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니다. ~랍니다. 라는 어투는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이 책에 대해 굳이 리뷰나 페이퍼를 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밑줄긋기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저 어투에 대해서는 한 마디 이의제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나는 오역이나 맞춤법이 조금 틀린 것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감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오탈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다. 책을 만든 팀(작가, 번역가, 편집/교정하는 출판사 직원들 등등)의 책에 대한 정성의 수준을 오탈자가 결정한다고 까지 생각한다. 작지만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 신경을 계속 긁어댄 것은 작가들의 말을 종종 ‘~답니다’, ‘~랍니다라고 번역한 부분이었다. , 나는 하루키나 파묵, 에코가 한국말을 잘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이 저런 말을 쓰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이 무슨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인 것이냐. 아니면, 아주 나이 어린 인터뷰어를 대하는 팔순 할머니 같은 어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내내 신경을 긁어댔다. 앞으로 나올 2권에서도 이런 어투라면. 그래도 사긴 사겠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펼쳐 놓는다. 헤밍웨이와 포스터의 인터뷰 글에는 체크한 게 없었다. 헤밍웨이의 글에서 체크할 것은 인터뷰어를 압박하는 그의 어투, 기질 같은 것이었는데 그건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의 내게 가장 와 닿는 글은 포크너의 것이다.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시간을 쓸 만큼 한가하진 않다는 말.

 

 

<움베르토 에코>

 

책을 읽으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개성을 계발할 수 있답니다.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수없이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건 굉장한 특권이지요.

 

저는 완강한 무관심 stubborn incuriosity 이라는 개념을 좋아해요. 완강한 무관심을 계발하려면 어떤 분야의 지식에 자신을 한정해야 하지요. 전적으로 모든 분야에 탐욕스러울 수는 없어요. 모든 걸 다 배우려고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요.

 

 

<오르한 파묵>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의 의식이 속한 공동체의 의식과 달라지면 그는 국외자,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국외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부터 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저는 희극적인 대화를 쓰는 걸 좋아해요. 재밌거든요. 하지만 모든 인물이 희극적이라면 아주 따분할 겁니다. 희극적 인물들은 제 마음에 균형추 역할을 하지요. 유머 감각이 안정감을 주니까요. 유머가 있으려면 아주 초연해야 하니까요. 진지해지면 불안정해집니다. 그게 진지함이 갖는 문제예요.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에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식의 형태로서의 일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결코 선언이나 진술이나 설명이라는 형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빨간 공책』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기본 원리로 보이더군요.

오스터 : 동의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이론이나 어떤 철학적인 무게가 없는 일종의 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야말로 두 낯선 사람이 절대적인 친밀함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예술도 소설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이언 매큐언>

 

저는 아직도 분명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등장인물이나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시험이라거나 탐구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임스가 말했던 그 유명한 구절처럼, 사건이란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데 지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성을 측정하기 위해 이런 가장 나쁜 경우들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은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필립 로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쓸 때 당신의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마음에 두고 쓰시나요?

로스 : 아니요. 종종 저를 싫어하는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그가 이 작품을 얼마나 싫어하려나!’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제가 필요로 하는 자극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갈라진 틈과 균열로 가득하지만 균열이 일어난 곳을 숨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이 입은 상해를 치유하려고 합니다. 상해를 숨기는 것은 종종 그것을 치유하는 것(또는 상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요. (중략)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갈라진 틈이 만든 이 선들을 쫓아가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도덕적 아름다움의 경연장이 아닙니다. 그 가면의 힘은 가장을 벗겨내는 권위와 대담함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작가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왜 그가 그렇게 비열하게 행동하나요?’가 아니라 그가 이 가면을 씀으로써 무엇을 얻게 되나요?’입니다.

 

물고기가 헤엄치거나 새가 나는 것과 달리 제게 글쓰기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어떤 종류의 자극 또는 특별한 긴박감 하에 이루어집니다. 글쓰기는 정교한 가면을 씀으로써 개인적인 것을 공적인 행위로 바꾸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금기시된 사소한 비밀은 이제 더 이상 성()이 아닙니다. 이제 금기시된 사소한 비밀은 증오와 분노입니다. 금기가 된 것은 증오와 분노에 대한 장광설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100년이 지났는데도(프로이트 이후 50년이 지났는데도) 그것이 여전히 금기라는 것은 기이합니다.

