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형의 신비 - 네모난 틀 속의 그림이 전하는 무한한 속삭임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신성림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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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메르의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과 고야의 <1808 5 3일의 처형>에서 기존의 미술평론가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저자가 발견했다는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고 읽었다. 그림 하나를 두고 10분이면 오래 보았다고 생각하는 내 앞에, 두어 시간을 보통으로 바치는 사람이 여기 나타났다. “테두리는 그림의 경계와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라는 말부터 마음에 들기 시작했지만, 정말 인터넷 소개 글처럼 베르메르와 고야의 그 유명한 작품들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낸 저자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내내 감탄했다. 하지만 탄복하는 마음에 의례 따라다니는 거리감은 거의 안 생겼다. 현학적인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을 추적해 나가는 저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배우는 자세고 그림을 보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자세다. 하나의 그림 앞에서 느낀 것들을 언어로 풀어나간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도전인 법. 차근차근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독자의 손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끌 듯 나아간다.

 

 

2.

머리를 시원시원하게 해 주는 통찰의 연속이다.

베르메르의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에서 수태고지를 떠올리고, 고야의 <1808 5 3일의 처형>에서 고야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에서 병과 병, 병과 노란 천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고, 폴 세잔이 지나가듯 쓴 말 윤곽에서 세잔 회화 철학의 어느 한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등등.

 

더불어 이 책의 한 챕터인 <식탁에 앉은 유령들>은 이제껏 읽은 정물화(또는 회화 전체) 관련 해석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같은 시기에 함께 읽었던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을 읽는데 이 챕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내가 그 통찰을 제대로 짚어내 풀어내진 못했지만.

 

 

3.

고야와 조르조 모란디의 재발견이다. 베르메르야 워낙 예전부터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고야와 모란디는 알고만 있었지 좋아할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 <1808 5 3일의 처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란디가 정물화 속에서 해낸 게 무엇인지. 내게는 재발견이라는 말도 모자란다.

 

 

4.

원작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복제하면 아주 형편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보기 위해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몇 번이고 방문한다. 사사키 아타루의 자세와 동일한 것을 이 책의 저자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다.

 

 

5.

가십성 정보지만, 은근 흥미로운 사실.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로 알려진 조안 미첼과 폴 오스터가 아주 친한 사이였다는 점. 조안 미첼을 통해 폴 오스터가 사뮈엘 베케트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폴 오스터가 저자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편이라는 사실.

 

고야의 <1808 5 3일의 처형>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고야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알렸을 때 폴 오스터 또한 단박에 알아차렸다는 점. 뉴욕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전했던 저자의 친한 친구 두 명중 하나가 니콜 크라우스였다는 점.

 

 

6.

같은 출판사에서 저자의 소설(남자 없는 여름)도 나왔다. 논픽션과 픽션, 둘 다 잘 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소설도 이 작품 수준이라면, 나는 좋아하는 소설가 한 명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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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0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작가 이름 타고 가서 말씀하신 소설을 검색해보았어요. 책 소개를 읽고 장바구니에 넣어버렸어요. 하핫.
이 책은 제가 읽을 수 없을것처럼 생겼어요. orz

dreamout 2012-07-02 01:29   좋아요 0 | URL
아주 드물게 보는 제대로 된 회화 에세이였어요.
서평도 이렇게 써야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소설은 읽지 못했으므로 장담하긴 어려워요~ ^^;

... 2012-07-02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 모란디의 그림은 제가 좋아하는 웨인 티보(Wayne Thiebaud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케이크를 많이 그려요)의 그림들과 많이 닮아서 묶어서(?) 좋아하는 화가예요. 미술관에서 만나면 처음엔 뜨악해요. 그러다가 점점 대상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대상들의 형태와 배치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엔 그림자가 눈에 밟히게 되죠. 그리곤 영원히 못 잊을 그림이 되요.

이 책, 역시 폴 오스터의 와이프라는 태그가 떨어질 순 없는 거겠죠? ^^

... 2012-07-02 01:11   좋아요 0 | URL
5월달에 한길아트 시리즈가 50% 할인해서 <고야>를 샀거든요. 알려드리려고 보니, 가격이 그새 다시 원상복구 됬네요 -.-

영화 <고야의 유령> 혹시 못 보셨으면 강추요!

dreamout 2012-07-02 01:45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웨인 티보. 그림을 보니 알겠어요. 국내의 어느 전시회에서 직접 본 것 같아요. 모란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정말 있는거 같아요. @@

번역가 김석희가 훗타 요시에를 엄청 상찬한 글을 본적이 있는데, 훗타 요시에는 몽테뉴와 고야에 관한 아주 긴 글을 썼죠. 몽테뉴는 그렇겠구나 했는데, 고야는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요.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약력에서 폴 오스터가 남편이라는 것을 보았어요. 사실 그런 정보는 관심 없어서(작가의 전기적 내용에는 거의.. 관심이 없거든요.)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고야와 조안 미첼의 회화에 대한 글에서 소개되더군요. 출판사가 쓴 약력이 아니라 책 내용에 언급되었으므로 얘기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탄하 2012-09-0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리뷰 기억나요.
제가 <사각형의 신비>를 살까말까 고민할 때 참고했던 리뷰네요.
다만 헌책방의 책을 산거라 땡스투를 드리지 못함이 아쉬웠습니다.ㅜ.ㅜ

dreamout 2012-09-04 23:09   좋아요 0 | URL
앗.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땡스투 받는 것보다 더 좋네요. ^^

뮤진트리 2017-04-1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 허스트베트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의 출간 기념 북토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유니크한 여성작가 시리 허스트베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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