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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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고도(Godot)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대답이라면
도착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대답이라면

바틀비는
도래했으나 원하지 않은 대답
예상치 못했던 대답
어떤 것도 해결하지 않는 대답
같은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북극성처럼 너무 멀리 있어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존재는
그 존재로 인해
여기의 존재들을 변화시킨 다는 거
방황하게 한다는 거
관계하게 한다는 거
희구하게 한다는 거
스스로를 바라보게 한다는 거.

나와 나의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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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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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지난 일요일 저녁. 2부 끄트머리의 ‘요사이 그의 대인관계는 그야말로 단출해지는 중이었다.’ 는 문장부터 마음이 적요해지기 시작했다. 작중 인물로 등장하는 미셸 우엘벡이 3부 시작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고 그에 따른 수사가 진행될 때 경찰 자슬랭의 태도, 살인의 원인은 거의 모두 돈 아니면 섹스라는 그의 경험담을 말하는 구간에서 처음의 적요함은 무섭게 부풀어 올라 공허의 비누방울 모양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위험신호다. 집에 혼자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외투를 걸치고 근처 카페베네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계속 읽어나갔으나 그 공허, 허무는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세수도 안 하고 이불 속에서 다시 읽어 나갔다. 전날 밤의 여파가 있음에도 왜 그 아침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래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가.. 앞에 나타날 어떤 것이 내게 열쇠를 건네주리라는 예감이 있었던 걸까.. 현대의 미술품과 끔찍한 살인수법을 대비한 듯한 장면들이 계속됐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안락사를 선택한 장 피에르 마르탱(주인공의 부친)과 나이 들어 자연사하는 제드(주인공)를 보자 비누방울이 손에 닿아 조용히 사라지듯, 어둠의 감정이 물러서는 것을 느꼈다. 이전보다 더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주 묘한 경험.

아마 내가 느낀 공허감은 라캉의 “끝없이 지연되는 의미”, “무한한 해석”. 그런 개념과 관계되었던 것 같다. 제드의 첫 작품, 미슐랭 지도의 사진과 실제 항공 사진을 대조한 그 작품부터 생애 마지막 30년간을 천착한 비디오그램의 주제까지 관통하는 것, 제드의 점차 단출해져 가는 인간관계, 미셸 우엘벡의 죽음과 그 사건 해결 과정이 형식적으로 미묘하게 닮아있음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감정 상태로 진입했던 것 같다. “지도와 영토”라는 제목도 바로 이런 기표와 기의의 관계(끝없이 계속되는 기표, 찾을 수 없는 기의)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헤어날 길 없는 막막함이 계속되다가 스위스로 날아가 안락사를 선택한 제드의 아버지를 보고서야 복잡하게 얽힌 공허의 매듭이 순식간에 풀린 것 같다. 삶의 허무성에 대한 반박. 그의 죽음은 내게 그렇게 보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표의 행렬이 그제서야 멈추었다. 거울 두 개 사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 그런 무한의 세계 안에서 탈출한 기분. 참 묘한 경험.

2.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에선 사물들이 형용사를 동반한 보통명사로 등장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에는 미슐랭 지도(데파르트망편, 레지옹편), 베터라이트 6000-HS 스캔백, 레스토랑 ‘셰 안토니 에 조르주’, 바 아르마냐크 카스타레드 1905년산 브랜디, 독일 슈민케 사의 무시니 물감, 삼성전자 ZRT-AV2 카메라, 파라부트 신발, 캐논 리브리스 노트북 프린터, 카멜 레전드 파카, 롤리플렉스 더블렌즈, 오이스터 퍼페추얼 데이 데이트, 르노 사프란, 메르세데스 A클래스 등. 모델넘버까지 붙은 사물들의 정식명칭을 호명한다. 거의 고유명사나 다름없는데, 이 이름들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비주의 세태를 풍자한 듯도 보이고 소비주의 문화를 찬양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제드의 아버지 입을 통해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는데, 그에 대한 역사적 평이 최초의 공예가, 최초의 디자이너, 아르누보의 선구자 등등인 점을 감안한다면, 또한 제드의 2기 작품. 직업시리즈 그림에서 보듯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예술과 일상이 접목된 수공예적인 사물들에게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형용사를 동반한 보통명사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지만, 구체적인 제품명은 ‘검색’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든 브랜드명과 제품의 공식 명을 자주 언급하는 것 자체가 현대 사회의 핵심적 단면을 제대로 낚아챈 것 같아 보인다. 우엘벡이 작품에서 이런 제품들을 언급하는 것은 하루키와는 사뭇 다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는 ‘주어 충전형’으로 상품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우엘벡은 그것 자체가 어느 정도 주어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 점이 마음에 든 건 아니다. 나중에 이 소설을 떠올린다면 이런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두 장면뿐 이라고 생각한다. 떠올릴 것은.

