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는 중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달콤한 것들이 입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그 맛에 반해 황홀해 할 때는 몰랐는데, 다 읽은 후에는 왠지 모를 쓴맛이 남았다. 1913년 빈과 파리, 베를린과 뮌헨 등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 혁명가들의 삶의 궤적을 토막글로 이어 붙인 이 글들이 달달한 사탕이나 과자, 케이크처럼 느껴진 이유는 유명인의 사생활 소문에 눈이 번쩍하는 이유와 같았을 것이다. 역사 보다는 소문. 물론 이 소문은 저자가 수많은 데이터를 검토한 것이니만큼 정확도가 높은 자료일 테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이 정보들이 흥미롭고 달콤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소문에 포함될 만한 사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

1913년의 유럽 전역을 횡단하고 있다. 역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횡단. 이라고 부르고 싶다. 횡단으로 볼 때, 각각의 천재-인물들이 또 다른 천재-인물들과 마주침으로써 빗겨나가는, 클리나멘이라고 불리는 운동을 보다 리얼하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동이야말로 2013년 서울의 나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약혼할 여자(펠리체 바우어)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정말 대단한 편지)를 읽은 후 카프카에 대한 관심도가 급상승한 것을 비롯해, 빈을 주름잡던 괴짜 여류시인 엘제 라스커슐러(1913년에는 시인 고트프리트 벤과 사랑에 빠졌다), 릴케와 니체, 프로이트의 육체적, 정신적 연인이었던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면서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를 연인으로 둔, 나중에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이혼하는 알마 말러는 심지어 평전까지 읽고 싶어졌다(평전, 자서전 등을 거의 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플로리안 일리스. 저자가 이 글을 쓴 목적,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바랑 뮈라티앙의 파리 vs 뉴욕 두 도시 이야기』를 나처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은밀하게 파리 vs , 프랑스-영국 vs 독일어권(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 구도로 되어있다. 주인공 도시는 모더니즘의 수도라 일컬어졌던 빈이고,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맞서 독일표현주의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프루스트와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보다는 카프카와 토마스 만, 릴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최근 들어 예술도시로 어필하고 있는 베를린과 유럽 내에서 경제적 우위를 누리고 있는 자신감이 이 책에 녹아있는 걸 느낀다.

 

 

#

‘1913년 세기의 여름을 요약하면 신경쇠약, 친부살해, 자기파괴의 쾌락. 

 

 

#

1913년 빈에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천재들로 넘쳐났다. 그렇다면 2013년 서울에는?

 

마침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잇달아 읽었다. 소리의 마루와 골이 만나 상쇄되는 것처럼, 커다랗게 공동화한 침묵 속에 덩그러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ne_Hebuterne 2014-02-0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13년 세기의 여름을 작년에 읽고 다시 떠올려보다가 dreamout님의 글을 읽고 그렇지, 그랬어. 라고 생각하다가 흔적 남기고 갑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호흡과 걸음을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하는 작가의 조직력이(늘어놓기만 하면 될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직조력이 꽤 창의적인듯!) 새삼 나름의 생기를 가졌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몇 번의 세기말을 거쳐도, 1913년만큼이나 창의적인 재미있는 자기파괴의 세기말도 드물 거란 생각도 듭니다.

dreamout 2014-02-02 23:12   좋아요 0 | URL
네. 토막글의 리스트, 나열식의 글에 불과한데도 굉장히 잘 조직화되어 있죠. 실은 제가 쓰고 싶은 글이 이런 종류의 글이라서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하나의 글과 다른 글, 그리고 그 사이의 공백들이 마치 카니자 삼각형처럼 작동을 해서 전체적으로 굉장히 우아한 구조를 지니게 된 것 같아요. 아마 수백 수천번.. 빼고 넣고 순서를 바꾸고 그랬을.. 그런 노력들이 보이더군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 자체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
 
리듬분석 -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카이로스총서 25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 갈무리 / 2013년 5월
장바구니담기


