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란 ‘지금 없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젊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없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지금 없는 것’을 향해 쏜 화살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향해 쏜 화살.
연구자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라는 것은 그러니까 ‘안빈낙도’는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 속에 사는 사람이다. ‘지금 없는 것을 알기 위해’ 맹렬히 몰입하는 사람. 무언가에 몰입한 사람은 그 무언가 외에는 관심이 적을테니. 그런 세계에서는 속도와 조용함이 정비례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하다. 이 ‘속도’는 또한 파괴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사와무라씨와의 연애/결혼은 그것을 증명하는 듯 하다.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는 어쩌면 소설로 그려지기에 괜찮은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 ‘하시바’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은.. 모든 회상이 그렇듯… 옅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아챌 정도로 ‘상한’ 냄새가 느껴진다. ‘회고’의 문장들은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지 않은 문장은 드물다. 심지어 몇 년 전에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에서도 그런 냄새를 맡았으니까. 하지만, 그 ‘상한’ 냄새에 내가 왜 실망해야 할까. 소설은 많은 경우 ‘패배한 사람’이거나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회고 아닌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기시마’ 자신이 화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더라면. 관찰자 시점과 주인공 시점이 동일한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아주 미묘하지만 뭔가 불협화음을 생성해 낸다. 그 불협화음은 끌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냉정한 시선으로 작중 ‘화자’를 보게 만들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