250페이지에 시작하는, 제드와 그의 아버지(대장암이 심해져 인공항문을 달고 괴로워하는)간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모임 장면.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던 아버지가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사랑하던 아내의 자살. 그 이해 못 할 사건 앞 한 남자의 모습, 어렸을 적 제비들을 위해 지은 둥지에 새들이 한 마리도 날아 오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모습, 르 코르뷔지에와 반 데어 로에의 건축 사상에 심정적으로 반대하던 젊었을 적 건축가로서의 이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그 장면. 이 챕터는 부친살해 라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열아홉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대심문관’ 챕터와 배신한 친구 콘라드를 41년 만에 만나 생의 무게 전부를 등에 지고 하룻밤 대화를 나누던 헨릭.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의 그 장면만큼이나 뭐랄까. 좋았다. 압도되었다. 대단한 몰입감이다. 정치적으로 우파로 알려진 우엘벡이 존중할 만한 아버지 캐릭터를 만든 의도가 미덥진 못하지만, 깨끗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장 문장들이었다. 한 남자의 전생애가 집약된 이 몰입의 대화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에 든 초콜릿 프로피트롤을 둘이서 꾸역꾸역 삼키며 시작한다는 사실이 또한 인상적이었다.


“소립자”의 두 형제 중 섹스에 미친(그러면서도 많이 할 기회가 없었던) 브뤼노가 크리스티안 이라는 (어떤 의미에서)천사를 만나 수없이 기괴한 섹스를 나눈 후 크리스티안이 그 후유증으로 꼬리뼈에 괴저가 생겨 하반신 불구가 되었을 때, 크리스티안의 떠나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실행하고 만 그 인간 말종을 대하고 내가 느꼈던 분노는 그 캐릭터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었다. 작가 우엘벡이 면전에 있었다면 주먹을 꽂고 싶을 만큼 화가 났던 그 장면을 생각나게 한 이 소설의 한 장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시설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일하는 여성직원의 냉대와 시신에 대한 존중 없음을 느끼고 제드가 그 여성직원의 따귀를 갈기고 턱에 어퍼컷을 날리고 배를 세게 걷어차는 장면에서, 한편으로는 우엘벡의 (적에 대한)정치적 화해의 쇼 같아 삐딱한 반감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따귀와 어퍼컷과 복부 강타가 “소립자”의 독자였던 내가 당시의 우엘벡에게 고스란히 하고 싶었던 행동이었던 만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하다’는 작중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괜한 말은 아니다.
우엘벡의 소설 어딘가에는 사막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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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하루 이틀 정도는 밤새주면서, 단번에 읽었다면 또 느낌이 달랐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떤 소설은 책을 잡고 나서 중간에 다른 일이라고는 물 마시고 화장실 들르고 하는 정도의 신진대사만 챙기고 줄곧 읽어야만 그 맛이 제대로 우러나오는 법이니까. 한밤의 아이들은 그런 소설이다. 분석보다는 호응, 맞장구, 끄덕끄덕 을 요구하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한자리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소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라마야나의 발미키처럼 그리스의 호메로스처럼 이 이야기꾼 살림 시나이는 이야기를 ‘꾸며’ 나간다. 확 앞으로 전진했다가는 갑자기 멈추고,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가 슬쩍 다른 것으로 새치기 하고, 엄청난 뻥으로 사람 실소하게 만들다가 팍 하고 어퍼컷을 날려 온다. 절단마공도 서슴지 않고 살림(우리의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파드마를 이용한 지연신공도 자연스럽다. 하여간 이야기로 사람을 꾈 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청취자를 홀려 버린다.

