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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가 잠에서 깨는
모습을 묘사하는 첫 대목과 죽음을 가정하여 조지의 잠든 몸뚱어리를 (문자적으로)해부하는 마지막 부분. 처음과 끝의 조응이 더없이 인상적이다. 책을 덮기 전까진 조지와 그의 학생 ‘케니’가 옷을 벗고 바다 속으로 뛰쳐 들어가는 장면만이 선명했지만, 이제
기억을 반추하니 이 소설 전체가 한 편의 실내악처럼 다가온다. 각각의 부분이 세세하게 잘 짜여 완전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체감 혹은 완결성.
첫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잠에서 깰 때, 잠에서
깨자마자 맞는 그 순간, 그때에는 ‘있다’와 ‘지금’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동안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본다. 이제 시선이 점점
내려오고, ‘내가’ 인식된다. 거기서부터 ‘내가 있다’가, ‘내가 지금 있다’가 추론된다. ‘여기’는 맨 나중에 떠오른다. 부정적이라도 안심이 되는 말, ‘여기’. 왜냐하면, ‘여기’는 오늘 아침, 내가 있어야 할 곳,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잔인한 암시다.”
‘있다’라고 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육체. 다음이 ‘지금’. 곧 시간이고, ‘내가’. 즉
정신이 그 뒤를 따른다. 마지막은 ‘여기’. 즉 나를 감싼 공간. 새벽, 미명이
점차 또렷해지듯 조지의 ‘궁지에 빠진’ 얼굴도 보다 분명해진다. 루시안 프로이트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 육체들처럼.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좋다. 오늘밤이 바로
그때라고 가정하자. 바로 그 시각, 예정된 그 순간이라고. (중략)
몇 분 안에, 육체의 바깥쪽 부위에 있는 세포들에서 생명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하나씩 불빛들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만 남는다. 이 최후의 발작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가 조지라고 부르는, 더 이상 총체가 아닌 이 육체의 어느 부분이 그 육체 안에 머물지 않고 먼 바다로 떠나 있다면, 그 부분은 돌아온 뒤에야 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부분은, 여기 이 침대에서 코도 골지 않고 누워 있는 저 육체와 이제 더는 연결될 수 없다. 그 부분은 이제 뒤뜰에 있는 쓰레기통의 쓰레기와 사촌이다. 그 부분과
쓰레기. 둘 다 머지않아 멀리 끌려가서 버려져야 한다.”
조지라는 ‘사람’의 총체. 육체-시간-정신-공간. 완전성을 씨앗처럼 내재한 소설의 구조. 아니 소설이 표현하는 삶의 구조. 그게 아마도 가장 오래, 어쩌면 유일하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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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퀴어’다. 사랑하는 ‘짐’은 죽고
홀로 남겨졌다. ‘지금’ 그는 ‘싱글’이다. ‘58세’의 싱글. 덧붙여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편성 지향적인 ‘싱글맨’이라는 제목을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처럼 직설적으로 지었다면 어땠을까? 처음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쓸쓸히 남겨진 어느 싱글의 하루’라는 프레임으로 소설 전체를 보려 했지만, ‘퀴어’를 빼고 나면 대체 이 소설만의 개성은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싱글맨’이라는 제목을 더욱 엄격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무엇으로 존재하든
결국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 소수자 보다 더욱 소수인 사람. 그게
바로 싱글맨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하고. 단지, 배우자나
연인 없이 홀로 지내는 어느 싱글의 하루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싱글일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개인.
조지는 퀴어고, 싱글이고, 58세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모든 소수자들의 교집합이 조지다. 시대에 따라 소수자의 지위도 변동된다. 퀴어라는 소수집단은 이 소설이
나왔을 때에 비해 지금은 좀 더 큰 집단이 되었다. 싱글(1인가구)도 마찬가지. 58세도 이제 죽음과 그리 가까운 나이는 아니다.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이전보다 더욱 소수자가 되었을 테지. 그럼에도 이웃 스트렁크 부인의 아이들에게 ‘괴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차림새. 빨강, 노랑, 보라의 원색이 두드러진 자수 블라우스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마흔
다섯 샬럿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선생이 자주 가는 술집을 찾아와 홀로 시를 쓰고 있던 ‘케니’의 교수님은. 단
한 사람 조지다.
그런데, 이 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쓸쓸하거나 허무하다기 보다는
삶을 생동거리게 만든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처럼 반전이 있다. 즐거워지고 힘이 생긴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것은 각각의 인간을 물웅덩이로, 인간의 의식을 바닷물로, 그래서 밀물일 때 그 각각의 물웅덩이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한 작가의 멋진 은유가 답을 준다.
더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