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니다. ~랍니다. 라는 어투는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이 책에 대해 굳이 리뷰나 페이퍼를
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밑줄긋기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저 어투에 대해서는 한 마디 이의제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나는 오역이나 맞춤법이 조금 틀린 것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감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오탈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다. 책을 만든 팀(작가, 번역가, 편집/교정하는 출판사 직원들 등등)의
책에 대한 정성의 수준을 ‘오탈자’가 결정한다고 까지 생각한다. 작지만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 신경을 계속 긁어댄 것은 작가들의 말을 종종 ‘~답니다’, ‘~랍니다’라고 번역한 부분이었다. 아, 나는 하루키나 파묵, 에코가
한국말을 잘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이 저런 말을 쓰리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이 무슨 유치원 선생님
같은 말투인 것이냐. 아니면, 아주 나이 어린 인터뷰어를
대하는 팔순 할머니 같은 어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내내 신경을 긁어댔다. 앞으로 나올 2권에서도 이런 어투라면… 음. 그래도 사긴 사겠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펼쳐 놓는다. 헤밍웨이와 포스터의 인터뷰 글에는
체크한 게 없었다. 헤밍웨이의 글에서 체크할 것은 인터뷰어를 압박하는 그의 어투, 기질 같은 것이었는데 그건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의 내게
가장 와 닿는 글은 포크너의 것이다.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시간을 쓸 만큼 한가하진 않다는 말.
<움베르토 에코>
책을 읽으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개성을 계발할 수 있답니다.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수없이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건 굉장한 특권이지요.
저는 완강한 무관심 stubborn incuriosity 이라는 개념을
좋아해요. 완강한 무관심을 계발하려면 어떤 분야의 지식에 자신을 한정해야 하지요. 전적으로 모든 분야에 탐욕스러울 수는 없어요. 모든 걸 다 배우려고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요.
<오르한 파묵>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의 의식이 속한 공동체의 의식과 달라지면 그는
국외자,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국외자의
관음증적 시선으로부터 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저는 희극적인 대화를 쓰는 걸 좋아해요. 재밌거든요. 하지만 모든 인물이 희극적이라면 아주 따분할 겁니다. 희극적 인물들은
제 마음에 균형추 역할을 하지요. 유머 감각이 안정감을 주니까요. 유머가
있으려면 아주 초연해야 하니까요. 진지해지면 불안정해집니다. 그게
진지함이 갖는 문제예요.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에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식의 형태로서의 일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결코 선언이나 진술이나 설명이라는 형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빨간 공책』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기본 원리로 보이더군요.
오스터 : 동의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이론이나 어떤 철학적인 무게가 없는 일종의 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야말로 두 낯선 사람이 절대적인 친밀함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예술도 소설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이언 매큐언>
저는 아직도 분명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등장인물이나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시험이라거나 탐구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임스가 말했던 그 유명한 구절처럼, 사건이란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데 지나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성을 측정하기 위해 이런 가장 나쁜 경우들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은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필립 로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글을 쓸 때 당신의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마음에 두고 쓰시나요?
로스 : 아니요. 종종 저를 싫어하는
독자를 염두에 둡니다. ‘그가 이 작품을 얼마나 싫어하려나!’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제가 필요로 하는 자극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갈라진 틈과 균열로 가득하지만 균열이 일어난 곳을 숨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이 입은 상해를 치유하려고 합니다. 상해를
숨기는 것은 종종 그것을 치유하는 것(또는 상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요. (중략)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갈라진 틈이
만든 이 선들을 쫓아가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도덕적 아름다움의 경연장이 아닙니다. 그 가면의 힘은 가장을 벗겨내는
권위와 대담함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작가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왜 그가 그렇게 비열하게 행동하나요?’가 아니라 ‘그가 이 가면을 씀으로써 무엇을 얻게 되나요?’입니다.
물고기가 헤엄치거나 새가 나는 것과 달리 제게 글쓰기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어떤 종류의 자극 또는 특별한 긴박감 하에 이루어집니다. 글쓰기는 정교한 가면을 씀으로써 개인적인 것을
공적인 행위로 바꾸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금기시된 사소한 비밀은 이제 더 이상 성(性)이 아닙니다. 이제 금기시된 사소한 비밀은 증오와 분노입니다. 금기가 된 것은 증오와 분노에 대한 장광설이지요.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100년이 지났는데도(프로이트 이후 50년이 지났는데도) 그것이 여전히 금기라는 것은 기이합니다.
저는 자신을 ‘감독’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장 생생한 가능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반응할 뿐입니다. 대화와 서술 사이에 성취되어야 할 균형은 없습니다. 생기 넘치는
것에 따를 뿐이지요.
그럼 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로스 : 일반 독자에게요?
소설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지요. 기껏해야 작가는 독자들이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꿀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또한 충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깊고 독특한
기쁨이며 성(性)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 활동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싶습니다. 그러곤 그들을 소설을 읽기 전의 그들 그대로, 그들 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바꾸려고 설득하고 유혹하고 조절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겁니다. 최고의
독자는 이런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고 둘러싸인 의식을
풀어주기 위해 소설의 세계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책에 홀딱 빠진 아이들이 즉각 이해하는
것이지요.
<밀란 쿤데라>
브로흐는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애쓰거든요. 브로흐가 ‘소설적인 지식’이라고 즐겨 부르는 그 특정대상이란 바로 실존 입니다. 제 생각에 브로흐가 사용하는 ‘백과사전적’이라는 단어는 ‘실존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모든 장치와 모든 형태의
지식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소설에서는 누구도 어떤 단언을 하면 안 됩니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으로 가설적입니다.
상상력이 그 자체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레이먼드 카버>
예술은 사치이고 그것은 저 자신이나 제 삶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거죠. 예술이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어렵게 깨달았답니다. (중략) 아이작 디네센은 매일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조금씩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마음에 듭니다.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으로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는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윌리엄 포크너>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환경은 평화, 고독, 너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즐거움뿐입니다. 나쁜 환경이란 혈압이
올라가는 상황, 즉 좌절하고 분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상황이겠지요.
작가는 경험, 관찰,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의 두 가지, 또는 한 가지가
다른 것의 결여를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