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베를린이여 안녕,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 한마디로 산만함에 중독된 한 해였다. 좋지도 딱히 싫지도 않은 사람에 중독된 한 해였다. 파편화되기도 희부연 안개 속에서 헤매기도 한. 그 와중에 다시금 이셔우드를 만났다. 다행히 싱글맨이 이셔우드의 특출난 단 하나의 작품이 아님을 확인. 싱글맨과 거의 30년 세월의 간격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수많은 삶의 경험을 겪어 닳고 닳아도 변하지 않는 개성이 있음을 보았다. 꺼멓게 죽어가던 뇌의 어느 부위에선가 다시 불꽃이 반짝였다. 덕분이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소가 자기의 긴 혀를 쭉 내밀어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었을 때 내 느낌이 그랬다. 나선형의 힘 같은 것. 이 소설은 달랐다. 내내 숫자와 구조, 직선의 힘들과 그 선들의 어긋남. 그런 이미지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어땠냐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버금갈 정도로 좋다. 완벽하다.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 공간감. 화려한 호텔에서 창고 같은 버스 대합실, 철도역과 사창가의 낡은 여관방까지. 희미하지만 뚜렷한 공명음이 공간을 서서히 잠식한다. 밤하늘, 밤의 천정을 가득 채워 감싸 흐르는. 밤의 노래. 올해 경험했던, 아마도 유일한, 시적 체험.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 ‘실루엣, 걸음걸이, 목소리, 미소, 필체, 몸짓, 표정 등…(중략) 우리 곁에 있다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려볼 때, (중략)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들’. 몸의 일기이면서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일기. 몸의 성장과 노쇠만큼이나 관계 맺기와 이별에 관한 일기. 늙어감을 추체험하게 만들어주는 일기장들..
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 풍화되어 가는 육체와 신비롭게 숙성하는 영혼. 소멸해가는 소음과 쟁쟁 울리는 적막감.
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 목록에 없던 일관성은 차츰 인물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다른 이의 명단이었던 것은 점차 화자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피로 되어간다. 하나의 ‘바라보이다’와 하나의 ‘바라보다’가 형성하고 융합하는 정체성의 족적. 어느 쪽이든 성립하는 이율배반의, 동시에 살아야 하는 삶.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 사진 세 장을 본적이 있다. 로 시작되는 점이 눈에 띄었다. 내가 받은 기묘한 원고의 제목과 부제. 로 시작하는 롤리타와 다르다. ‘뭐든 사랑할 만한 게 남았으면 아무거라도 그냥 사랑해봐(재즈, 토니 모리슨)’ 험버트 험버트의 경우는 ‘아무거나’가 ‘아무거나’가 아니었고 ‘그냥’이 ‘그냥’이 아니었다면, 요조는 ‘사랑할 만한 게 남았다면’이라는 전제 자체에 의문을 둔다. 그런 건 없으니까.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 파묻혔다는 거, 그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기억이 지워졌다는 거, 견디기 힘든 일이다. 파묻었다면? 지웠다면? 피해자나 방조범이 아니라 범인이라면? 그것을 행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주체였다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앤디 밀러의 <<위험한 독서의 해>>를 읽고서, 나도 그러고 싶었다. 읽었다고 뻥친 걸작 50권을 읽은 그처럼, 2016년이 위험한 독서의 해가 되었으면. 모두들 그랬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