리듬들에 대한 분석과 리듬분석 프로젝트는 단 한순간도 몸을 등한시하지 않는다. 해부학적 혹은 기능적 몸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적인' 상태의) 다리듬적이고 조화리듬적인 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몸은 (일반적으로) 항상 현재하는, 항상적인 준거였다. 리듬의 이론은 몸에 대한 지식과 경험 위에 구축된다. -19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을 대상화(Objectification)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마사 누스바움은 대상화가 사람을 사물과 같이 바라보는 경향으로, 결국 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한 텍스트는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과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이다. 그런데 책 전체를 볼 때 이 두 텍스트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리처드 포스너라는 판사인 것 같다. 헌사에서 리처드 포스너에게라고 해놓고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그의 판결을 다뤄 처음에는 놀랐다. 그와 학문적인 입장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오히려 책의 내용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짐을 느꼈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논쟁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것. 서로를 존경하면서 하는 이런 행위는 그 자체가 시적 정의를 태동하게 하는 성숙한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

 

 

시적 정의가 궁금해서 읽은 것 보다는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었다. 저자의 명성에 혹해서는 아니고, ‘마사~ 누스바움!’ 이라는 이름 자체. 소리 내어 읽으면 꼭 그리스 신전의 한 모퉁이에 고요히 놓여있는 정육면체의 우윳빛 대리석 같은 느낌이 든다.

 

 

 

 

수의 곱셈 물체의 합성.

 

상태공간 : 물체는 여러 상태의 모임이다.

곱집합 : 합성의 운동학

소수(素數)와 수의 관계는 기본입자와 물체의 관계와 같다.

 

 

수식들은 대부분 이해 못했다. 이언 스튜어트의 수학 책들보다 어렵다. 그럼에도 저런 문장, 개념, 비유들은 좋았다. 수의 곱셈이 즉 물체의 합성이고 그것은 또한 상태공간을 생성하는 운동이라는 통찰. 수학은 잘 모르지만, 저자의 유추 과정을 읽다 보면 어느새 통렬함을 느낀다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고, 전에 몰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귓속에서 계속 웅웅 거렸다. 단 하나. 언제나 사람을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만드는 말 아닌가.

 

 

그래. 원씽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섬씽도 필요해.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욕망 아닌가 의심하는, 우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간(내 방)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미니멀리스트이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3-10-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적 정의]를 읽어보고 싶은데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할 것만 같아 구입을 망설이고 있어요. 그런데 디킨즈와 리처드 라이트라니, 그렇다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엊그제 집에 가는 지하철안에서 [시적 정의]를 들고 계신 5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사람을 봤어요. 와- 엄청 근사해보이더라구요!!

dreamout 2013-10-18 19: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읽고 쓰신 글. 그때 잘 읽었어요. 시적 정의 읽을 때 도움 많이 됐어요! 덕분에 ^^

2013-10-23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4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5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흐릿한 먹빛 세계를, 몇 개의 은색 화살이 비스듬히 달리는 가운데 흠뻑 젖은 채 마냥 걸어가는 나를, 나 아닌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시가 되기도 하고 하이쿠가 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줄 때 비로소 나는 그림 속의 인물로서 자연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내리는 비가 괴롭고 내딛는 발이 피곤하다고 마음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시정의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 미학의 중심이 무관심성이라지. 소세키의 저 구절이 그걸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서는 비인정이라고 표현되는데.

 

사색적인 소설이다. 그래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행인의 초반에서 조용히 물러난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풀베개의 이런 묘사 중심적, 사색 중심적인 특징이 편히 다가왔다.

 

 

2.

사색 중심적이지만, 논리 중심적이지는 않다. 수묵화를 볼 때, 붓 터치와 여백, 구도를 보면 우리 머리 속에서 뉴런과 뉴런 사이에 긴 꼬리의 빛이 차분하고 폭넓게 물결치는 것이 느껴지듯. 몰입된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다.

