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리머니
조우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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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오월인데 체력은 호수 바닥이다. 새로운 책을 읽을 집중력이 없어, 연재로 행복하게 읽은 이야기가 출간된 어여쁜 책을 펼쳐본다. 조우리 작가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썼다고 하시지만, 내게도 이런 승리의 소식은 필요하다.

 


가르치고 설명하려는 문장 하나 없이 어찌나 재밌게 영리하게 신나게 발칙하게 전복顚覆을 이뤄냈는지! 읽는 이들의 뇌 속에서도 불꽃이 팡, , 팡파레~ 찬란하기를. 크게 웃을 수 있었던 이 이야기는 그때도 지금도 정말 필요하다.’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즘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올 해 2월에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된 소식을 기쁘게 기록해 두었다. 형편을 찾아보지 않아도 온갖 반대와 모욕과 억지가 난무할 거란 짐작을 확신할 수 있다. 성지향성이 시민권을 자격 기준이라는 듯 서울퀴어퍼레이드는 서울 광장에서 열릴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결혼은 고사하고, 이성이 아니면 동거도 거부하자는 집권당의 당론... 그러니 이 소설은 딱 필요한 때에 출간되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읽히고 기록되고 출간되고 언급되는 모두가 승리의 순간들이다. 인간이 상상한 우아한 가치들이 현실이 될, 우리를 위한 순간들이다.

 

도무지 완벽히 공략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상이라는 던전을 헤매는 동안 지치지 않게 돕는 것. 친구들을, 삶을 살아내는 동료들을,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는 회복 물약이 될 수만 있다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쯤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토록 쉽고 확실한 찰나가 자꾸만 삶에 달라붙는 피로를 녹이고 몸을 가뿐하게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첫 일독보다 이야기가 더 씩씩하고 유쾌하게 느껴진다. 그 기간만큼 나는 더 우울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지쳤는데도... 그렇다. 참 좋은 글, 좋은 작품이다.

 

저는 이 소설 속 문장들이 무수한 오류가 되는 날을 기꺼이 기다립니다. 계속, 비장하지 말고 신나게, 저의 자리에서 열심히 화살을 쏠게요. 승리할 때까지 쏠 거니까, 그럼 결국 실패란 없을 겁니다. 부디 그 모든 날들을 같이 축하해주세요. 아무도 사라지지 말아요.”

 

- 작가의 말 중에서


Olga Kvasha_In the field_2022

 

그저 나답게 살고 사랑하고 일하고 함께 살고자 하는 당연한 요구들이 범죄처럼 취급받고 폭력적으로 오용당하는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누군가 바꾸지 않는 한. 그래서 행동한 이야기 속 모두가 사랑스럽다. 공무원이 엄청 좋아졌다.

 

Dīmĭcátĭo! Eví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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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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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독을 마쳤을 때는 읽고 있는 친구들에게 스포일링을 하지 않기 위해 시리즈 다음 권을 빨리 달라는 얘기 정도만 기록했다. 시리즈의 첫 책을 읽은 기대와 괴로움이랄까, 더구나 재미있는 작품일 경우에는 조급증이 인다. (다음 권도 번역하고 계신 거지요...?)


 

사적복수에 대해서는 생각이 복잡하다. 현실 사법 시스템의 허술함이 뼈아프고, 억울한 이들이 어떻게 매일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지 아프다. 아무리 간절해도 현실의 일은 절차와 시간을 모조리 요구한다.

 

그래서 여러 매체들에서 사적복수, 대행복수를 소재 삼아 잠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들이 많다. 사필귀정,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작품만 본다는 지인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안타까움과 분함에 사적복수의 대리욕망이 내게도 어른거렸다.

 

도대체 어른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네 명의 아이들의 슬픔이 거대한 돌의 무게에 짓눌려 목소리마저 잃었다. 잊혀졌다. 그리고 전시하듯 죽음이 펼쳐진다. 누군가 이토록 강렬하게 할 말이 많다는 의미이다.

 

워싱턴 포는 아슬아슬하게 경계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아니 이미 넘었다. 그 징계가 계기가 되어 환상열석이 자리한 고향으로 내려온다. 시체 가슴 위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진 것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작품의 재미는 틸리 브래드쇼가 워싱턴 포를 만나면서 스토리 전개가 불꽃처럼 반짝거리며 달려갈 때 절정을 이룬다. 이 콤비의 캐릭터와 대비가 아주 매력적이다. 나는 콤비 구성인 추리 수사물이 가장 재미있다. 이 둘의 변해가는 관계가 궁금해서 다음 작품이 더 고대된다.

 

넌 내가 만난 형사들 중 최고야. 직관적이고 집요하지.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누굴 화나게 하든 상관하지 않는 데다 처음 드러난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범죄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다. 생계형 범죄도 쾌락 범죄도 있다. 유희로서의 범죄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이상 생계 걱정이 없어 지독하게 무료해진 부자들의 놀이일까. 권력은 타인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가장 자극적으로 탐닉되는 것일까.


