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편 복도, 켄턴 양의 집무실, 닫힌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을 회상하는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슨. 『나를 보내지 마』에서라면, 가즈오 이시구로는 바로 이 모습만 보여주고 넘어갔을 테지. 그런데 우리의 화자이자 주인공 스티븐슨은 기어코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라고 쓰고 만다. 품위, 기품, 위대함을 논하던 스티븐슨은 저 말을 덧붙여서 오히려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만다. 소설 도입부에서 영국의 자연풍광에 빗대 위대함이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해 놓더니. 결국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날을 회상할 때 조차 자신을 소리 높여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변함없는모습에 풉. 하고 웃을 수 밖에.

 

그가 회상하는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그냥 알게 된다’ ‘소상히 듣고 나면’ ‘덧붙여야 할 것 같다등을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습관, 주인인 달링턴 경을 옹호하려 할 때(그리고 곧 실패할 때), 무엇보다 켄턴 양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스티븐슨이 어떤 사람인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영국식 유머라는 것. ‘미스터 빈이나 워킹 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보듯, 가장 중요한 순간에 느낌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마는 그. 집사로서의 위대함이라는 개념에 매몰되어 그렇게 행동했음을 최후 변론하듯 풀어나가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게 빤히 보이는 그.  

 

소설의 외피인 아련함, 후회의 정서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그건 기대감. 긴 세월을 건너 켄턴 양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설렘이 만들어낸 달콤함.

 

잘못된 CEO를 모시는 한 직장인의 일과 사랑’.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이리 정리해도 좋을 스토리. 잘못된 상사, 모신다, 사내 연애. 키워드를 대략 추스르자면 이렇겠지만 물론 그 말은 온당치 않다. 지금 나는 몹시 서두르고 있다. 이 느낌을 우회해서, 우회함으로써 정확히 표현하고 싶은데 안 된다. 전에 사내 연애를 해 봤던 그리고 결국 헤어져 봤던 사람들이라면 수긍할만한, 파랗게 적셔오는 잔물결 같은 느낌 때문에 거리감을 유지하기 어렵다.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서사적 리듬이 설렘의 시간은 연장시키고 실망의 시간은 지연시켜, 결국 닫힌 문 앞에 홀로 서 있는스티븐슨을 도드라지게 한다. 이 지점은 『나를 보내지 마』에서 캐시가 흐느끼던 순간만큼이나 내 숨을 멈추게 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전부 위대함을 위해 연소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기 삶을 부식시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에게 이 깨달음은 중요하지 않다. 아직 부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남은 삶에 대한 그의 자세가 중요할 뿐. 진짜 좋은 것들은 잡지 못하고 끝내 자잘한 것들만 챙길 수 밖에 없는 삶이더라도. 나는 끝내 설득되고 만다.

 

 

.

앞으로 읽을 모든 소설까지를 포함하더라도 기억될만한 극소수의 러브스토리 중 하나. 라고 말한다면 과장이 심하다고 하겠지.. 다 잊힌 줄 알았는데 내게도 여전히 노스탤지어가 남은 모양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5-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이런 소설이었군요!

얼마전에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단편집 <녹턴>이 떠올라요. 그중 한 단편에서 소극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사내가 점차로 이성을 잃어가며 우스운 행동을 해서-그러나 당시의 그에겐 꽤 절박했던- 피식 웃었었는데, 드림아웃님의 페이퍼가 그 단편을 떠올리게 하네요.

이 소설 저도 읽어볼래요.
흐음.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 중..무얼 빼고 이걸 넣어야 할까요? ㅠㅠ

dreamout 2014-05-14 07:50   좋아요 0 | URL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은 천천히 전부 읽어볼 생각예요.
저는 나를 보내지 마.와 이 소설. 2권을 읽어본 건데.. 정말 좋네요.

으음.. 장바구니는... 저도 뭐... ㅎㅎㅎ
 

#

낱말이 한 개 주어진다. 그리고 그 낱말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단을 쌓아간다. 두텁다. 갤러리에서 액자에 담긴 하나의 사진을 감상하고 옆에 있을 또 다른 액자로 걸어갈 때 앞에 본 사진의 반향이 앞으로 볼 사진의 감상과 섞일 때 일어나는, 묘한 두터움이 줌파 라히리의 글에서 느껴졌다. 이 두터움은 감수성과 절제 사이의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 건의 사건. 하나는 소소한 것처럼 보이고 두 개는 치명적이다. 우다얀의 죽음, 가우리의 떠남은 치명적이었고 수바시의 유학은 소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다얀의 죽음. 그 부분을 읽을 때 세월호가 침몰됐다. 배 안에 갇힌 희생자들의 공포와 우다얀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고야 만 그의 부모와 아내 가우리가 느꼈을 충격이 나를 휩쓸어버렸다.

