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스파이 유리
박현숙 지음 / 좋은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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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하고 무거운 5월도 어느새 후반이다. 정신이 휑하고 멍하다. 이번 주말을 잘 쉬면서 보내야 탈이 안 날 듯하다. 여름휴가에만 즐기자고 했던 장르 문학에 자꾸만 눈이 간다. 재미난 책 몇 권을 쌓아두고 이 책부터!


은퇴한 후로 세계 각국으로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다는 신기하고 부러운 저자의 소설이다. 어렸지만 나름(?) 냉전시대를 살아본 독자로서, 클래식한 제목도 매력적이다. 소련과 더불어 남북한의 역사적 사실들도 등장한다. 모스크바, 평양, 서울로의 장소 이동의 풍경도 흥미롭다


 

어린이 납치라니! 분노가 치민다. 전쟁에 필연적 귀결인 전쟁고아들이 많았을 것이고, 여러 이유로 현실에서도 납치가 많았을 것 이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멋대로 납치 감금한다는 소식도 들리니 인류 문명이란 것이 다시금 씁쓸하고 아리다.

 

당장 분단국인 한반도의 상황도 악화일로이니 꾹꾹 눌러 두었던 불안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다시 힘껏 누른다. 작품 속으로 열심히 도망가 본다. 스파이의 역할은 다양하겠지만, 첩보전의 기본은 정보전이다. 얼마 전 동맹국으로부터 불법 도청 사건이 떠올라 입맛이 쓰디쓰다.

 

짐작한 스파이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작품은 아니고, 읽을수록 생생하고 위협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인공 유리의 삶에 초점을 잘 맞추고 계속 지켜보는 작품이다. 납치와 스파이 교육만으로 그 삶이 얼마나 고되고 슬플지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스파이로 살아가는 현장의 살벌함... 집권 세력의 승리를 위해 인간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비정한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정해 주고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르는 것이 최선이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훈련을 받고 힘을 키워서 탈출하라고 응원하고 싶지만... 현실에서도 이야기 속에서도 탈출과 극복보다는 체념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대화로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가독성이 더 좋다. 번역본이 아니고, 남북한의 갈등이 중심이 되니 현실감이 크다.

 

스포일링이 될까 주요한 계기들과 전개를 밝힐 수는 없지만, 유리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는 - 납치 - 의 계기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독자 누구라도 화가 날 듯하다. 어린이는 잘못이 없다. 무슨 함정(艦艇)을 그따위로 허술하게 만들었는지.

 

그 물 속에는 아이를 잡아먹는 귀신들이 많다.”


 

현재도 전투가 발생 중인 전쟁 지역도 있고, 한반도처럼 휴전 상태인 전쟁 국가들도 있다. 영토를 두고 벌이는 전쟁 외에도 각 분야에서 전쟁에 준하는 치열한 접점이 벌어지고 있다. 음습한 방식이 줄고 공개적이고 호혜적인 방식으로 인류 공동의 난제를 해결해가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가 혼자 하는 망상 같다는 서글픈 기분을 자주 느낀다.

 

거듭 현실 소환되긴 했지만, 덕분에 즐거운 주말을 시작했다. 흔하지 않은 한국 작가의 스파이 소설, 혹은 스파이의 삶에 주목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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