 

한편 살인 행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아진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사형제도가 남아 있고, 전쟁 중 살인행위가 자행되고, 일상에서도 여러 이유로 살인이 발생한다. 남을 죽은 자를 죽이는 일은 정당한 것일까. 내가 피해 당사자나 가족, 친구, 지인이라면 어떤 기분으로 결론을 내릴까. 느리고 감형이라는 약점이 존재하는 법을 신뢰하고 추구할 것인가, 복수를 하고 싶을까.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복수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저자는 정치논리가 마지막까지 버티고 선 현실적인 결말을 보여준 것일까. 동화나 만화식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이 아니라서, 작품의 묵직함이 더하다. 더 섬세하고 파고들어 현실마저 해부해 줬으면 좋겠다. 다음 권 소식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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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 언어 길잡이 - 실어증을 위한 언어 과제 워크북
박정철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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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도 그렇겠지만, 고령의 부모와 친지들, 중년의 동년배들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고 산다. 연령 무관 여러 돌발까지 더해지면, 오늘을 무탈하게 살아가는 일이 기도 같고, 노후에 대한 불안은 줄지 않는다.

 

제 작년에 사고로 뇌에 충격을 받아 몇 달을 섬망증을 겪은 가족을 보고 나서는, 인간 육체의 부서지기 쉬움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여러 힘듦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아이가 언어에 문제가 혹 있을까 조바심에 지나고 나니 필요 없던 언어치료학습을 받았던 웃픈 기억도 있지만, 실제 심각한 문제는 사고나 노화로 인한 실어증일 것이다.

 

장애 유형 분석 통계에서 늘 밝히듯, 중도 장애 비율이 늘 더 높다. 다양한 뇌손상으로 인한 실어증을 포함하는 언어 장애 역시 그렇다. 관심도에 비례하겠지만, 현재 치료 자료도 그런 성인보다 소아에 관련된 것이 더 많다고 한다.

 

이 책은 언어치료를 하시는 분이 만든 책이다. 따라서 목적은 분명하다. 성인 언어 치료 자료의 부족을 채우고, 좀 더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고,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치료를 도운 경험이 있지만,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언어적 자극에 대해 단계적 이해가 없었다. 문제란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은 것이지만, 나도 누구도 쇠약과 노화와 사고를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 공부해보았다.


 

형식적으로 완결된 방식이나 일회성 검사가 아닌, ‘유동성 있는 실시간 관찰 정보가 치료에 더 성공적이라는 지적이 유의미하다. 다만 시간과 인력이 더 요구된다는 점에서 의료시스템도 보호자도 환자도 어떤 상황인지가 선제되어야할 것이다.

 

- 환자 개별형 평가(client-specific measure)


 

실어증이라는 한 단어로는 개별 환자를 정확히 진단하고 맞춤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어 이전에 환자의 언어생활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혹 글을 모르는 분의 치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문득 궁금했다.


 

글을 알더라도 연령이나 교육, 경험에 따라 문법이해도와 문해력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워크북을 보니 난이도가 세분화되어있었다. 저자가 고민하고 노력한 시간이 느껴진다. 전문가가 가장 잘 활용할 교재일 것이다.


 

나는 예습을 통해 불안을 조금 누르고 씩씩하게 오늘을 살아볼 용기를 얻었다. 관련 분야의 섬세한 발전과 개선을 응원한다. 치료 받으시는 모든 분들의 점차적인 회복을 바란다.

 

https://blog.naver.com/dinkiller/223066027156

내용 오류 수정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어증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지나간 다음

시간의 봉인을 풀어 기억과 어제를 도르르 만다

접혀졌다. 이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노혜경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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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의 라틴어 산책 - 뿌리가 되는 언어 공부
한동일 지음 / 언어평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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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습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깊은 사유의 수단이 되고, 그러한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미래, 다음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카토Cato의 말처럼 'Rem tene, verba sequentur. 내용을 가져라, (그러면) 말은 (저절로) 따라온다.'”


라틴어 문화와 교양이 아닌 라틴어 자체를 배우는 기회는 아주 오랜만이라서 책을 펼 때마다 설렜다. 미래와 가능성을 상상하며 굳게 믿으며 공부하던 옛 느낌이 떠오르고 익숙한 버릇이 달콤한 그리움과 향수를 전한다.


 

얼마나 활용가능한가의 정확한 수치와는 별개로 나는 라틴어가 늘 재밌고 반갑다. 영어 단어들을 덤으로 이리저리 짐작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좋고, 어원학 사전 속 내용은 동화나 신화처럼 흥미롭다.