 

저는 자신을 감독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장 생생한 가능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반응할 뿐입니다. 대화와 서술 사이에 성취되어야 할 균형은 없습니다. 생기 넘치는 것에 따를 뿐이지요.

 

그럼 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로스 : 일반 독자에게요? 소설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지요. 기껏해야 작가는 독자들이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꿀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또한 충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깊고 독특한 기쁨이며 ()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 활동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싶습니다. 그러곤 그들을 소설을 읽기 전의 그들 그대로, 그들 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바꾸려고 설득하고 유혹하고 조절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겁니다. 최고의 독자는 이런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고 둘러싸인 의식을 풀어주기 위해 소설의 세계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책에 홀딱 빠진 아이들이 즉각 이해하는 것이지요.

 

 

<밀란 쿤데라>

 

브로흐는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애쓰거든요. 브로흐가 소설적인 지식이라고 즐겨 부르는 그 특정대상이란 바로 실존 입니다. 제 생각에 브로흐가 사용하는 백과사전적이라는 단어는 실존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모든 장치와 모든 형태의 지식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소설에서는 누구도 어떤 단언을 하면 안 됩니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으로 가설적입니다.

 

상상력이 그 자체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레이먼드 카버>

 

예술은 사치이고 그것은 저 자신이나 제 삶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거죠. 예술이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어렵게 깨달았답니다. (중략) 아이작 디네센은 매일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조금씩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마음에 듭니다.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으로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는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윌리엄 포크너>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환경은 평화, 고독, 너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뿐입니다. 나쁜 환경이란 혈압이 올라가는 상황, 즉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이겠지요.

 

작가는 경험, 관찰,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의 두 가지, 또는 한 가지가 다른 것의 결여를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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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1-2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 책을 사려고 보관함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인용문을 보니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네요. 특히나 하루키의 이 말이 아주 좋아요.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제가 하루키를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지요.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싶다니. 정말 근사하네요.

dreamout 2014-01-29 00:3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결론이 분명한 소설은 이제 좀 별루... 물론, 아주아주 잘 된 소설이라면 예외겠지만요. ^^

oren 2014-01-2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단연 확~~ 와닿는군요. 다른 여러 작가들의 얘기도 인상깊은데 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어느 진화심리학자가 말했던 '즐거움 테크놀로지'란 단어가 자꾸 떠오르네요. 인용문이 댓글로 달기에는 지나치게 길어서 머쓱하지만 덧붙여봅니다.

* * *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경향

마음속의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형태와 색과 소리와 농담과 이야기와 신화로부터 즐거움을 느끼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술 전반에 대한 질문들은 답을 할 수가 없다. 예술 이론들은 자신의 이론을 무너뜨리는 씨앗을 품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CD와 그림, 소설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예술가들이 출세를 하려면 낡은 것을 피하고,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존의 지식(그리고 예술을 정의하려는 수십 년에 걸친 헛된 시도들)을 조롱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동역학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떤 논의도 생산적인 결론을 내지 못한다. 그런 논의에서는 '음악'의 정의에 무조의 재즈, 반음계의 곡들, 지적인 연습곡들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왜 음악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유머를 오스카 와일드의 교묘한 재치로 정의하기 때문에 음탕한 웃음과 가벼운 조롱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예술적 탁월성과 아방가르드는 세련된 취미를 위해 창조되고, 한 장르에 오랫동안 몰입하고 그 장르의 관습과 상투적 표현에 익숙해질 때 나온다. 그것들은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머리, 불가해한 암시, 특수한 감식안에 의존한다. 아무리 매혹적이고 훌륭해 보여도 그것들은 미적 심리를 밝혀 주기는커녕 오히려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즐거움 중추를 자극하는 방법들

마음의 어떤 부분들은 우리에게 즐거운 감정을 부여함으로써 적응도의 증가를 기록한다. 또 어떤 부분들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목표들을 산출한다. 이것들을 결합하면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한 과제(즉 혹독한 세계로부터 진정한 적응도 향상을 얻어 내는 불편함을 겪지 않고 뇌의 즐거움 회로에 도달하여 순간적인 즐거움들을 얻어 내는 방법)에 도전하는 마음이 탄생한다. 쥐의 내측전뇌다발에 전극을 심고 그곳에 전기 자극을 가하는 레버를 쥐 가까이 두면 쥐는 음식, 물, 섹스의 기회를 마다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맹렬하게 그 레버를 누른다. 지금까지 인간의 즐거움 중추에 전극을 심는 신경외과 수술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수단들을 통해 즐거움 중추를 자극하는 방법들을 알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분 전환용 약물인데, 이런 약물들은 즐거움 회로의 화학적 접점에 스며든다.


