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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이 한 개 주어진다. 그리고 그 낱말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단을 쌓아간다. 두텁다. 갤러리에서 액자에 담긴 하나의 사진을 감상하고 옆에 있을 또 다른 액자로 걸어갈 때 앞에 본 사진의 반향이 앞으로 볼 사진의 감상과 섞일 때 일어나는, 묘한 두터움이 줌파 라히리의 글에서 느껴졌다. 이 두터움은 감수성과 절제 사이의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 건의 사건. 하나는 소소한 것처럼 보이고 두 개는 치명적이다. 우다얀의 죽음, 가우리의 떠남은 치명적이었고 수바시의 유학은 소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다얀의 죽음. 그 부분을 읽을 때 세월호가 침몰됐다. 배 안에 갇힌 희생자들의 공포와 우다얀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고야 만 그의 부모와 아내 가우리가 느꼈을 충격이 나를 휩쓸어버렸다.

 

한참의 분노와 슬픔. 다시 더디게 읽어나가는 내게 저 두터움이 선연히 다가온다. 라히리의 두터운 은 수바시, 우다얀, 가우리, 벨라, 비졸리. 그들에게 기품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기에 각자의 인물들이 어찌할 수 없이 벌인 일들로 인한 비극적 결과들. 그럼에도 그들을 도덕의 잣대로 함부로 말할 수 없게 각자에게 아우라를 드리워 주고 있었다. 또한 그 두터움은 보호막이 되어 안쪽의 화자, 독자에게 자리를,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주는 듯 했다. 고독의 자리. 지울 수 없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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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물떼새는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알아요?

아니요.

걔들은 하늘에서 무리 지어 날아요. 어른 새들이 계속해서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죠. 그렇게 노바스코샤에서 브라질까지 그 먼 길을 줄곧 날아간대요. 어쩌다가 물위에서 쉴 때를 빼고는 말이에요.

물떼새는 바닷물 위에서 잠을 자나 보죠?

 

캘커타의 물이 가득 찬 저지대를 부레옥잠이 뒤덮고 있고, 로드아일랜드의 바닷가에는 새들이 쉬고 있다. 물이 가득 찼던 저지대는 이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새들은 상실의 슬픔 위에서 잠든다. 납득 불가능하더라도 끝내 애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은 쉽다. 추억과 상처는 산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는 말은 부도덕하게 보인다. 방법이 없다. 서로 부를 수 밖에. 서로를 계속해서 부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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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0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드림아웃님. 전 아직이에요.

드림아웃님의 닉네임이 오늘따라 무척 반갑습니다.

dreamout 2014-05-01 23:51   좋아요 0 | URL
안부를 전해달라는 포스팅을 보고 정신을 좀 가다듬었는데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줌파 라히리의 글이 도움이 되었어요.

다락방 2014-05-07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방금 다 읽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다 읽고 나서도 진정이 되질 않네요. 자야 하는데.....

dreamout 2014-05-08 18:57   좋아요 0 | URL
이 댓글보다 다락방님 포스팅한 글. 먼저 봤어요. ^^
네. 둘러싼 환경때문인지 더욱 아프게 다가왔었어요...
 
디자인의 단서들
가시와기 히로시 지음, 이지은 옮김 / 안그라픽스 / 2014년 3월
절판


아무것도 없는 살벌한 방은 교도소의 독방이나 슬픈 병실처럼 우울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누구라도 텅 빈 방에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이나 그림 등을 붙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는 집''살아있는 물건'을 만들어 간다.
'살아있는 집''살아있는 물건'은 미셸 드 세르토가 말하는 『일상 실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미셸 드 세르토의 '일상 실천'이란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넘겨받은 물건을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또는 합리성을 내세우며 중앙집권적으로 끝 모르게 확장해가는 요란스런 생산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생산'이다.
'또 하나의 생산'을 다른 말로 하면 '소비'이다. 그것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바람과도 같이 종적을 감추기도 하고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노린다. 또 하나의 생산은 그저 주어진 것을 잘 이용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 실천'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날마다 실천하는 바로 그것. 미셸 드 세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도 학교 담벼락에, 교과서에 낙서할 수 있다. 못된 짓이라고 처벌받는다 해도 그들 또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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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피니토 : 미완의 철학 - 삶을 충동질하는 철학의 일곱 단계
파스칼 샤보 지음, 정기헌 옮김 / 함께읽는책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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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해명하다, 나를 해방하다, 나 자신을 알다. 나를 전달하다. 나와 너를 탐색하다. 나를 변형하다. 나와 너에게 기쁨을 주다. 철학의 일곱가지 욕망 각각에 `나`와 `너`를 넣으니 내가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고 싶은 이유.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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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릭스 포트노이는 누구에게 이 긴 고백을 내뱉고 있나. 정신과 의사 슈필포겔에게 상담을 받는 설정이지만, 슈필포겔은 (아직)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목소리 없이 귀만 있는 존재. 슈필포겔 역은 독자가 맡게 된다. 이 특이한 환자는 견디기 좀 힘들다. 학회지에 발표할 임상표본으로는 너무 그럴싸하기에 흥미롭게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소명을 느끼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환자는 아마 좀 괴로울 것이다. 돈만 아니면 끊이지 않는 장광설을 내뱉는 이 미친 환자를 당장 쫓아내고 싶어할지도. 감정노동이란 게 정말 힘들다. 이 구질구질한 얘기를 경청하는 척 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흥미롭든 그렇지 않든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말을 일단 경청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았는가. 이 지점이 재미있다. 독자인 나는 내 돈으로 이 소설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 소설은 돈을 낸 사람을 되려 돈 받고 일해야 하는 처지로 바꿔 놓는다. 소비자(독자)-생산자(작가)의 관계를 의사(상담자, 독자)-환자(내담자, 화자)의 관계로 돌려놓는다.