 

실상 처음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이해하기 쉽게 편집된 이 책이 정겨웠다. 어학교재처럼 어떤 정리는 더할 수 없이 깔끔하고, 새로 노트를 꺼내게 한 연습문제도 좋았다. 외출도 안 하고 독학생처럼 라틴어 공부만 하고 싶다.


 

물론 문법은 생경하고 한국어 사용자로서 명사마다 지정된 성은 난감하게 낯설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유럽어들을 조금씩 배울 때마다 국가별로 성이 다른 경우도 있어서 단어마다 다 외워야하는 것인지 막막했다. 수험생이 아니니 서둘러 포기할 이유가 없어 좋다


 

정갈하고 차분한 번역은 문장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니, 라틴어 문장 필사 의욕이 솟는다. 사진들과 더불어 표지처럼 매력적인 언어이자 문화이다. 어쩌면 실용어가 아니라서 고아함이 더한 지도.


 

공부할 때 가장 좋은 책은 잘 펴지고 멋대로 넘어가지 않는 책이다. 그런 것도 다 고려해서 만든 우아한 학습서이다. 라틴어 문법 기초 공부를 하면서 기쁜 기분이 들다니 나이 먹은 게 이번만은 아깝지 않다.

 

내게는 세계 최고의 라틴어 권위자인 한동일 교수님이 만들어 주신 고마운 라틴어 초급 학습서! 친절하고 다정하다. 강의를 또 듣고 싶다. 교과과정에 쫓겨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역사, 문화, 언어... 학문의 틀이자 인간의 틀인 본질적인 그 공부를 추억과 더불어 새롭게 즐겁게 경험했다.

 

조바심 내지 말고, 겁먹지도 말고, 저자의 당부대로 긴 호흡으로 내내 즐겁게 만나고 익히고 싶다. 이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면 <카르페 라틴어 종합편>이 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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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스미스
이시다 가호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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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하체의 날이다.” 🦵

 

인상적인 첫 문장이다. 덕분에 오늘 소리 내어 처음 웃었다. 책 읽기 전에 108배라도 할까, 아니면... 나도 화요일은 108배의 날이다라고 정해버릴까.


오래 전 친구가 하는 스포츠도 보는 스포츠도 싫다고 하기에, 그럼 읽는 스포츠가 좋은 거냐고 놀렸다. 그리고 최근에 운동하는 장면을 읽거나 상상만 해도 운동 효과가 있다는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잘 지내고 있니, 친구.

 

주인공 U노는 퇴근 후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몸을 단련한다. 기상 후 헬스장에서 뛰면서 잠 깨고 샤워하고 아침 사서 출근하던 예전 직장인인 나와는 루틴이 다르다. 물론 집중력도 운동량도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 멋지다.

 

수행하기로 한 종목에 몰두하고, 그동안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것, 또는 그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찾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첫 문장도 그렇지만, 요일별로 몸의 특정 부분에 집중하는 내용이 경험이 없음에도 엄청 재미있다. 묘사가 매력적이다. 다니는 동안 근력운동을 시키려 말을 걸던 트레이너에게 한번은 방법을 배워볼걸 그랬단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근력 운동이 부재하는 삶을 산다. 팬데믹에는 아파트 계단이라도 열심히 오르내렸는데 이제 산책 걷기만으로는 그 운동효과조차 사라졌다. 말랑해진 몸은 웃기만 해도 여기저기가 떨린다.

 

이 책은 영리하고 자연스럽게 운동을 권유한다. 읽는 동안 문득 끌리고 홀렸다. 무엇보다 무아지경으로 몰두하고 단련하는 일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도피하는 대신 근력운동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인간의 눈은 일단 큰 것부터 포착한다. (...) 원래 보디빌딩이라는 대회 자체가 커지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에세이도 아니고 가이드북도 아니다. 소설답게 주인공은 복잡한 역학이 작동하는 세계에 진입하여 복잡한 심경을 맛본다.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서는 머물 수 없는, 탄탄하게 조여드는 엄격과 세련된 사업 프로들의 세계.


 

일부러 웃고, 쉴새없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달고, 가부키 배우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그런 건 그러니까, 근육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우리는 이해가 잘 안가는 심사 기준에 일희일비하고, 우왕좌왕하고, 종종 반기를 드는, 분주하기 그지없는 오소리들이다.”


 

가 걸어가는 길의 도착점이 과로도 상처도 아닌 안도와 즐거운 몰입의 장소이길 바랐다. 규칙과 방식이 강제되는 건 지긋지긋하다. 간섭이라면 각자에게 맞는 방식을 찾으라는 응원으로 충분하다.

 

책은 다 읽었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존을 위한 운동량을 조금 더 늘려야하지 않을까. 스미스와 함께 운동하고 계신 혹은 용감하고 멋지게 새로 시작하신 모든 분들의 즐거운 수행을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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