즐거움 테크놀로지

즐거움 중추에 도달하는 또 다른 경로는 감각을 경유한다. 감각은 우리 조상들의 환경에서 적응도를 높여 주었을 환경에 처하면 즐거움 회로들을 자극한다. 물론 적응도를 높이는 환경이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그런 환경은 감각들이 등록할 소리, 광경, 냄새, 맛, 감촉의 패턴들을 발산한다. 이제 지적 기능들이 그 즐거움 패턴들을 알아보고, 깨끗이 다듬고, 농축시킬 수 있다면, 뇌는 성가신 전극이나 약물 없이도 스스로를 자극할 것이다. 뇌는 보통 건강에 좋은 환경들로부터 발산되는 광경과 소리와 냄새의 충분한 분량을 인위적으로 생성할 것이다. 우리가 딸기치즈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은 딸기치즈케이크를 위한 미각을 진화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진화시킨 것은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맛으로부터 소량의 기쁨을, 견과류와 고기로부터 지방과 기름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을, 신선한 물로부터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회로들이다. 치즈케이크에는 자연계의 어떤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 감각적 충격이 압축되어 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즐거움 버튼을 누르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합한 과다한 양의 유쾌한 자극들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 테크놀로지다. 이 장에서 나는 예술도 그와 같은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dreamout 2014-01-29 00:5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예전에는 그 즐거움 속에 순수하고 긍정적인 기쁨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패배의 쓴 맛이랄까요. 심지어 패배자들의 자가당착적이고 퇴폐적인 기쁨 조차도 그 즐거움 이라는 말 속에 담아낼 수 있겠구나. 그래서, 좋은 소설들이 그렇게나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 그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소설 읽기가 더 풍부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이 풍부함을 해석하려는 본능은 자주.. 소설 읽기를 방해하기도 하더군요. 쓸데없이 너무 분석적이 될 때도 있어서요.. 되먹임의 고리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phabian 2014-02-0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답니다, ~랍니다, ~지요, ~지요 (x무한반복) 때문에 심란해서 이걸 100자평에라도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시원하게 짚어주셨네요.
읽다보니 무슨 내용인지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답니다랍니다가 너무 거슬려서 우선은 하루키 부분만 읽고 책장에 잠시 꽂아뒀'답니다' ^^;
좋은 책이고, 독자들의 기대도 큰 만큼 다음 권에선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반.드.시.)
리뷰를 읽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몇 자 남겨봤습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어!" 용기를 얻어 기운 내서 남은 부분 다시 읽으러 갑니다~

dreamout 2014-02-10 23:1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더군요. ^^;;
 
백내장 -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몇몇 단상들
존 버거 지음, 장경렬 옮김, 셀축 데미렐 그림 / 열화당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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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영원한 `시작`으로 존재한다. 어둠은 시작에 앞선 `전주곡`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빛이 막 움트는 무렵에 일어나는 놀라움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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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4-01-1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야, 그렇단 말씀이죠. 보관함에 오래 들어 있던 책이었는데, 햐- 좋아요. 드림아웃 님도 '밑줄긋기' 해주세요, 책 맛보기 역할을 톡톡히 해줌을 비로소 알겠네요.

dreamout 2014-01-22 09:32   좋아요 0 | URL
존 버거의 책은 늘 제게는 최고여서요. ^^
밑줄긋기. 네. 그렇죠.
조금 긴 글은 소설 정도로 한정짓고, 소설 외 책들은 100자평 정도로 하는게 낫지 않을까..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앞으론 100자평과 밑줄긋기가 늘 것 같긴 해요.

다락방 2014-01-23 16:18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은 완전 생뚱맞지만, 여기에 제가 좋아하는 두 분이 다 계셔서 완전 좋네요!!
>.<

dreamout 2014-01-24 00:4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퍼스나콘이 아주 인상적이네요!!! ^^
 
무엇 What? - 삶의 의미를 건저 올리는 궁극의 질문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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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로 끝나는 문장들. 그 문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파생된 생각이나 책의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 그저 읽는다는 행위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시원하게 밭갈이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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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란 지금 없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젊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없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지금 없는 것을 향해 쏜 화살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향해 쏜 화살.  