 

한참의 분노와 슬픔. 다시 더디게 읽어나가는 내게 저 두터움이 선연히 다가온다. 라히리의 두터운 은 수바시, 우다얀, 가우리, 벨라, 비졸리. 그들에게 기품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기에 각자의 인물들이 어찌할 수 없이 벌인 일들로 인한 비극적 결과들. 그럼에도 그들을 도덕의 잣대로 함부로 말할 수 없게 각자에게 아우라를 드리워 주고 있었다. 또한 그 두터움은 보호막이 되어 안쪽의 화자, 독자에게 자리를,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주는 듯 했다. 고독의 자리. 지울 수 없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터를.

 

 

#

새끼 물떼새는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알아요?

아니요.

걔들은 하늘에서 무리 지어 날아요. 어른 새들이 계속해서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죠. 그렇게 노바스코샤에서 브라질까지 그 먼 길을 줄곧 날아간대요. 어쩌다가 물위에서 쉴 때를 빼고는 말이에요.

물떼새는 바닷물 위에서 잠을 자나 보죠?

 

캘커타의 물이 가득 찬 저지대를 부레옥잠이 뒤덮고 있고, 로드아일랜드의 바닷가에는 새들이 쉬고 있다. 물이 가득 찼던 저지대는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새들은 상실의 슬픔 위에서 잠든다. 납득 불가능하더라도 끝내 애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은 쉽다. 추억과 상처는 산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는 말은 부도덕하게 보인다. 방법이 없다. 서로 부를 수 밖에. 서로를 계속해서 부를 수 밖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5-0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드림아웃님. 전 아직이에요.

드림아웃님의 닉네임이 오늘따라 무척 반갑습니다.

dreamout 2014-05-01 23:51   좋아요 0 | URL
안부를 전해달라는 포스팅을 보고 정신을 좀 가다듬었는데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줌파 라히리의 글이 도움이 되었어요.

다락방 2014-05-07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방금 다 읽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다 읽고 나서도 진정이 되질 않네요. 자야 하는데.....

dreamout 2014-05-08 18:57   좋아요 0 | URL
이 댓글보다 다락방님 포스팅한 글. 먼저 봤어요. ^^
네. 둘러싼 환경때문인지 더욱 아프게 다가왔었어요...
 

 

 

 

 

 

#

앨릭스 포트노이는 누구에게 이 긴 고백을 내뱉고 있나. 정신과 의사 슈필포겔에게 상담을 받는 설정이지만, 슈필포겔은 (아직)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목소리 없이 귀만 있는 존재. 슈필포겔 역은 독자가 맡게 된다. 이 특이한 환자는 견디기 좀 힘들다. 학회지에 발표할 임상표본으로는 너무 그럴싸하기에 흥미롭게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소명을 느끼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환자는 아마 좀 괴로울 것이다. 돈만 아니면 끊이지 않는 장광설을 내뱉는 이 미친 환자를 당장 쫓아내고 싶어할지도. 감정노동이란 게 정말 힘들다. 이 구질구질한 얘기를 경청하는 척 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흥미롭든 그렇지 않든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말을 일단 경청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았는가. 이 지점이 재미있다. 독자인 나는 내 돈으로 이 소설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 소설은 돈을 낸 사람을 되려 돈 받고 일해야 하는 처지로 바꿔 놓는다. 소비자(독자)-생산자(작가)의 관계를 의사(상담자, 독자)-환자(내담자, 화자)의 관계로 돌려놓는다.

 

뭐 이렇기만 하다면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어떤 역전이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환자와 의사, 화자와 청자(독자)라는 관계가 아니라 앨릭스 포트노이와 dreamout의 관계가 된다. 단독자와 단독자. 고유명사와 고유명사의 관계로.

 

앨릭스의 정체성은 두 겹으로 확인된다. 먼저 엄마로 대표되는 것들. 착한 아들, 양심, 유대인, 청결, 정직, 천재 등등. 하지만 그 확인은 또한 끔찍한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정의 내리는 심리적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마지막 (타인의)목소리로 인해 이 모든 외설적 장광설은 작품이 된다. 그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만들어진 존재에서 만드는 존재가 된다. 이러저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된다.