그래. 맞다. 독자(讀者)는 먼저 청자(聽者)가 되어야 한다.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거의 70%는 청자로서 주의 깊게 맞장구 치고 함께 눈물 흘리며 슬퍼했다가 똥구녁에 털 나는 것 상관없이 포복절도하게 웃어주며, 나쁜 놈들을 얘기할 때 같이 욕해 주고 안타깝게 죽은 이들을 만날 때면 끌끌 참 안됐어 하며… 그렇게 해 주어야 하는 이야기다. 왜 그래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건망증 심한 인간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우리의 살림 시나이, 이 한밤의 아이는 말한다.

소설이 소설이면서(작중 살림은 이 회고록을 쓴다) 구전 이야기의 형식을 띄기에 중요한 것은 소리다(나중에는 냄새가 된다). 소리는 직진 보다는 휘어져 들어오고 반향 되어 들려 온다. 그 소리가 문장과 문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꿈틀거림을 부여한다. 작품을 읽는 중에 꿈틀거리는 뱀을 떠올렸다. 볼라뇨의 “부적”을 읽었을 때도 “뱀”을 떠올렸는데.. 이 소설의 꿈틀거리는 뱀은 밀림에서도 도시 한복판에도 하늘에도 바닷속에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동양적인 모습에서의) 용 같기도 했다. 엄청난 힘을 몸뚱이에 간직하고 꿈틀 꿈틀거리는 뱀. 그런데 바로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고 잠시 뒤에 살림 시나이 라는 이름을 풀이하는 장면에서 “그러나 신(Sin)은 또한 뱀처럼 구불구불한 S자를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말해 깜짝 놀라게도 했다. 이 꿈틀거림이 소설의 생명력을 줄기차게 유지시켜 줄 뿐 아니라 하향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아담 시나이(살림의 아들)로 이어질 새 시대의 인도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기도 한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은 같다. 소설에서 줄기차게 얘기하는 아포리즘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현재일 것이다. 현재적 시점의 끊임없는 유지. 그것이 그 꿈틀거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일 터이다. 그 에너지만이 독자가, 청자가 잊지 말아야 할 전부일지도.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신약의 처음을 보면 유대의 왕들과 선지자들의 족보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소설은 내림차 정렬의 순응 방식이 아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듯 현재에서 과거를 새롭게 만들듯이 나아간다. 그것은 살림이 여러 아버지를 만드는 일로 계속 이어지고.. 그러한 족보, 가계도의 창조는, 처음에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출생의 비밀, 이후 살림 시나이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 것 중 하나. 살림이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겪는 것과 아대륙 인도가 독립 이후 겪게 되는 일들이 조응을 이루는 패턴이 계속 되는데 이것이 소설의 가장 큰 틀이다.

