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1.

683쪽에 이르는 소설은 읽어내려 갈수록 뭔가 한 가지로 수렴되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감정이거나 윤리적인 메시지들.. 단 하나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는데, 이 소설은 한 낱말로 자연스럽게 수렴됐다. 바로크(baroque).

 

처음 카스퍼(주인공)와 콰이어트 걸(클라라마리아)이 만나는 장면의 분위기가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나게 했는데, 아주 세련된 의상이지만 몹시 과장되고 조금은 기괴하게도 느껴졌던 네오, 모피어스, 트리니티의 검은색 가죽 재킷. 그리고 묵시록적이기까지 했던 그들 특유의 걸음걸이가 떠올라서였다. 읽어 갈수록 이런 느낌은 점점 강해져서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 오토모 가츠히로의 걸작 SF만화 <<아키라>> 필도 느껴졌다. 그렇게 처음 나에겐 시각적인 정보들이 소리(음악) 보다 먼저 와 닿았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다. 뭔가에 홀렸었는지. 뭐든지 앞부분을 좀 세세히 보고 뒤는 좀 덤벙덤벙 보는 스타일인데, 어떻게 맨 처음에 나온 악보를 그냥 지나쳤는지. 그리고 카스퍼가 클라라마리아를 포함한 3인조와 처음 만났을 때 들은 음악 토카타와 푸가 D단조라는 곡명을 또 어떻게 그렇게 무시하고 넘어갔는지

 

두 개의 힌트가 초반 한 두 페이지에 이미 다 드러났는데 왜 그랬을까? 악보를 보긴 봤다. 그런데 악보 위에 있던 푸가 16. 이라는 글은 그냥 무심코 넘겼다. 이건 순전히 내가 놓친 힌트였다. 두 번째 토카타와 푸가 D단조는 출판사의 잘못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문장 안에 포함된 괄호형식으로 단어들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는데, 보통은 이 방식이 좀 더 독서에 편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는 주석을 페이지 하단에 별도로 표기하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토카타라는 단어 옆에 붙은 괄호 주석과 푸가라는 단어 옆 또 하나의 괄호 주석은 토카타푸가를 이미 알고 있던 내게는 오히려 집중력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 두 단어를 따로 따로 읽게 되었고 맨 끝에 있던 ‘D단조라는 중요 정보는 무의식적으로 건너 뛰지 않았나 싶다(페이지 하단에 주석을 표기하는 것이 이 소설에 적합한 또 하나의 이유는 주석을 달은 단어가 한 두 개가 아닐 정도로 많아서 독서를 마친 후에 하단 부분에 별도 표기된 주석들만 후루룩 훑어 보아도 좋을 것 같아서다).

 

멍청하게도 한 100여 페이지를 읽은 후에야 반복되는 패턴-카스퍼가 과거를 회상하는 타이밍과 회상하는 내용과 현재 시점과의 묘한 관계-를 느끼고 난 뒤, 카스퍼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흐와 음악에서 이렇게 반복되는 형식적 패턴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 후 떠올리게 된 푸가, 이 두 단어를 함께 검색 했더니 나온 결과가 토카타와 푸가 D단조였던 것. 그러고 나서야.. , 왜 이 음악은 100여 페이지가 지난 지금껏 나오지 않았지? 하고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았고, 그제서야 맨 앞에 벌써 푸가의 악보와 토카타와 푸가 D단조곡명이 이미 적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푸가, 토카타라는 두 단어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어 나가게 되었다. 푸가는 카스퍼의 운명 같은 것으로, 토카타는 카스퍼가 광대로서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표현한 단어로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두 단어만으로는 소설 전체를 나타내기엔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 등장인물들의 경직된 표정들(정말 프랭크 밀러 풍의 만화 캐릭터가 곧바로 떠오른다), 종교적인 대화, 코펜하겐 도심 아래 자리잡은 기묘하고 장대한 지하 하수관 시설, 현대적이지만 악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빌딩들과 악당들, 카스퍼의 과장된 행동과 대사, 무엇보다 소설 플롯과 카스퍼가 살아가는 방식을 겹쳐서 생각하니, ‘최소한의 질서와 논리를 기반으로 자유분방함과 기괴한 양상, 불균형을 강조바로크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진주 모양의 작은 불빛이라고 지하에 서식하는 쥐들을 묘사했는데, 그 표현을 읽고 나니 분명해 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떠나서 바흐 하면 바로크아닌가? 참나 역시나 그걸 맨 나중에야 깨달았다는 것.

