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
지난 일요일 저녁. 2부 끄트머리의 ‘요사이 그의 대인관계는 그야말로 단출해지는 중이었다.’ 는 문장부터 마음이 적요해지기 시작했다. 작중 인물로 등장하는 미셸 우엘벡이 3부 시작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고 그에 따른 수사가 진행될 때 경찰 자슬랭의 태도, 살인의 원인은 거의 모두 돈 아니면 섹스라는 그의 경험담을 말하는 구간에서 처음의 적요함은 무섭게 부풀어 올라 공허의 비누방울 모양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위험신호다. 집에 혼자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외투를 걸치고 근처 카페베네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계속 읽어나갔으나 그 공허, 허무는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세수도 안 하고 이불 속에서 다시 읽어 나갔다. 전날 밤의 여파가 있음에도 왜 그 아침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래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가.. 앞에 나타날 어떤 것이 내게 열쇠를 건네주리라는 예감이 있었던 걸까.. 현대의 미술품과 끔찍한 살인수법을 대비한 듯한 장면들이 계속됐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안락사를 선택한 장 피에르 마르탱(주인공의 부친)과 나이 들어 자연사하는 제드(주인공)를 보자 비누방울이 손에 닿아 조용히 사라지듯, 어둠의 감정이 물러서는 것을 느꼈다. 이전보다 더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주 묘한 경험.

아마 내가 느낀 공허감은 라캉의 “끝없이 지연되는 의미”, “무한한 해석”. 그런 개념과 관계되었던 것 같다. 제드의 첫 작품, 미슐랭 지도의 사진과 실제 항공 사진을 대조한 그 작품부터 생애 마지막 30년간을 천착한 비디오그램의 주제까지 관통하는 것, 제드의 점차 단출해져 가는 인간관계, 미셸 우엘벡의 죽음과 그 사건 해결 과정이 형식적으로 미묘하게 닮아있음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감정 상태로 진입했던 것 같다. “지도와 영토”라는 제목도 바로 이런 기표와 기의의 관계(끝없이 계속되는 기표, 찾을 수 없는 기의)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헤어날 길 없는 막막함이 계속되다가 스위스로 날아가 안락사를 선택한 제드의 아버지를 보고서야 복잡하게 얽힌 공허의 매듭이 순식간에 풀린 것 같다. 삶의 허무성에 대한 반박. 그의 죽음은 내게 그렇게 보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표의 행렬이 그제서야 멈추었다. 거울 두 개 사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 그런 무한의 세계 안에서 탈출한 기분. 참 묘한 경험.

2.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에선 사물들이 형용사를 동반한 보통명사로 등장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에는 미슐랭 지도(데파르트망편, 레지옹편), 베터라이트 6000-HS 스캔백, 레스토랑 ‘셰 안토니 에 조르주’, 바 아르마냐크 카스타레드 1905년산 브랜디, 독일 슈민케 사의 무시니 물감, 삼성전자 ZRT-AV2 카메라, 파라부트 신발, 캐논 리브리스 노트북 프린터, 카멜 레전드 파카, 롤리플렉스 더블렌즈, 오이스터 퍼페추얼 데이 데이트, 르노 사프란, 메르세데스 A클래스 등. 모델넘버까지 붙은 사물들의 정식명칭을 호명한다. 거의 고유명사나 다름없는데, 이 이름들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비주의 세태를 풍자한 듯도 보이고 소비주의 문화를 찬양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제드의 아버지 입을 통해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는데, 그에 대한 역사적 평이 최초의 공예가, 최초의 디자이너, 아르누보의 선구자 등등인 점을 감안한다면, 또한 제드의 2기 작품. 직업시리즈 그림에서 보듯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예술과 일상이 접목된 수공예적인 사물들에게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형용사를 동반한 보통명사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지만, 구체적인 제품명은 ‘검색’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든 브랜드명과 제품의 공식 명을 자주 언급하는 것 자체가 현대 사회의 핵심적 단면을 제대로 낚아챈 것 같아 보인다. 우엘벡이 작품에서 이런 제품들을 언급하는 것은 하루키와는 사뭇 다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키는 ‘주어 충전형’으로 상품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우엘벡은 그것 자체가 어느 정도 주어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 점이 마음에 든 건 아니다. 나중에 이 소설을 떠올린다면 이런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두 장면뿐 이라고 생각한다. 떠올릴 것은.

250페이지에 시작하는, 제드와 그의 아버지(대장암이 심해져 인공항문을 달고 괴로워하는)간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모임 장면.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던 아버지가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사랑하던 아내의 자살. 그 이해 못 할 사건 앞 한 남자의 모습, 어렸을 적 제비들을 위해 지은 둥지에 새들이 한 마리도 날아 오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모습, 르 코르뷔지에와 반 데어 로에의 건축 사상에 심정적으로 반대하던 젊었을 적 건축가로서의 이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그 장면. 이 챕터는 부친살해 라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열아홉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대심문관’ 챕터와 배신한 친구 콘라드를 41년 만에 만나 생의 무게 전부를 등에 지고 하룻밤 대화를 나누던 헨릭.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의 그 장면만큼이나 뭐랄까. 좋았다. 압도되었다. 대단한 몰입감이다. 정치적으로 우파로 알려진 우엘벡이 존중할 만한 아버지 캐릭터를 만든 의도가 미덥진 못하지만, 깨끗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장 문장들이었다. 한 남자의 전생애가 집약된 이 몰입의 대화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에 든 초콜릿 프로피트롤을 둘이서 꾸역꾸역 삼키며 시작한다는 사실이 또한 인상적이었다.


“소립자”의 두 형제 중 섹스에 미친(그러면서도 많이 할 기회가 없었던) 브뤼노가 크리스티안 이라는 (어떤 의미에서)천사를 만나 수없이 기괴한 섹스를 나눈 후 크리스티안이 그 후유증으로 꼬리뼈에 괴저가 생겨 하반신 불구가 되었을 때, 크리스티안의 떠나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실행하고 만 그 인간 말종을 대하고 내가 느꼈던 분노는 그 캐릭터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었다. 작가 우엘벡이 면전에 있었다면 주먹을 꽂고 싶을 만큼 화가 났던 그 장면을 생각나게 한 이 소설의 한 장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시설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일하는 여성직원의 냉대와 시신에 대한 존중 없음을 느끼고 제드가 그 여성직원의 따귀를 갈기고 턱에 어퍼컷을 날리고 배를 세게 걷어차는 장면에서, 한편으로는 우엘벡의 (적에 대한)정치적 화해의 쇼 같아 삐딱한 반감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따귀와 어퍼컷과 복부 강타가 “소립자”의 독자였던 내가 당시의 우엘벡에게 고스란히 하고 싶었던 행동이었던 만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꽤나 정확하다’는 작중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괜한 말은 아니다.
우엘벡의 소설 어딘가에는 사막이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