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하루 이틀 정도는 밤새주면서, 단번에 읽었다면 또 느낌이 달랐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떤 소설은 책을 잡고 나서 중간에 다른 일이라고는 물 마시고 화장실 들르고 하는 정도의 신진대사만 챙기고 줄곧 읽어야만 그 맛이 제대로 우러나오는 법이니까. 한밤의 아이들은 그런 소설이다. 분석보다는 호응, 맞장구, 끄덕끄덕 을 요구하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한자리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소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라마야나의 발미키처럼 그리스의 호메로스처럼 이 이야기꾼 살림 시나이는 이야기를 ‘꾸며’ 나간다. 확 앞으로 전진했다가는 갑자기 멈추고,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가 슬쩍 다른 것으로 새치기 하고, 엄청난 뻥으로 사람 실소하게 만들다가 팍 하고 어퍼컷을 날려 온다. 절단마공도 서슴지 않고 살림(우리의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파드마를 이용한 지연신공도 자연스럽다. 하여간 이야기로 사람을 꾈 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청취자를 홀려 버린다.

그래. 맞다. 독자(讀者)는 먼저 청자(聽者)가 되어야 한다.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거의 70%는 청자로서 주의 깊게 맞장구 치고 함께 눈물 흘리며 슬퍼했다가 똥구녁에 털 나는 것 상관없이 포복절도하게 웃어주며, 나쁜 놈들을 얘기할 때 같이 욕해 주고 안타깝게 죽은 이들을 만날 때면 끌끌 참 안됐어 하며… 그렇게 해 주어야 하는 이야기다. 왜 그래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데? 라고 묻는다면, 건망증 심한 인간들이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우리의 살림 시나이, 이 한밤의 아이는 말한다.

소설이 소설이면서(작중 살림은 이 회고록을 쓴다) 구전 이야기의 형식을 띄기에 중요한 것은 소리다(나중에는 냄새가 된다). 소리는 직진 보다는 휘어져 들어오고 반향 되어 들려 온다. 그 소리가 문장과 문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꿈틀거림을 부여한다. 작품을 읽는 중에 꿈틀거리는 뱀을 떠올렸다. 볼라뇨의 “부적”을 읽었을 때도 “뱀”을 떠올렸는데.. 이 소설의 꿈틀거리는 뱀은 밀림에서도 도시 한복판에도 하늘에도 바닷속에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동양적인 모습에서의) 용 같기도 했다. 엄청난 힘을 몸뚱이에 간직하고 꿈틀 꿈틀거리는 뱀. 그런데 바로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고 잠시 뒤에 살림 시나이 라는 이름을 풀이하는 장면에서 “그러나 신(Sin)은 또한 뱀처럼 구불구불한 S자를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말해 깜짝 놀라게도 했다. 이 꿈틀거림이 소설의 생명력을 줄기차게 유지시켜 줄 뿐 아니라 하향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아담 시나이(살림의 아들)로 이어질 새 시대의 인도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기도 한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은 같다. 소설에서 줄기차게 얘기하는 아포리즘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현재일 것이다. 현재적 시점의 끊임없는 유지. 그것이 그 꿈틀거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일 터이다. 그 에너지만이 독자가, 청자가 잊지 말아야 할 전부일지도.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신약의 처음을 보면 유대의 왕들과 선지자들의 족보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소설은 내림차 정렬의 순응 방식이 아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듯 현재에서 과거를 새롭게 만들듯이 나아간다. 그것은 살림이 여러 아버지를 만드는 일로 계속 이어지고.. 그러한 족보, 가계도의 창조는, 처음에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출생의 비밀, 이후 살림 시나이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 것 중 하나. 살림이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겪는 것과 아대륙 인도가 독립 이후 겪게 되는 일들이 조응을 이루는 패턴이 계속 되는데 이것이 소설의 가장 큰 틀이다.