 

 

#

섹스 얘기와 비속어의 남발에 대해서는 묘하다.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우스운 것은 남자로서 이 얘기가 야해? 재미있었어? 라고 묻는다면 별로. 나는 남자는 관심 없고 다른 남자의 성생활은 더군다나 관심이 없고 아무리 야한 얘기, 흥미로운 얘기라 할지라도 이렇게 줄기차게 말 많은 인간 곁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앨릭스의 연인 메리 제인(앨릭스는 그녀를 멍키라고 부른다)

 

하지만 dreamout는 물론 빨려들 듯 읽었다. 앨릭스 포트노이의 이 불평, 이 장광설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어떤 글에서 스카즈(Skaz)라는 어휘를 배웠는데, 이는 구어체적 표현, 1인칭 서술자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반영되어 즉흥적으로 얘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서술을 말한다. 앨릭스의 개성적인 입말에 빠져들면 비속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고, 외설도 조금 눈을 가늘게 만들 뿐. 집어치우라고 화를 내기 어렵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외설적 의미의) 육즙(肉汁)보다 육성(肉聲)흥미로웠다.

 

 

#

어떤 소설은 그때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피어나게 한다. 열여덟이나 열아홉. 이 소설을 그때 읽었더라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좋은 쌍으로 기억에 보다 깊게 남았겠지. 친부살해 욕망과 성욕은 숨길 수 밖에 없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갈 곳 모른 채 둘둘 말리기만 했던 내 (온갖 권위주의에 대한)분노의 일부분을 대신 풀어줬다. 『포트노이의 불평』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66

2. 아말피타노에 관하여

로베르토 볼라뇨, 송병선, 열린책들

 

 

 

 

광기와 만남의 관계를 생각했다. 광기의 정의는 얼마든지 내릴 수 있겠지만, ‘유사하지 않고 인접하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거나 만나기를 원하는 상태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신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이나 만나기를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들 보고 제정신 아닌사람이라고 흔히 말하듯. 아말피타노의 딸아이의 엄마, 롤라는 시인을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간다. 몬드라곤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인을 만나러 간다고, 어린 딸을 내버리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무덤에서 자고, 자신을 내팽개치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홀려서 떠돌아 다닌다.

 

하지만 이건 내 판단일 뿐이다. 나는 유사하지 않고 인접하지 않은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혹은 타인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롤라에겐 무의미하다. 그녀를 반면교사 삼아 교훈을 뽑아낼 수는 없다. 그런 광기를 두려워하거나, 함께 물들기를 바라는 게 전부일지 모른다. ‘미쳐야 미친다는 베스트셀러 제목을 꺼내보자면, 1. 비평가들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운 좋게도 미쳐야 미친다라는 구호에 알맞게 미쳤다. 롤라는 그 방향이 삐끗했을 뿐이지 않을까.

 

아말피타노는 스페인에서 멕시코 산타테레사로 왔다. 딸과 함께. 소설의 처음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아말피타노를 보여준다. 이렇게 소설은 두 발이 지상 10센티미터 정도 뜬 것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그러고는 우기가 시작된 오카방고에 물줄기가 모여들 듯 쉼표 없이 쭉쭉 흘러간다. 롤라를 회상하는 전반부가 그렇다. 후반부엔 산타테레사에서의 아말피타노의 삶을 보여주는데, 다시 건기가 찾아와 땅에 균열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산타테레사는 1부에서도 2부에서도 중요한 장소다. 아마도 소설 전체 분위기를 덮어버릴 것으로 추측된다. 엄청난 더위, 따분함과 무기력, 연쇄살인 사건의 도시. 그러니까 아말피타노는 무엇을 하러 왔는지 모르는 상태로 유사하지 않고 인접하지 않은 장소와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짜맞춘 얘기다. 그는 칠레 사람이고 스페인을 거쳐 멕시코로 왔다. 그곳들은 인접지역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억지를 부려서라도 짜맞춘 이유는 산타테레사가 U.S.A와 인접한 지역이고 그것은 스페인과 칠레와는 다른 조건이기 때문이다. 부국과 빈국의 국경지대라는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광기의 조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A B,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C. 아말피타노가 무의식적으로 낙서한 도형의 꼭지점에 각기 적어놓은 이름들처럼 어디누구처럼 광기에 관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 없는 역사를 요약할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그 제정신 아님이 마술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얻게 된 사실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비아냥거리면서도 비아냥의 대상을 던져 버리지도 못하는 화자의 스탠스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에이즈에 걸려 딸 로사를 마지막으로 보러 온 롤라가 낮 시간(딸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에 다시 말없이 떠나리라고 추측한 아말피타노의 생각과 달리 저녁을 함께 먹고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잠든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떠나는 장면은 나를 흔들리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조지가 잠에서 깨는 모습을 묘사하는 첫 대목과 죽음을 가정하여 조지의 잠든 몸뚱어리를 (문자적으로)해부하는 마지막 부분. 처음과 끝의 조응이 더없이 인상적이다. 책을 덮기 전까진 조지와 그의 학생 케니가 옷을 벗고 바다 속으로 뛰쳐 들어가는 장면만이 선명했지만, 이제 기억을 반추하니 이 소설 전체가 한 편의 실내악처럼 다가온다. 각각의 부분이 세세하게 잘 짜여 완전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체감 혹은 완결성.