 

바로크를 떠올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처럼 지루하게 주절주절 나열한 이유는 그만큼 이 어휘가 소설의 스토리, 인물의 개성, 소설의 주요 주제를 규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질서와 윤리, 그리고 자유분방한 삶의 분출이라는 태도는 등장 인물들의 내적 성장뿐만 아니라 암울한 인류의 미래에 작은 희망을 건넬 수 있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2.

만약 세상이 우리를 피한다면, 우리가 세상을 피한다면, 우리가 그 살인자들일 수도 있는 거야. 우리일 수 있어. 그게 바로 내가 그 사람들(살인자들)하고 마주 앉았을 때 생각한 거야. 내가 그 사람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어. 아이들은 모두 나눠 먹었지. 우리는 말로 하진 않았지만 알고 있었던 거야. 나눠 먹는 빵이 더 맛있다는 걸 말이야. 그 느낌을 설명할 순 없지만 아주 물리적인 감각이었어. 정말로 맛이 한결 좋았지. 나중에 사람들은 그걸 잊어버렸어. 나도 잊어버렸지.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난 그 일을 생각했어. 그때 우리는 알고 있었던 거야. 중요한 것들은 혼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만약 누군가가 굶주리고 있으면 모두가 허기를 느끼지. 행복도 그래. 개인적인 행복이나 자유는 존재하지 않아. 만약 클라라마리아가 자유롭지 않다면 나도 자유롭지 않아. 그 아이가 나야. 아마 그게 사랑이겠지.’

 

작가는 이 사랑을 고귀한 침묵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들은 혼자 가질 수 없다.’는 문장이 바로크의 최소한도의 윤리, 그 한가운데 있음을 느꼈다. 카스퍼가 한 이 말들, 그 에피파니의 순간, 소설은 순간 밝은 빛을 내뿜는다.

 

 

3.

바흐 음악에 밝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글렌 굴드 연주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그나마 내가 인식하는 바흐의 곡들인데, 이 소설의 테마뮤직은 따로 있었다. 수많은 곡들이 언급되지만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샤콘느’. 이 두 음악이 소설을 지배한다. 이 곡들만 인터넷으로 찾아 들었다. 좋다.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만큼이나 좋구나.

 

토카타와 푸가는 소설의 형식적 측면과 관계가 깊고, ‘샤콘느는 인물(카스퍼)의 내적 성장과 관계가 깊다. 소설에 보다 깊은 주름을 선사하는 것은 토카타와 푸가인데, 특히 반복되는 후렴이라고 불려지는 부분들이 소설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카스퍼에게 여러 사람들이 반복하는 질문 왜 애를 낳지 않았죠?’, 소설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흐의 음악, 특정한 역할을 해내는 남녀 한 쌍 인물들의 반복적인 등장 같은 세세한 사항들뿐만 아니라 정신이 물질에 미치는 영향(소설에서는 코펜하겐에 일어난 지진)과 물질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소설의 커다란 주제에까지 반복은 나선형으로 계속된다. 소리가 점차 커지고 주제가 더욱 분명해지며 반향은 거대해진다.

 

 

4.

하지만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훨씬 대중적으로(그게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보다 단순하다는 뜻이다.) 보면 이 소설은 남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들을 차례차례 등장시키는 페티시즘적 소설로 볼 수도 있겠다. 멋진 몸매와 예쁜 얼굴뿐 아니라 전문지식을 갖춘 커리어우먼, 심오한 모성을 지닌 수녀, 아이답지 않은 카리스마와 지혜를 가진 여자아이(클라라마리아) . 이 여성들은 주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많이 등장하는데,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으로 보인다. 높은 지위, 엘리트, . 그럼 카스퍼는 마조히스트? 으음. 글쎄... 그 정도까진 아닌 듯 하지만, 이렇게 강한 여성들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살핌을 받는 것. 남자들과의 폭력적인 대결 또한 크고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결국 마조히스트까지는 아니어도 그(주인공)아이로 남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긴.. 어쩌면 모든 남자가 그렇겠지.

