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의 화자인 ‘장’은 사전에서 단어를 찾는 버릇이 있다.
단어는 단어 자신을 해석해 줄 다른 말들을 갈구하는 것만 같다. 이 생각이 든 까닭은 솔로몬이 운영하고 있는 전화 구조회의 활동 때문이다. 이 편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저 편의 전화를 받으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저 편의 외롭고 슬픈 사람들은 이 편에서 전화를 받아줄 것을 기대하고 자기 얘기를 하염없이 푼다. 서로에게 기대고 있으니 단어와 단어를 해석하는 다른 어휘들도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서, 하나의 어휘는 다른 언어들을 향해 소리친다. 내게는 그 소리가. 구해 달라고. 제발 구해 달라고 있는 힘껏 목이 갈라지도록 외치는 소리로 들렸다. 구해줘! (사랑해줘!)
‘사랑 Amo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 Amor’이 좌측에서 외친다. 우측에서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응답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외친다. 눈물겹도록. 점점 타 들어가 꺼져버릴 듯한 목소리로.
‘솔로몬 왕의 고뇌’는 그러니까 내게는 한쪽에서의 외침에 다른 쪽에서 응답하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다.
2.
유대인인 ‘기성복의 제왕’, 누구보다도 멋진 팔십 대의 할아버지, 솔로몬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파리의 한 건물 지하에서 4년을 숨어살았다. 그는 마드무아젤 코라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지하실에 방문해주기를 원했건만, 그녀는 그때 다른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예전의 유명한 가수가 더 이상 아니었다. 화장실 마담(화장실에서 돈을 받는 징수원)이 된 그녀에게 솔로몬은 경제적 도움을 주지만, 서로 데면데면 지낸다. 35년. 무려 35년 동안.
사랑, 긴 침묵, 다시 (합류된)사랑.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떠올랐지만, 『솔로몬 왕의 고뇌』는 ‘사랑’만큼이나 죽음과 늙어감을 이야기한다. 솔로몬이 마드무아젤 코라에게 ‘장’을 보낸 것은, ‘장’이 마드무아젤 코라의 젊었을 적 연인을 닮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젊은’이는 그들에게 이제 그들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격류로 몸부림치는 시간 속, 그 한가운데 서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늘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지만, 삶의 응답은 제때 이뤄지는 법이 드물어. 장이 사전을 찾으면 바로 단어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저 편의 외롭고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이 전화를 걸면 바로 이 편의 또 외롭고 가난하고 슬플지도 모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응답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고 빠르게 주어지는 응답은 없다. 우리는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기다리거나 다른 사람으로 곧잘 대체하고 만다. 다행인지 솔로몬과 마드무아젤 코라는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속절없이 기다렸지만 끝내 사랑의 응답은 이뤄졌다. 하지만, 사랑의 응답을 받으며 끝난 이 소설이 에밀 아자르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 소설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니 또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
3.
‘솔로몬 씨는 누군가와 다시 합류하기 위해 전화 교환실을 지키지. 그는 심지어 구인광고란까지 들여다본다고. 미용사, 23세, 매혹적인 외모. 나는 그렇게 전투적이고, 그렇게 단호하게 자신이 떨어져 나오는 걸 막고 싶어하는 노인을 본 적이 없어. 그는 오래가는 직물로 만든 품위 있는 옷을 입고, 자신에게 여전히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도전적으로 예언가를 찾아가지. 튀니지에서는 그런 사람을 ‘최고의 전사’라고 불러. 다만, 전사들은 나아가기 위해서 싸우지만 솔로몬 씨는 뒷걸음치기 위해서 싸우는 게 다를 뿐이야. 우리가 그에게 사십 년을 준다면, 그는 그것을 받을 거야.’
4년여의 철저한 무응답 속에 산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행태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소설에서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끝내 가슴 아프다.
4.
일부러 한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리뷰를 적을 때도 나는 일부러 중요한 이야기는 빼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긴 하다. 너무 뻔한 얘기를 쓰는 것 같아서(그렇다고 내가 쓴 주변적인(?) 이야기가 뻔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한가지는 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하고 싶은 게 생겼다.
소설에서 이십 대인 장은 육십 대의 할머니 마드무아젤 코라와 잔다. 한 번만이 아니다. ‘장’ 스스로 이런 (생각지도 못한)사건을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어머니의 부재를 다른 식으로 해소하려는 몸부림으로.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아버지. 오히려 아버지라는 존재가 보다 복잡한 여파를 미친 게 아닐까. ‘장’의 친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전철 승차권에 구멍을 찍으며 보냈다. 단순함.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단순함은 솔로몬의 ‘복잡성’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단순함과 성실함이 만나면 그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젊은 ‘장’이 느끼기에 그것은 참 지루한 삶. 아니었을까. 젊음의 강렬함과는 아주 멀어 보이는 것. 그렇기에 일견 모순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복잡한 솔로몬에게 그렇게 정신 없이 빠져든 것일 테다. 마드무아젤 코라는 그러한 솔로몬의 복잡성 한가운데, 그 핵심에 존재하는 사랑이다. 그녀가 새로운 아버지 솔로몬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열쇠 같은 존재로 보였을지 모른다. 장에게는.
소설의 라이트모티프는 ‘바로 오늘 삶의 장미를 꺾어라!’다. 솔로몬의 복잡성 그리고 개별적 사랑의 그 수많은 다양성은 현재의 우연성에 깊이 관여하는 순간 생긴다. 장이 선택한 삶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