 

첫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잠에서 깰 때, 잠에서 깨자마자 맞는 그 순간, 그때에는 있다지금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동안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본다. 이제 시선이 점점 내려오고, ‘내가인식된다. 거기서부터 내가 있다, ‘내가 지금 있다가 추론된다. ‘여기는 맨 나중에 떠오른다. 부정적이라도 안심이 되는 말, ‘여기’. 왜냐하면, ‘여기는 오늘 아침, 내가 있어야 할 곳,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잔인한 암시다.”

 

있다라고 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육체. 다음이 지금’. 곧 시간이고, ‘내가’. 즉 정신이 그 뒤를 따른다. 마지막은 여기’. 즉 나를 감싼 공간. 새벽, 미명이 점차 또렷해지듯 조지의 궁지에 빠진얼굴도 보다 분명해진다. 루시안 프로이트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 육체들처럼.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좋다. 오늘밤이 바로 그때라고 가정하자. 바로 그 시각, 예정된 그 순간이라고. (중략)

몇 분 안에, 육체의 바깥쪽 부위에 있는 세포들에서 생명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하나씩 불빛들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만 남는다. 이 최후의 발작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가 조지라고 부르는, 더 이상 총체가 아닌 이 육체의 어느 부분이 그 육체 안에 머물지 않고 먼 바다로 떠나 있다면, 그 부분은 돌아온 뒤에야 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부분은, 여기 이 침대에서 코도 골지 않고 누워 있는 저 육체와 이제 더는 연결될 수 없다. 그 부분은 이제 뒤뜰에 있는 쓰레기통의 쓰레기와 사촌이다. 그 부분과 쓰레기. 둘 다 머지않아 멀리 끌려가서 버려져야 한다.”

 

조지라는 사람의 총체. 육체-시간-정신-공간. 완전성을 씨앗처럼 내재한 소설의 구조. 아니 소설이 표현하는 삶의 구조. 그게 아마도 가장 오래, 어쩌면 유일하게 기억될 것이다.

 

 

 

#

조지는 퀴어. 사랑하는 은 죽고 홀로 남겨졌다. ‘지금그는 싱글이다. ‘58의 싱글. 덧붙여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편성 지향적인 싱글맨이라는 제목을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처럼 직설적으로 지었다면 어땠을까? 처음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쓸쓸히 남겨진 어느 싱글의 하루라는 프레임으로 소설 전체를 보려 했지만, ‘퀴어를 빼고 나면 대체 이 소설만의 개성은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싱글맨이라는 제목을 더욱 엄격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무엇으로 존재하든 결국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 소수자 보다 더욱 소수인 사람. 그게 바로 싱글맨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하고. 단지, 배우자나 연인 없이 홀로 지내는 어느 싱글의 하루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싱글일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개인.

 

조지는 퀴어고, 싱글이고, 58세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모든 소수자들의 교집합이 조지다. 시대에 따라 소수자의 지위도 변동된다. 퀴어라는 소수집단은 이 소설이 나왔을 때에 비해 지금은 좀 더 큰 집단이 되었다. 싱글(1인가구)도 마찬가지. 58세도 이제 죽음과 그리 가까운 나이는 아니다.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이전보다 더욱 소수자가 되었을 테지. 그럼에도 이웃 스트렁크 부인의 아이들에게 괴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차림새. 빨강, 노랑, 보라의 원색이 두드러진 자수 블라우스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붙인마흔 다섯 샬럿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선생이 자주 가는 술집을 찾아와 홀로 시를 쓰고 있던 케니의 교수님은. 단 한 사람 조지다.

 

그런데, 이 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쓸쓸하거나 허무하다기 보다는 삶을 생동거리게 만든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처럼 반전이 있다. 즐거워지고 힘이 생긴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것은 각각의 인간을 물웅덩이로, 인간의 의식을 바닷물로, 그래서 밀물일 때 그 각각의 물웅덩이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한 작가의 멋진 은유가 답을 준다.

 

더없이 좋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ellevue 2014-03-16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지내시죠? 여전히 돌아돌아 여기로 와서 오랫만에 안부 전합니다.
한국은 아직 춥다지요? 여긴 한주동안 화창한 날씨에 꽃들이 활짝활짝 폈어요.
행복하고 기분 좋은 봄 되시기 바랍니다~

dreamout 2014-03-16 20:41   좋아요 0 | URL
여기서 만나뵈니 더 반갑네요. ㅎㅎ

봄나들이 하러 종종 찾아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