용이 경험이 없음에도 엄청 재미있다. 묘사가 매력적이다. 다니는 동안 근력운동을 시키려 말을 걸던 트레이너에게 한번은 방법을 배워볼걸 그랬단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근력 운동이 부재하는 삶을 산다. 팬데믹에는 아파트 계단이라도 열심히 오르내렸는데 이제 산책 걷기만으로는 그 운동효과조차 사라졌다. 말랑해진 몸은 웃기만 해도 여기저기가 떨린다.

 

이 책은 영리하고 자연스럽게 운동을 권유한다. 읽는 동안 문득 끌리고 홀렸다. 무엇보다 무아지경으로 몰두하고 단련하는 일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도피하는 대신 근력운동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인간의 눈은 일단 큰 것부터 포착한다. (...) 원래 보디빌딩이라는 대회 자체가 커지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에세이도 아니고 가이드북도 아니다. 소설답게 주인공은 복잡한 역학이 작동하는 세계에 진입하여 복잡한 심경을 맛본다.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서는 머물 수 없는, 탄탄하게 조여드는 엄격과 세련된 사업 프로들의 세계.


 

일부러 웃고, 쉴새없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달고, 가부키 배우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그런 건 그러니까, 근육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우리는 이해가 잘 안가는 심사 기준에 일희일비하고, 우왕좌왕하고, 종종 반기를 드는, 분주하기 그지없는 오소리들이다.”


 

가 걸어가는 길의 도착점이 과로도 상처도 아닌 안도와 즐거운 몰입의 장소이길 바랐다. 규칙과 방식이 강제되는 건 지긋지긋하다. 간섭이라면 각자에게 맞는 방식을 찾으라는 응원으로 충분하다.

 

책은 다 읽었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존을 위한 운동량을 조금 더 늘려야하지 않을까. 스미스와 함께 운동하고 계신 혹은 용감하고 멋지게 새로 시작하신 모든 분들의 즐거운 수행을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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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프고 아름다운 코끼리
바바라 포어자머 지음, 박은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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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기록... 가슴 위에 코끼리가 앉았음에도 숨이 쉬어진 것이 다행이다. 어떤 양질전환의 기적을 기다리는 신도처럼 관련 주제의 책들을 계속 읽는다. 새롭게 기억하는 것이 힘이 된다. 이 책도 그럴 것이라 기대한다.

 

🐘

 

감정이 필요로 하는 시간과 공간을 주고 (...) 감정을 견디는 게 중요하다.



편견과 선입견은 남부럽지 않은 편이고, 그것들이 내 출발점이라고 태평스레 생각하긴 하지만, 저자가 독일 언론인이라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교육시스템이 궁금해지는, 세계건전시민처럼 사는 독일인들만 만나고 살았습니다.


 

우울, 공황, 불안장애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자주 마주했음에도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확장력이 참 약하고 쉽게도 잊힙니다. 입원을 했으니 제가 아는 강도보다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을 사유의 확장 계기로 삼아 관련 통찰을 성실하게 기고했으니 역시 공신력있는 차이퉁의 저널리스트답다는 생각도.


 

어떤 문장들에 한참 멍하니 기억 속을 헤매 다녔습니다. 최초 발현부터 갖가지 다양한 증상들, 반응들, 배워가고 적응하는 과정들, 일화들... 사는 일은 생존하는 일에 다름 아니란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가족, 친구, 직업, 취미 등 자신의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한 쇼라고 느낀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심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단계 말고, 그것이 육체화되는 증상도 있습니다. 혼자서만 지진 진동을 느끼거나, 감각 기관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환시나 환청에 가까운 자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공황 발작 직전 단계를 넘어가지 않는 법을 오래 배웠습니다.

 

어떤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앞으로는 모를 일이지만, 익숙해진 불안은 덜 두렵습니다. 증상도 경험도 제각각이라,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이들은 그 무게가 적립되듯 쌓이다 어느 순간 폭죽 터지듯 그러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터지기도 한다고.


 

국적은 다르지만, 저자의 경험이 무척 생생합니다. 비슷하게 아픈 사람들 얘기를 듣는 것도 도움이 되고, 복잡한 감정을 분석해준 내용, 방대한 취재 결과, 잘 숙성된 글은 읽기 치료과정처럼 읽어가는 흐름이 좋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아주 따뜻합니다. 한동안은 우울에 완패하지만 말고 살아가는 일을 삶의 우선 의미로 두어도 좋지 않을까 싶게 건네는 위로가 거창하지 않습니다. 결국 지금밖에 못사는 거, 오늘 하루만 살아내면 그 하루가 이어지면 되는 일.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태도가 오히려 삶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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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40만 부 기념 에디션) -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
이근후 지음, 김선경 엮음 / 갤리온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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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보다 연배가 높은 저자의 이야기가 어릴 적 구술로 듣던 시절을 소환한다. 미화와 왜곡일지 모르나 이후에 읽은 책들과 비교하면 내 조상들의 육성으로 듣던 일화들이 가장 설레고 흥미로웠다. 역사서(소설)을 좋아하는 취향은 그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녹취를 못한 것만이 오랜 회한이다.