아니다. 처음에는 어두운 것들은 잊자.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를 그저 보자. “광대 샬리마르”에서도 나오는 스리나가르의 달 호수(Dal Lake). 그곳에 가고 싶다. 내가 가진 인도의 이미지는 아마도 류시화를 비롯한 한국 여행객들의 책들과 후지와라 신야의 사진에세이로부터 얻은 것들이 가장 클 텐데, 그것은 이 소설에서의 인도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부커상을 받은 다른 소설들. 키란 데사이의 “상실의 상속”과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와 “한밤의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현실적’임에도 ‘미신적’인 것들이 뒤엉킨 곳.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 시골 또는 막 자라는 도시의 한 귀퉁이 역사와 별다를 바 없는 그런 곳이다. 고행을 하는 순례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삶 자체가 고행인 보통 사람들의 나라. 그런 곳이다. 가난한 국민, 미친 정치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이 판을 치는 나라. 그 시절 세계의 몇몇 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러했던 그대로의 나라. 그래서 스리나가르의 달 호수는 내게는 시원적인 곳, 아직 옛 동화가 살아 숨쉬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 달 호수에서 아담 아지즈가 서양 의사가 된 후 뱃사공 타이에게서 내침을 당하는 상황은 그러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비유 같았다. 신화 전설 마술의 세계를 상징하는 곳. 무엇보다 ‘글’이 아니라 아직 이야기가 ‘말’로 전해지던 곳. 달 호수. 그곳에 가고 싶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대조적이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똑같은 그곳. 그러고 보니, 부커상을 받은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 세 소설을 읽으면 인도 아대륙의 거의 모든 곳들을 둘러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여간 앉아서 하는 여행을 즐기는 나 같은 사람에겐 적격이다.

달 호수가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의 유년을 대표한다면, 봄베이(소설이 발표된 후 뭄바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의 메솔드 주택단지는 살림의 유년을 대표한다. 많은 치욕적 사건이 벌어진 곳이지만 가장 행복했던 유년을 상징하는 곳. 달 호수와 메솔드 주택단지와 아담의 구멍 난 침대보, 은제 타구와 신문에 난 출생기사 등등은 곧 상실될 터이다. 그러니 그리워하게 될 터이다. 봄베이에 되돌아 왔을 때 그렇게 기뻐하는 살림의 모습은 그래서, 짠 하다.

어두운 이야기. 기억 가족 역사는 두 번의 전쟁(인도-파키스탄 전쟁, 파키스탄 내전(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으로 거의 파탄 난다. 살림이 기억을 잃고 가족을 잃고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숨가쁘고 짤막한 말들의 연속으로 풀어가던 그 시기의 처참한 이야기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풀 수 없기에 외계문명까지 이야기 구조에 끌어들였던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처럼 루슈디도 ‘나’를 떠나 보내고 ‘그’라는 3인칭의 시점을 사용하는 기술적 우회로를 만듦으로써 간신히 풀어 나갈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기억을 잃고 감각을 잃었던 그. 살림이 아니라 ‘붓다’라고 불렸던 그 시기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가장 욱씬 거리는 이야기 중 하나다.

그렇지만 주의해야 할 것. 여기 내가 쓴 것은 정말이지 이 전체 소설의 아주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읽는 수 밖에. 요약은 불가능 하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몸이고 코이며 귀고 무릎이며 정신이다. 요약하면 기형아가 될 터이다.

마지막으로. 살림의 친족 중에 제일 정이 가는 사람은 내겐 외할아버지 아담과 외삼촌 하니프였는데, 하니프가 자살하는 장면은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를 떠올리게 했다. 순다르반 밀림에서의 시간이 살해된 장면에선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렸고.. 그러니 살만 루슈디가 서장에서 밝힌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소설가들. 제인 오스틴과 찰스 디킨스의 영향을 얘기했는데, 확실히 칼비노와 마르케스의 영향도 엿보인다. 소설 속에 다른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또는 문장이 있으면 기쁘다. 낯선 모임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다시 마지막으로.
20세기 신생 독립국. 인도는 살림 시나이와 남매 쌍둥이로서 예언되었다. 살림 시나이의 이야기는 곧 인도의 이야기임에 그 이야기를 피클로 만들어 봉하는 마지막 장면들을 통해 루슈디는,
암송할 것. 기억할 것. 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전세계에게. 그리고 후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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