 

뭐 이렇기만 하다면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페이지에서 어떤 역전이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환자와 의사, 화자와 청자(독자)라는 관계가 아니라 앨릭스 포트노이와 dreamout의 관계가 된다. 단독자와 단독자. 고유명사와 고유명사의 관계로.

 

앨릭스의 정체성은 두 겹으로 확인된다. 먼저 엄마로 대표되는 것들. 착한 아들, 양심, 유대인, 청결, 정직, 천재 등등. 하지만 그 확인은 또한 끔찍한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정의 내리는 심리적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마지막 (타인의)목소리로 인해 이 모든 외설적 장광설은 작품이 된다. 그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만들어진 존재에서 만드는 존재가 된다. 이러저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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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얘기와 비속어의 남발에 대해서는 묘하다.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우스운 것은 남자로서 이 얘기가 야해? 재미있었어? 라고 묻는다면 별로. 나는 남자는 관심 없고 다른 남자의 성생활은 더군다나 관심이 없고 아무리 야한 얘기, 흥미로운 얘기라 할지라도 이렇게 줄기차게 말 많은 인간 곁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앨릭스의 연인 메리 제인(앨릭스는 그녀를 멍키라고 부른다)

 

하지만 dreamout는 물론 빨려들 듯 읽었다. 앨릭스 포트노이의 이 불평, 이 장광설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어떤 글에서 스카즈(Skaz)라는 어휘를 배웠는데, 이는 구어체적 표현, 1인칭 서술자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반영되어 즉흥적으로 얘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서술을 말한다. 앨릭스의 개성적인 입말에 빠져들면 비속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고, 외설도 조금 눈을 가늘게 만들 뿐. 집어치우라고 화를 내기 어렵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외설적 의미의) 육즙(肉汁)보다 육성(肉聲)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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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그때 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피어나게 한다. 열여덟이나 열아홉. 이 소설을 그때 읽었더라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좋은 쌍으로 기억에 보다 깊게 남았겠지. 친부살해 욕망과 성욕은 숨길 수 밖에 없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갈 곳 모른 채 둘둘 말리기만 했던 내 (온갖 권위주의에 대한)분노의 일부분을 대신 풀어줬다. 『포트노이의 불평』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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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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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불투명성을 사후에도 유지하려는 이들을 위한 딜리팅 이라는 서비스의 역설은 딜리팅을 시행하는 대리자가 그 비밀을 보존하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이다.. 라는 스토리보다 악어빌딩에 사는 사람들의 캐릭터가 더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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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3-3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신문에서 이 책의 소개를 보고 나는 김중혁이 딱히 좋진 않지만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생각했는데 드림아웃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은 일요일인데 잘보내고 계세요? 전 아직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못봤어요..

dreamout 2014-03-30 23:34   좋아요 0 | URL
그랜드부다페스트는 저도 못봤어요.
꽃구경 갔으면 좋을 날에 회사.. 흐리고 비내린 토욜엔 간만의 출사..ㅠㅠ 이랬어요..

다락방 2014-04-0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랜드 부다페스트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입니다, dreamout님. 헤헷 :)

dreamout 2014-04-02 20:44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다고 쓰신 페이퍼 봤습니다. 저는 여태 못봤는데.. 어쩌면 쭉 못볼지도. ㅋ

2014-04-02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3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4-0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아웃님, 줌파 라히리 시작했어요?

dreamout 2014-04-06 23:23   좋아요 0 | URL
아니오. 아직. ㅎㅎㅎ
빠리의 기자들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둘 중 하나를 먼저 마친 후에 시작할 듯 합니다. ^^

2014-04-27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