아니다. 처음에는 어두운 것들은 잊자.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를 그저 보자. “광대 샬리마르”에서도 나오는 스리나가르의 달 호수(Dal Lake). 그곳에 가고 싶다. 내가 가진 인도의 이미지는 아마도 류시화를 비롯한 한국 여행객들의 책들과 후지와라 신야의 사진에세이로부터 얻은 것들이 가장 클 텐데, 그것은 이 소설에서의 인도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부커상을 받은 다른 소설들. 키란 데사이의 “상실의 상속”과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와 “한밤의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현실적’임에도 ‘미신적’인 것들이 뒤엉킨 곳.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 시골 또는 막 자라는 도시의 한 귀퉁이 역사와 별다를 바 없는 그런 곳이다. 고행을 하는 순례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삶 자체가 고행인 보통 사람들의 나라. 그런 곳이다. 가난한 국민, 미친 정치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이 판을 치는 나라. 그 시절 세계의 몇몇 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러했던 그대로의 나라. 그래서 스리나가르의 달 호수는 내게는 시원적인 곳, 아직 옛 동화가 살아 숨쉬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 달 호수에서 아담 아지즈가 서양 의사가 된 후 뱃사공 타이에게서 내침을 당하는 상황은 그러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비유 같았다. 신화 전설 마술의 세계를 상징하는 곳. 무엇보다 ‘글’이 아니라 아직 이야기가 ‘말’로 전해지던 곳. 달 호수. 그곳에 가고 싶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대조적이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똑같은 그곳. 그러고 보니, 부커상을 받은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 세 소설을 읽으면 인도 아대륙의 거의 모든 곳들을 둘러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여간 앉아서 하는 여행을 즐기는 나 같은 사람에겐 적격이다.

달 호수가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의 유년을 대표한다면, 봄베이(소설이 발표된 후 뭄바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의 메솔드 주택단지는 살림의 유년을 대표한다. 많은 치욕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유년을 상징하는 곳. 달 호수와 메솔드 주택단지와 아담의 구멍 난 침대보, 은제 타구와 신문에 난 출생기사 등등은 곧 상실될 터이다. 그러니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봄베이에 되돌아 왔을 때 그렇게 기뻐하는 살림의 모습은 그래서, 짠 하다.

어두운 이야기. 기억 가족 역사는 두 번의 전쟁(인도-파키스탄 전쟁, 파키스탄 내전(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으로 거의 파탄 난다. 살림이 기억을 잃고 가족을 잃고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숨가쁘고 짤막한 말들의 연속으로 풀어가던 그 시기의 처참한 이야기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풀 수 없기에 외계문명까지 이야기 구조에 끌어들였던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처럼 루슈디도 ‘나’를 떠나 보내고 ‘그’라는 3인칭의 시점을 사용하는 기술적 우회로를 만듦으로써 간신히 풀어 나갈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기억을 잃고 감각을 잃었던 그. 살림이 아니라 ‘붓다’라고 불렸던 그 시기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가장 욱씬 거리는 이야기 중 하나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할 것. 여기 내가 쓴 것은 정말이지 이 전체 소설의 아주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읽는 수 밖에. 요약은 불가능 하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몸이고 코이며 귀고 무릎이며 정신이다. 요약하면 기형아가 될 터이다.

마지막으로. 살림의 친족 중에 제일 정이 가는 사람은 내겐 외할아버지 아담과 외삼촌 하니프였는데, 하니프가 자살하는 장면은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를 떠올리게 했다. 순다르반 밀림에서의 시간이 살해된 장면에선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렸고.. 그러니 살만 루슈디가 서장에서 밝힌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소설가들. 제인 오스틴과 찰스 디킨스의 영향을 얘기했는데, 확실히 칼비노와 마르케스의 영향도 엿보인다. 소설 속에 다른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또는 문장이 있으면 기쁘다. 낯선 모임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다시 마지막으로.
20세기 신생 독립국. 인도는 살림 시나이와 남매 쌍둥이로서 예언되었다. 살림 시나이의 이야기는 곧 인도의 이야기임에 그 이야기를 피클로 만들어 봉하는 마지막 장면들을 통해 루슈디는,
암송할 것. 기억할 것. 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전세계에게. 그리고 후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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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기술 -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계산을 멈추고 망설이지 않고 책임을 떠맡는 것. 흥미진진한 인생은 거기서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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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거짓말 - 비올 때 우산을 빼앗아가는 은행의 냉혹한 금융논리
김영기.김영필 지음 / 홍익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경제신문 기자인 저자들의 한계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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