 

연구자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세계라는 것은 그러니까 안빈낙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속에 사는 사람이다. ‘지금 없는 것을 알기 위해맹렬히 몰입하는 사람. 무언가에 몰입한 사람은 그 무언가 외에는 관심이 적을테니. 그런 세계에서는 속도와 조용함이 정비례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하다. 속도는 또한 파괴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사와무라씨와의 연애/결혼은 그것을 증명하는 듯 하다.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세계는 어쩌면 소설로 그려지기에 괜찮은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 하시바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은.. 모든 회상이 그렇듯옅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아챌 정도로 상한냄새가 느껴진다. ‘회고의 문장들은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지 않은 문장은 드물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에서도 그런 냄새를 맡았으니까. 하지만, 상한냄새에 내가 왜 실망해야 할까. 소설은 많은 경우 패배한 사람이거나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회고 아닌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기시마자신이 화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더라면. 관찰자 시점과 주인공 시점이 동일한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아주 미묘하지만 뭔가 불협화음을 생성해 낸다. 그 불협화음은 끌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냉정한 시선으로 작중 화자를 보게 만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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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green1 2014-01-16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왔다간 흔적 한 번 남겨보려고 적는데 방주소가 생각나질 않아 한참 헤맸어요.ㅋㅋ;
누구게~~요? 모르겠죠?? 히.히.히^^

근데 저기 누워있는 늑대가 드림아웃님이예요? 방 분위기 참 좋아요. 딱 드림아웃님과 세트.^^

dreamout 2014-01-16 22:32   좋아요 0 | URL
알죠.. ^^

저 위에 누워있는 동물(늑대인가요? 개 같기도 하고요.. ㅎㅎㅎ)이 딱히 저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햇빛이 꿈처럼 고요히 지나가는 오후에. 나른하게 누워 긴 꿈을 꿔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여자는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유리창 문을 내다보았다. (중략) 리유는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는 아내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 문장이 내내 따라다녔다. 의사 아내의 젖은 얼굴이 리유, 그랑, 타루, 랑베르, 코타르, 파늘루 등의 이름만큼이나 가슴 한복판에 새겨졌다. 이 젖은 얼굴은 페스트의 결말을 이미 예견하게 하는 얼굴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다른 이름으로 계속 호명된다고 해야 할까. 그랑의 전처(前妻) , 타루의 어머니, 랑베르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소설 속에서 정확한 얼굴과 이름을 갖지 못한 이 여인들이 나는 모두 의사의 아내(등을 돌리고 있다 돌아본 젖은 얼굴)로 여겨졌다. 페스트는 높고 길게 둘러싸인 이고, 젖은 얼굴의 그녀는 높은 데 열린 창문이다. 누군가(랑베르)는 어떡해서든 그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하며, 누군가(그랑)는 그 창문과 살짝 보이는 바깥 풍경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하며, 누군가(타루, 리유)는 열린 창문의 존재와 가치를 알지만 그럼에도 함께 갇힌 사람들을 먼저 바라본다.

 

만일 창문이 아니라 이라면? 그녀가 열린 이라면 어땠을까? 이런 가능성을 상상하자 곧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의사 아내는 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또 다른 목구멍 깊은 곳에서 느끼는 눈물임에 틀림없었다. 페스트는, 백색 질병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이 없는 바깥은 없다.

 

 

 

그리고 자기도 그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계는 죽은 세계와 다를 바 없으며, 사람에게는 언제고 반드시 감옥이니 일이니 용기니 하는 것들에 지친 나머지 한 인간의 얼굴과 애정 어린 황홀한 가슴을 요구하게 되는 때가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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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1-08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카뮈네요, 이제는 주인공 이름도 제대로 기억이 안나는 상태가 되었지만.. 얼마 안되어도 꼭 이렇게 까먹어버려요, 이상하게. 단기기억상실증인가요..

dreamout님의 간단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흔적, 한해동안 늘 고마웠어요.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dreamout 2014-01-08 20:53   좋아요 0 | URL
10여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 처음 읽는 기분였어요. ㅠㅠ
확실한 건 처음 읽었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 ^^;

아이리시스님도 행복 가득한 2014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