 

묘사가 극히 정제되어 있고, 때때로 기막힌 풍경을 보고 절로 감탄하듯 자연과 사람과 삶을 묘사하는 문장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슐라르가 말한 시적 돌출의 경험이다.

 

 

3.

시시각각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사이로 보니 여인은 숙연하며, 초조해하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같은 정도의 걸음걸이로 같은 곳을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 떨어질 재앙을 모르고 있다면 순진함의 극치다. 알고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단하다. 검은 곳이 원래의 거처이고 잠깐의 환영을 원래대로인 어둠 속에 거두어들이기에 이처럼 조용하고 단아한 태도로 유와 무 사이를 소요하고 있을 것이다. 여인이 입은 후리소데에 어지러운 무늬가 없어지고, 옳고 그름의 구별도 없는 먹물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본성을 넌지시 비추고 있었다.’

 

 

여주인공인 나미 씨를 묘사한 문장이다. 사색적인 작품이라고는 말했지만 스토리 자체도 자못 흥미롭다. 화가인 화자가 도쿄를 떠나 한적한 온천마을을 방문한다. 묵게 된 온천장의 어여쁜 딸이 이혼한 후에 친정에 돌아와 있다. (나미 씨)에 대한 쑥덕공론이 온 마을에 퍼져있지만, 화자는 외관만인 아닌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라는 간단한 스토리지만.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독자를 어느새 매혹시키는 여주인공. 그녀에게는 다른 사모하는 남자가 있었다. 집안의 강권으로 도쿄에서 은행을 경영하는 부자 집으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그 집안이 러일전쟁의 여파로 망한다. 망한 시댁을 뒤로 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으니, 그 시절 사람들 모두 쑥덕공론을 펼 수 밖에. 이제는 이혼녀 신세가 된 그녀지만 기개(그렇다. 기개라고 말해야 할 듯)는 살아있다. 저 어둠 속의 슬픔은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채이야기는 나름의 반전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4.

화자의 사색은 자기만의 미학에 대한 것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야기 전체를 조망해 보면 풀베개는 남에게서 건네 들은 얘기를 자기가 직접 확인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색의 내용과 이야기 형식이 아귀가 딱 들어 맞는다. 남에게 들은 것과 자기기 직접 확인한 것을 대비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서양식 미학과 거리를 두고 작가 자신만의 미학을 추구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5.

차분해진다. 시끄러운 세상사에서 한 걸음 물러난 기분이 든다. 소설의 내용은 충분히 속세의 요란함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사에서의 새벽 이미지가 내내 마음 속을 차지했다. 새벽바람에 둔중했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소설의 화자인 은 사전에서 단어를 찾는 버릇이 있다.

단어는 단어 자신을 해석해 줄 다른 말들을 갈구하는 것만 같다. 이 생각이 든 까닭은 솔로몬이 운영하고 있는 전화 구조회의 활동 때문이다. 이 편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저 편의 전화를 받으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저 편의 외롭고 슬픈 사람들은 이 편에서 전화를 받아줄 것을 기대하고 자기 얘기를 하염없이 푼다. 서로에게 기대고 있으니 단어와 단어를 해석하는 다른 어휘들도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서, 하나의 어휘는 다른 언어들을 향해 소리친다. 내게는 그 소리가. 구해 달라고. 제발 구해 달라고 있는 힘껏 목이 갈라지도록 외치는 소리로 들렸다. 구해줘! (사랑해줘!)

 

사랑 Amo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 Amor’이 좌측에서 외친다. 우측에서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응답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외친다. 눈물겹도록. 점점 타 들어가 꺼져버릴 듯한 목소리로.

 

솔로몬 왕의 고뇌는 그러니까 내게는 한쪽에서의 외침에 다른 쪽에서 응답하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다.

 

 

 

2.

유대인인 기성복의 제왕’, 누구보다도 멋진 팔십 대의 할아버지, 솔로몬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파리의 한 건물 지하에서 4년을 숨어살았다. 그는 마드무아젤 코라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지하실에 방문해주기를 원했건만, 그녀는 그때 다른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예전의 유명한 가수가 더 이상 아니었다. 화장실 마담(화장실에서 돈을 받는 징수원)이 된 그녀에게 솔로몬은 경제적 도움을 주지만, 서로 데면데면 지낸다. 35. 무려 35년 동안.