 

그러니 클라라마리아, 카스퍼가 사랑하는 이 심오한 여자아이의 한 마디는 그런 남자들, 상처를 지닌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 줄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들은 버림받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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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여행하는 법 - 토킹 헤즈 리드싱어 데이비드 번의 코스모폴리탄 자전거 여행
데이비드 번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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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행기를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출간되어 나오는 책들의 수준이 낮아서라거나 해외여행에 대한 꿈이 작아져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다. 국내에 출간되는 대부분의 여행기들은 그저 인터넷에서 검색어만 두드리면 접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보만을 알려줄 뿐이거나, 전공자의 지식으로 현지의 역사적, 철학적, 미학적 의의를 알려주는 교과서식 지식 전달에 그쳐 매우 협소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도 우연히 알게 된 보통 사람들이 전부고. 그 모든 것들이 여행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번의 이 책은 여행을 목적으로 한 여행기가 아니다. 예술가로서 전세계 도시들을 업무(?)차 방문하고, 자전거 매니아인 자신의 눈으로 본 각 도시들의 자전거에 대한 친연성을 중심으로 도시의 무의식, 도시인의 욕망을 읽어내는, 관광지로서가 아닌 현재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의 우울한 면모와 그럼에도 희망적이 될 수 있는 포인트를 짚어내고 있다. 단일 컨셉으로 기획된 포트폴리오 같은 느낌.

 

세계적인 음악가이기 때문에 각 도시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 또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다.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뮤지션)나 샌프란시스코의 남쪽 쿠퍼티노에서 만난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 같은 이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그 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인지 짧게 짧게 정리한 글들이었지만 관광객 모드인 책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다. 게다가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서인지 읽을수록 빠져드는 문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멜다를 주제로 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직접 필리핀을 방문한 얘기와 영국의 터너상을 수상한 그레이슨 페리에 대한 글, 주류와 비주류라는 제목으로 걸작의 기준에 대해 논한 글, 마지막으로 뉴욕의 자전거전용도로 확충과 관련된 글들은 전문서적이었다면 딱딱했을, 관광객 모드 여행기였다면 자기 감상적 소회에 머물고 말았을 것들이었는데, 리드미컬한 드럼 소리처럼 정보와 감상의 강약이 제대로 조화를 이뤄 임팩트 있게 표현되었다.

 

뉴욕, 베를린, 이스탄불, 부에노스아이레스, 마닐라, 시드니, 런던, 샌프란시스코 등(그러고 보니 마닐라만 빼고는 전부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는 곳들이구나..) 현대 도시들에 대해 다른 어디서도 듣기 힘든, 인상적인 예술가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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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철학 - 니체를 읽는 아홉 가지 키워드
이수영 지음 / 동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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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지 않은 삶은 유죄다. 라는 뒷표지의 문구 자체가 명랑하지 않다. 괜찮은 내용이었지만 저자는 내내 너무 명랑한 척만 한것 같았다. 그냥 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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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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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몇 채가 서로를 기대듯 모여있던 어렸을 때 가장 오래 살았던 전셋집의 집주인네는 봉투를 만들었다. 과수원용 배 봉투나 사과봉투 같은 것들. 봉투를 만드는 종이들이 아주 아주 많이 쌓여있었는데, 그 종이들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미국의 전화번호부 책들이었다. 엄청 두껍고 종이 질이 좋은, 하얀색과 노란색 페이지가 겹겹이 쌓인, 미국의 수많은 지역의 전화번호부들. 일이 없고 심심할 때 나는 수시로 그 전화번호부 한 권씩을 가져와 뒤적였다. 각종 살림도구들에 대한 광고, 집을 수리할 때 쓰는 각종 도구들, 그리고 인테리어 제품들 광고가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이미지는 미국의 주택 외관이나 내부 인테리어를 묘사한 정밀한 그림들이었다. 그 멋진 집들은(당시에 생각하기에는 서울에도 이런 집들은 없을 듯 했다) 내 상상력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아모스 오즈의 <<시골 생활 풍경>>을 읽으니 그때 보았던 정밀화 들이 떠오른다. 어휘와 문장을 따로 자세히 보면 실제 아모스 오즈가 정밀하게 묘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주르륵 읽으면,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생경한 시선으로 그 집의 특징들을 잡아내듯 그렇게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느낀다. 집안의 가재도구나 베란다, 부엌, 방이나 거실의 구조 등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마을의 길, 광장, 버스정류소, 저수탑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마을(텔일란)의 분위기. 점차 여름 리조트화 되어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포도주 상점, 미술품 화랑, 극동 지방의 가구를 파는 상점, 치즈와 꿀과 올리브를 파는 노점들이 성업하는 그 분위기에게 까지 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에 사는 사람들. 8편의 단편 중 7편에 등장하는 텔일란 사람들의 일상사가 또한 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단편 <상속자>의 마무리 부분은 당황스러웠지만, 길리 스타이너, 페사크 케뎀과 라헬 프랑코, 요시 새슨과 야르데나, 베니 아브니와 나바, 코비 에즈라와 아다 드바쉬, 달리아와 아브라함 레빈의 이야기들에는 쉽게 몰입했다.