 

40만부 기념 에디션을 이제 읽어본다. 한국 근현대사처럼, 한 개인의 생존기록처럼도 읽힌다. 사단법인에서 노년만이 아닌 청소년 성상담도 하신다는 내용이 놀랍고 반갑다. 76세에 새로운 전공 학업을 마치셨고 일흔 넘어 한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니, 나도 나중에 새로 배워볼까 싶은 생각도 불쑥 커진다.


 

거의 모든 시력을 잃은 상태로, 열 가지도 넘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분이다. 육체의 쇠약과 발병과 통증에 금세 우울해지는 나는 내 어리광과 엄살을 마주할 수밖에 없어 좀 더 반성하고 저자의 유쾌함과 웃음을 존경하게 된다.


 

직업인으로서의 업적과 파급력도 대단하지만, 가족 관계 내에서의 역할과 소통이 더 흥미롭고 부러웠다. 오래된 질문들 중 하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많은 이들이 알지만 행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다. ‘마음먹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스스로 찾을 수밖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 쓰는 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어떤 단어를 쓰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냉정하게 분석해보자면, 함께 산 시간보다 따로 산 시간이 더 길고, 함께 살던 때라도 서로를 잘 알고 아주 친했다고 할 수는 없는 관계가 부모자식관계라서, 함께 무언가를 새롭게 즐겁게 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무거운 것들 없이 유쾌하게 사셨으면 하고 바란다.

 

책임에서 벗어난 노년에서야 비로소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해보고 도전도 해보고 실수도 하고 그렇게 가볍게. 머리도 어깨도 팔도 손가락조차 책임과 부담과 책무로 무겁고 욱신거리는 중년의 내가 언젠가 살아보고 싶은 노년의 삶을 내 부모가 먼저 즐겨보셨으면 좋겠다.

 

한번만 해보면 시원하고 행복해진다고 자유로움을 구하라고 하시는데, 나도 퇴직하고 나면 더는 핑계 없이 신나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옭아매는 것들은 아직도 내 결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실천할 체력과 여전한 바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니 잘 유지해야겠다.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일상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지 미리 생각해 보라. 힘든 것을 남이 알아주길 절대로 바라지 마라. 이것이 바로 나이 든 자의 자존심이다.”


 

2023년 출간 10년 만의 대담이 반갑다. 어떻게 재밌게 사시는지 엿볼 수 있는 분량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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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양철북 청소년문학 7
줄리아 월튼 지음, 이민희 옮김 / 양철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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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추할 수 있는 수십 년 동안에도 십 대 여학생이 혼자 출산을 하고 아이를 버렸다’, 라는 제목과 내용의 기사들은 이어졌다. 어릴 적엔 그저 충격이었지만, 소위 어른이 되고나니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난다.

 

감정의 발원은 여학생도 버렸다도 아닌 혼자이다. 외계인에게 납치된 것도 아니고, 단성생식이 가능한 것도 아닌데, 사건을 혼자 야기했을 리가 만무하다. 의논하고 도움을 청할 단 한 명의 어른도 없었단 말인가.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의논을 할 어른과 사회가 부재했다는 것이 참담하고 아프다. 이런 현실에 더해 성폭력 범죄는 만연하고 처벌은 불쾌한 농담 같은 사회라 감당해야 할 성교육은 생존매뉴얼과 같다.

 

책 육아의 덕을 많이 본 주제이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무섭고 힘든 일이어도 말하고 도움을 청하라고,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거듭 주지시키는 이를 악문 간절한 당부가 늘 괴롭고 절박하다.

 

책의 제목이 그래서 적확하고 아팠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일지, 누가 말을 못하게 한 것인지, 말을 할 수 없어서 어떤 비극이 발생했을지 두려워하며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펼쳤다. 먼저 읽은 십 대들이 남긴 노트는 일독 후 읽어 보았다.


 

기분 좋게 영리하고 현실적인 내용들에 놀라며 읽었다. 학교에서 성교육이 불충분하다는 점에 주로 주목하던 내 생각을 환기시키듯 설정과 소재가 새로웠다. 지금 십 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감할 방식과 내용이라고 느낀다.


 

블로그를 통해서 소통하고 질문하는 방식이 말할 수 없었던환경에 대한 확실한 항변으로도 보인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모두 현실감이 충분해서, 성에 관한 이야기, 십 대의 호기심과 욕망과 행위 모두에 관한 논의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접근한다.


 

어른들의 짐작이 투영되어 단순하고 유치하게 결론으로 이르는 전개가 아니라서 좋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에 쓸쓸했다. 블로그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는 십 대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파렴치한 수단을 사용한 어른의 당선 소식이 부끄럽게 대비된다.


 

신중하고 정확하게 제공된 교육이 아닌, 인터넷에서 찾아낸 정보의 위험성도 지적되어 반가웠다. 다른 많은 문제처럼 청소년 성문제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할 중요 정책이어야 한다.


 

이런 걸 왜 지금 알았지?

다들 이미 알고 있나?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질문하기엔 너무 늦었잖아.

 

성문제를 욕망이나 죄악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피임, 상호동의, 안전, 위생 등을 포괄하는 논의가 되고 교육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필요한 정보와 논의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청소년에게도 어른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문학작품이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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