 

사랑, 긴 침묵, 다시 (합류된)사랑.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떠올랐지만, 『솔로몬 왕의 고뇌』는 사랑만큼이나 죽음과 늙어감을 이야기한다. 솔로몬이 마드무아젤 코라에게 을 보낸 것은, ‘이 마드무아젤 코라의 젊었을 적 연인을 닮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이제 그들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격류로 몸부림치는 시간 속, 그 한가운데 서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늘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지만, 삶의 응답은 제때 이뤄지는 법이 드물어. 장이 사전을 찾으면 바로 단어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저 편의 외롭고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이 전화를 걸면 바로 이 편의 또 외롭고 가난하고 슬플지도 모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응답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고 빠르게 주어지는 응답은 없다. 우리는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기다리거나 다른 사람으로 곧잘 대체하고 만다. 다행인지 솔로몬과 마드무아젤 코라는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속절없이 기다렸지만 끝내 사랑의 응답은 이뤄졌다. 하지만, 사랑의 응답을 받으며 끝난 이 소설이 에밀 아자르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 소설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니 또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

 

 

 

3.

솔로몬 씨는 누군가와 다시 합류하기 위해 전화 교환실을 지키지. 그는 심지어 구인광고란까지 들여다본다고. 미용사, 23, 매혹적인 외모. 나는 그렇게 전투적이고, 그렇게 단호하게 자신이 떨어져 나오는 걸 막고 싶어하는 노인을 본 적이 없어. 그는 오래가는 직물로 만든 품위 있는 옷을 입고, 자신에게 여전히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도전적으로 예언가를 찾아가지. 튀니지에서는 그런 사람을 최고의 전사라고 불러. 다만, 전사들은 나아가기 위해서 싸우지만 솔로몬 씨는 뒷걸음치기 위해서 싸우는 게 다를 뿐이야. 우리가 그에게 사십 년을 준다면, 그는 그것을 받을 거야.’

 

 

4년여의 철저한 무응답 속에 산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행태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소설에서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끝내 가슴 아프다.

 

 

 

4.

일부러 한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다른 리뷰를 적을 때도 나는 일부러 중요한 이야기는 빼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긴 하다. 너무 뻔한 얘기를 쓰는 것 같아서(그렇다고 내가 쓴 주변적인(?) 이야기가 뻔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한가지는 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하고 싶은 게 생겼다.

 

소설에서 이십 대인 장은 육십 대의 할머니 마드무아젤 코라와 잔다. 한 번만이 아니다. ‘스스로 이런 (생각지도 못한)사건을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어머니의 부재를 다른 식으로 해소하려는 몸부림으로.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아버지. 오히려 아버지라는 존재가 보다 복잡한 여파를 미친 게 아닐까. ‘의 친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전철 승차권에 구멍을 찍으며 보냈다. 단순함.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단순함은 솔로몬의 복잡성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단순함과 성실함이 만나면 그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젊은 이 느끼기에 그것은 참 지루한 삶. 아니었을까. 젊음의 강렬함과는 아주 멀어 보이는 것. 그렇기에 일견 모순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복잡한 솔로몬에게 그렇게 정신 없이 빠져든 것일 테다. 마드무아젤 코라는 그러한 솔로몬의 복잡성 한가운데, 그 핵심에 존재하는 사랑이다. 그녀가 새로운 아버지 솔로몬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열쇠 같은 존재로 보였을지 모른다. 장에게는.

 

소설의 라이트모티프는 바로 오늘 삶의 장미를 꺾어라!’. 솔로몬의 복잡성 그리고 개별적 사랑의 그 수많은 다양성은 현재의 우연성에 깊이 관여하는 순간 생긴다. 장이 선택한 삶은 바로 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