 

길리 스타이너는 오지 않은 조카 기드온 때문에 한밤중에 세탁물을 꺼내 다림질을 하고, 세탁물을 개고, 제자리에 정리하고 운다. 독설가 페사크 케뎀이 한밤중에 듣는 땅 파는 소리는 같이 사는 아랍인 학생 아델도 딸 라헬도 듣게 된다. 환청이 전이된다. 요시 새슨은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를 보았지만 진짜 본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베니 아브니는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마요. 라는 아내가 전한 쪽지를 받는다. 마을 거리를 걷는데 잡종 개 한 마리가 30피트 거리를 둔 채 따라다닌다. 아내를 기다린다. 아다는 뺨이 눈물로 뒤덮인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계속 먹고, 마시고, TV를 응시한다. 코비는 마을의 거리를 배회한다. 달리아는 저녁 노래 모임에 몸을 바치고 남편 아브라함 레빈은 점차 말수가 적어진다. 그들의 위층 세 번째 방은 지금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

 

고통이 각자의 고통이듯 고독 또한 각자의 고독이다. 실망에 익숙해지는 일은 언제나 눈물 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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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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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히 당겨진 낚싯줄을 줄곧 상상했다. 낚싯줄을 어깨에 드리우고 깊은 바닷속 물고기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노인의 발끝. 당김과 당겨짐의 힘이 한곳에 집중된 그 지점을.

 

좀 더 좁은 범위에 신경을 쓰게 됐다. 오래 전 읽었을 적에는 상어와의 격투가 가장 눈에 들어왔었지만, 이젠 그 지점. 노인과 청새치가 힘의 균형을 이루던 그 순간이 더 와 닿았다. 낚싯줄이 몸에 닿는 느낌. 온 몸으로 적이자 동료인 청새치를 느끼던 그 순간. 지금이라고 불리는 그 몰입의 시간은 실감나는 지점이었다.

 

큰 소리로 외치듯 내뱉는 혼잣말과 곁에 있었으면 하고 자꾸 아쉬워하던 소년의 존재, 아프리카 사자 꿈 같은 것들도 이미지로 선명히 다가온다.

 

<<로드>>가 생각났다. 이 두 말년의 양식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생한 느낌을 받은 것에 대해선 고맙다고 해야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 리뷰 쓰기를 상당 기간 망설였다. 무슨 확실한 비판의 표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데, 이번에 읽었을 때는 나는 뭐랄까 이 소설의 저변에 깔려있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왠지 꺼려졌다. 세피아빛 사진처럼. <<로드>>의 결말에서도 느낀 점인데, 그건 세상과의 타협이거나 과거 시절에 대한 향수이거나 하는 그런 게 엷게 발라져 있는 것 같았다. 쓸쓸한 기분이 들어서 어디 나가 소주라도 한 잔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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